2022-17. 참 생명을 얻으니
설교자 이범석
본문 행 5:27-32
설교일시 2022-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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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생명을 얻으니 >
사도행전 5:27~32
(2022.4.24. 부활절 제2주)

[그들이 사도들을 데려다가 공의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신문하였다. 
"우리가 그대들에게 그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엄중히 명령하였소. 그런데도 그대들은 그대들의 가르침을 온 예루살렘에 퍼뜨렸소. 그대들은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씌우려 하고 있소."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였다.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은 여러분이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살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분을 높이시어 자기 오른쪽에 앉히시고, 영도자와 구주로 삼으셔서, 이스라엘이 회개를 하고 죄 사함을 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며,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복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십니다.”]


* 사람보다 하나님께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나온 베드로와 사도들의 담대한 답변이 정말 멋지지 않습니까.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오히려 하느님께 복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행5:29,공동번역)
대제사장을 비롯한 서슬 퍼런 성전 권력자들 앞에서, 전혀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믿음을 드러낼 수 있다는 점이 참 좋아 보입니다. 사실 이분들이 원래 이렇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힘찬 사람으로 변했을까요? 오늘의 장면을 이해하려면, 어느 오후 3시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어느 날 오후 3시에 베드로와 요한은 기도하기 위해 성전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문”이라는 성문 곁에는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했던 이가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를 보고, “나는 돈이 없지만, 내가 줄 수 있는 걸 주겠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하며, 그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놀랍게도 그가 일어나 걷기 시작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어리둥절했습니다.
베드로는 모여든 사람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딛고 부활하셨고, 그분이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므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이 되살아나는 이적이 일어났다고 증언했습니다.
이때 사제들과 성전 경비대장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자기들이 죽인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고 증언하고 다닌 것에 격분하여, 사도들을 붙잡아 감옥에 가뒀습니다. 주님의 부활 승천 이후, 첫 번째 박해였습니다. 이튿날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 지도자들이 모여, 사도들을 신문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고 다시 자신 있게 증언합니다. 성전 지도자들은 사도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다시는 말하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백성들 앞에서 계속 기적을 베풀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그러자 성전 지도자들은, 사도들을 잡아 다시 감옥에 가뒀습니다. 두 번째 박해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밤중에 감옥 문을 열고 사도들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생명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계속 전하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사도들은 이른 아침부터 성전에서 예수의 부활과 생명을 전했습니다.
대제시장과 그 일당은 모여 의회를 소집했습니다. 성전 경비대장은 사도들을 의회로 데려왔습니다. 대제사장은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뒀는데, 어쩌자고 예루살렘에서 계속 전하고 다니냐고, 힐난했습니다.
바로 이때, 베드로와 사도들은,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복종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하며,
대제사장 무리가 죽인 예수를, 다름 아닌 바로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고 또 증언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참 지도자요 구세주로 세우셨고,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죄 용서받게 하셨으며, 당신의 영을 주셨음을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성전 지도자들은 격분하여, 사도들을 죽이려 했습니다. 율법 교사 가말리엘이 중재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매질하고, 예수의 이름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단단히 명하고, 풀어줬습니다. 그렇지만 사도들은 날마다 성전과 이 집 저 집에서 쉬지 않고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고 가르쳤습니다.

* 어둠에 갇힌 이들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우리는 사도들의 바로 얼마 전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담대하고 당당한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예수님과 함께 갈릴리를 다녔던 3년 동안은 힘찬 모습이었습니다. 때론 예수님을 위해 죽으러 가자고 외치기도 했습니다. 사실 예수께서 체포되던 순간만 하더라도, 베드로는 칼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잘라 버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예수께서 고분고분 무력하게 잡혀가셨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기가 완전히 죽었고, 베드로는 첫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기까지 했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뒤에는, 더더욱 극심한 두려움에 시달렸습니다. 스승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과 아무런 힘이 없는 자신들의 처지가 원망스러웠을 겁니다. 우리는 흔히 이때의 제자들을 배신자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당시 제자들의 마음을 헤아려보면, 자기들이 예수에게 버림받았다고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하늘 군대를 데려다가 로마 제국을 정복하고 왕이 되시면, 그 좌우에 앉을 거라 여겼습니다. 사실 그러실 능력이 충분히 넘치게 있어 보였습니다. 수많은 이적과 축귀, 치유, 권위 있는 말씀 등 진정 왕이 되실 분 같았습니다. 그래서 더 믿고 따랐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이렇게 가버리시면 어찌합니까. 제자들은 황망하고, 어쩔 줄 몰랐을 겁니다.

사실 우리도 이럴 때 있지 않습니까. 잘 되고 있는데, 갑자기 닥친 어이없는 일로 인해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경험 말입니다. 게다가 우리 나름 믿었던 주님이 뾰족한 수를 내실 만도 한데 묵묵부답이실 때 말입니다. 아, 주님, 저한테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건가요? 답답하고 원망스럽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나를 위해 착착 큰 일을 성취시켜 주실 것 같았는데, 무력하게 가만히 침묵하시면, 막힌 벽 앞에 선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나의 기도가 모두 길바닥에 떨어져서 전부 잊힌 것 같습니다.
코로나19로 지난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심각하게 어려웠던 분들이 여럿 계셨을 줄 압니다. 사실 목회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괴로운 인생 길 가는 몸이 평안히 쉴 곳이 아주 없네 걱정과 고생이 어디는 없으리 돌아갈 내 고향 하늘 나라.” 찬송가 479장을 나지막하게 부르는 목소리가 사무실 근처에서 자주 들렸습니다. 배가되는 업무, 허전함과 상실감, 지지받지 못하는 외로움, 불투명한 전망 등 심적으로도 힘들 뿐 아니라, 육신 이곳저곳이 아우성을 치는 바람에, 모두들 병원을 들락날락해야만 했습니다. 아, 주님, 이렇게까지 하실 겁니까, 그래요, 얼른 데려가세요, 하는 마음과, 동시에, 중심을 잃지 않게 붙들어 주십시오, 하는 마음이 엎치락뒤치락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잃은 제자들의 마음과 몸은 훨씬 더 힘들었겠지요.

* 그대로 받아들여 주심
그러던 중 정말 생뚱맞게도 제자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직접 무덤으로 달려가서 빈 무덤을 확인까지 했습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이 사태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성전법에 허용되지도 않는 십자가 사형을 관철했던 성전 세력은 여전히 신경쓰였고, 언제 스승처럼 반역자로 몰려서 죽임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문을 굳게 닫아걸고 모여있었습니다.
바로 그곳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탓하거나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예전에 그런 것처럼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8:26등)라고 한탄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안녕하냐며 인사하셨습니다. 그리고 유령이 출현했다고 오해할까 봐 그래서인지, 자신의 상처 난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빈 무덤을 확인하고도 여전히 부활을 깨닫지 못하고 있던 이들을 위한 배려였지요. 예수님은 다시 한번 평화의 인사를 하시고는, 살아계실 때처럼 제자들을 파송하십니다. 물론 그냥 내보내시지 않으십니다. 그들을 뒤덮고 있었던 모든 어두운 기운, 울적함, 망연자실함을 흩어버리고 새 기운을 불어넣으시듯, ‘후’ 숨을 내쉬시며, 성령을 선물하여 주십니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서로를 용납하고 용서하는 삶을 직접 보여주라고 당부하십니다. 제자들은 어쩔 줄 몰랐을 겁니다. 시신을 도둑맞은 게 아니라니, 정말 다시 살아나셨다니. 여전히 제자들을 끝까지 아끼고 사랑하시는 음성을 들으며, 그들에게 기쁨과 평화가 가득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 자리에 도마는 없었습니다. 도마는 부활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자기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보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의 이 마음도 역시 그냥 그대로 받아들여 주십니다. 그를 위해 다시 나타나셔서, 인사하시고, 도마에게 당신의 상처를 만져보라고 하십니다. 오직 자기만을 위해 다시 나타나신 예수님을 보며, 도마는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요. 이제 도마는 스승 예수의 부활을 믿고, 하나님께서 예수를 다시 살리셨음을 분명하게 보았습니다. 특별한 계시의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는 위대한 스승일 뿐 아니라, 바로 다름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분이 주시는 참 생명을 받습니다. 그는 이전과는 다른 생명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불충한 제자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 주십니다. 그들의 믿음의 상태와 성정에 맞춰, 그들을 직접 찾아가셔서 만나시고, 그들을 일으켜 세우십니다. 마치 제자들의 연약함마저 당신 책임이라는 듯, 결자해지하는 사람마냥, 한 사람 한 사람 눈높이에 맞춰주시는 주님의 모습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괴로워하며 낙향해서 다시 어부로 되돌아갔던 베드로에게는, 어업의 현장에 나타나셔서, 만선을 하게 하시고, 아침 식사를 준비하셨다가 밤새 피곤했던 베드로와 제자들을 먹이시고,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시고, 용납하시며, 당신의 양 떼를 맡기십니다. 생전에 말씀하셨던 것처럼, 제자들을 하나도 잃지 않고, 각기 그에게 적절한 방식으로 위로하시고, 믿음을 회복시키시고, 일으켜 세우십니다.

상대방을 각기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고, 지지할 때, 그는 밑바닥을 치고 일어나, 자기 모습으로 온전히 설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압니다. 이게 바로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걸 말입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부부간에도, 동료들 간에도, 이렇게 받아들여 줘야 하지만, 사실 잘 알면서도, 내 욕심이 앞서서, 내 염려가 앞서서, 상대를 향한 나의 믿음이 부족해서, 번번이 실패합니다.
하지만 정말 조건 없이 온전히 받아들여짐의 체험을 해본 사람은 압니다. 이 땅에서 체험할 수 있는 구원이 바로 그것이라는 걸 말입니다. 상대방에게 진심으로 온전히 받아들여진 사람의 내면에는 놀라운 사건이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차츰 어둠은 가라앉고, 빛이 내면 깊숙한 곳으로부터 샘솟습니다. 내일에 대한 새 희망을 품게 됩니다. 실패가 두렵지 않습니다. 넘어져도 받아들여 주실 분이 계시니까요. 도전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담력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죽으신 이후에도 부활하여 찾아오셔서 나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걸 몸으로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한 분이라는 확신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합니다. 한 마디로, 그의 안에 두려움, 주저함, 불신 같이 사라져야 할 어두운 것들은 모두 죽게 되고, 담대함, 도전 정신, 신뢰와 같이 다시 살아나야 할 것들이 하나씩 새 생명을 얻습니다.

저는 요맘때 나무의 빛깔을 저는 참 좋아합니다. 아마 많은 분이 그러실 텐데요. 비 내리는 날, 창밖을 내다보면, 봄비를 맞으며 물기를 머금은 연록 빛깔 나뭇잎을 볼 수 있습니다. 색이 말갛고 부드럽지만, 생명의 기운이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고사리손 같은 잎사귀들이, 겨울을 나면서 거무죽죽해진 가지를 가득 뒤덮습니다. 그 연록 빛을 보면, 생명이란 참 신비하고 감격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이게 부활의 한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 부활의 능력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각기 제 모습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여 주셨습니다. 그들이 어둠을 헤치고 환한 빛의 세계로, 부활을 믿고 참 생명을 받는 세계로 나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의 진정한 일원으로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공의회에 선 사도들처럼 힘차고 담대하게 주님의 나라를 이뤄가게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 넣으며,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님은 ‘생각나게 하시는 분’(요14:26)입니다. 제자들이 울렁이던 마음을 가라앉히자, 그들에게 예수님과 만났던 첫사랑의 기억과 공생애 기간 함께 다녔던 시절의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첫 선포를 기억하십니까.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막1:15) 제자들은 자신을 부른 첫 음성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막1:17) 예수님께서 자신의 활동을 “눈 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마11:5) 것이라고 표현하셨던 것 또한 기억납니다.
그 당시에는 그냥 놀라운 일들이요 감동적인 말씀이었지만, 이제는 이 말씀들이 한 데 모여서, 어떤 세상을 지시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온몸으로 체화되어, 살아있는 말씀이 되고 있음을 느낍니다.
맞습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 제자들의 마음속에도, 간절히 바라던 세상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로마 제국에 수탈당하지 않고, 가난한 이들도 사람답게 사는 세상,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갖고 난 이들도 아무 차별 없이 제 한 생명 살아낼 수 있는 세상, 아프지 말고, 귀신 들리지 말고, 화평하게 사는 세상에 대한 꿈이 있었습니다. 세상 일에 치여서 그 꿈을 모두 접고 잊을 즈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그들을 부르시고 일깨우신 겁니다. 마치 우리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다만 그 아름다운 세상으로 가는 방법이, 로마 제국의 방식, 즉 무력과 권력과 재력을 휘두르는 방식이 아니라는 걸 뒤늦게 깨닫습니다. 사랑과 희생과 포용과 공감과 화해의 길, 바로 예수님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지난 3년 동안 애써서 그걸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이제 다 생각났습니다. 불충한 자신들을 온전히 받아들여 주신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품고, 실패의 두려움 없이, 그분의 나라를 힘차게 이뤄가면 됩니다. 부활은 예전의 삶으로 회귀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새로운 차원의 삶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그 길 가운데 장애물이 있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바로 부활하신 주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부활 신앙의 선물이 무엇입니까?
마음을 돌이키는 자를 그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 주시는 은총입니다. 그 영혼과 육신을 갉아먹어, 너덜너덜 닳아버리게 만드는 세상의 거센 힘과 유혹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음으로부터 다시 일으키시는 능력 있는 분임을 완벽하게 신뢰하기에, 죽음과 소멸 앞에서도 담대하고 의연해질 수 있는 근기입니다. 예수님에게 처음 빠져들었던 첫사랑의 진한 추억을 되살아나게 하는 기억의 영입니다. 사람을 가두고 박해하고 심지어 죽일 수도 있지만, 결코 소멸시킬 수 없는 세상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의 나라를 뚝심 있게 건설하는 능력입니다. 한 번 넘어지고, 두 번 넘어져도, 우리를 받아 품으시고, 또다시 일으키실 분이 계심을 확고히 믿고, 세상에 덤비는 모험가의 태도입니다.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을 참 생명으로 파릇파릇하게 일어서게 만드는 힘찬 기운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온전히 경험한 제자들은 이제 변화하였습니다. 자신을 가두고, 박해하고, 심지어 죽일 수도 있는 성전 권력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아들을 향한 약속을 지키셨던 것처럼, 자신들을 향한 생명의 약속도 반드시 지키시리라는 것을 확고하게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뜻이요 동시에 예수님의 공생애 행적이었던 바로 그 길을 힘차게 따라나설 수 있습니다. 우리도 또한 그 길에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굳은 믿음으로 설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

사랑의 하나님, 스승을 십자가에서 잃고, 자기 삶의 길마저 잃어버린 제자들을, 예수님은 한 사람 한 사람 따듯한 품에 받아들여 주셨습니다. 나의 어둡고 나약한 면까지 외면하지 않고 받아들여 주시는 은혜를 찬양합니다. 우리의 어둠은 주님의 숨결로 흩어 주시고, 주님과의 첫사랑의 기억과 첫 사명의 기억을 부활시켜 주십시오. 이웃을 용납하며, 세상을 품고자 했던, 가슴 떨렸던 순수한 열망을 다시 살려 주십시오. 부활의 영으로 담대하고 힘차게 일어나, 주님의 나라를 이뤄가게 도와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2년 04월 24일 12시 09분 06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