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8. 다시 좁은 문으로
설교자 이재훈
본문 눅 13:22-30
설교일시 2022-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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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좁은 문으로
눅 13:22-30
(2022/05/01, 교회설립기념주일)

[예수께서 여러 성읍과 마을에 들르셔서, 가르치시면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셨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께 물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들어가려고 해도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집주인이 일어나서,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면서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졸라도, 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때에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는 주인님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인님은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할 터이나, 주인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모두 내게서 물러가거라' 할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는 하나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는 바깥으로 쫓겨난 것을 너희가 보게 될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면서 이를 갈 것이다. 사람들이 동과 서에서, 또 남과 북에서 와서, 하나님 나라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다. 보아라, 꼴찌가 첫째가 될 사람이 있고, 첫째가 꼴찌가 될 사람이 있다."]

• 코로나가 만든 진풍경

참 좋으신 우리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이자 청파교회가 백 열 네 번째 생일을 맞이한 날입니다. 올해 101세가 되시는 정두리 권사님보다도 이 청파교회가 10년은 더 살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청파와 함께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더불어 이 긴 시간동안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얼마나 잘 감당해 왔는지 또한 돌아보게 됩니다. 감사와 반성의 마음으로 오늘 하루를 기념했으면 좋겠습니다.

최근 코로나가 2급 감염병으로 하향 조정되고 또 내일부터 실외 마스크 착용 의무가 해제 되면서, 기존에 제약되었던 많은 것들이 회복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약 2년 3개월 만에 일어난 변화입니다. 물론 여전히 조심스러운 부분은 있지만, 그래도 조금씩 코로나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이 2년 3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참 많은 것을 잃고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아무래도 그 가운데 가장 크게 잃은 것은 ‘당연하게 누려왔던 것들’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훼손된 자연은 어느 정도 회복되었지만, 자연스러운 만남과 대화, 소통은 잃고 말았습니다. 교회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진 않습니다. 미자립 교회, 즉 비전 교회들은 점점 더 상황이 열악해져서, 문을 닫거나 한 교회 건물을 나눠쓰게 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형편이 좀 나은 교회는 온정을 나눌 기회를 얻기도 했지만, 어쨌든 이 코로나 전후로 교회의 빈부격차도 점점 가속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코로나가 만든 풍경 가운데는 교인들의 이동도 있었습니다. 교회 옮기기를 주저하던 교우분들이 용기를 내어 출석 교회를 옮기기도 하고 또 그게 여의치 않은 분들은 출석 교회는 두되 타교회의 온라인 교우가 되어 두 곳 이상의 교회를 섬기기도 했습니다. 온라인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는 이 팬데믹 상황이 만들어 낸, 아주 흥미로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코로나가 준 영향중에 이 부분이 참 크다고 여겨지는데, 주일에 교회에 나가지 않아도 별일이 일어나지 않음을 경험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불꽃처럼 임한다거나 또는 길을 걷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는 일도 일어나지 않음을 알게 된 것이지요. 이전에는, 마치 주일날 교회를 나가지 않으면, 머피의 법칙 같은 것이 작동되어 나를 힘들게 할 줄 알았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걸 경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 벌주는 걸 좋아하지 않고, 자비가 가득한 분’이라는 이야기를 백 번 들어도 믿어지지 않던 것이, 코로나가 단번에 가르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이런 모든 상황들이 코로나가 만든 새로운 진풍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

특히 우리 청파교회는 이 코로나 기간 동안, 새교우분들이 많이 늘었습니다. 참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참 감사한 일이면서도, 한편으로 부담이 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새교우분들이 용기를 내어 이곳에 오셨다는 것은 어떤 기대와 꿈을 품고 오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대한 갈급함, 돌봄, 새로운 사람들과의 사귐과 교제, 교회 내의 갖가지 봉사 등을 기대하고 이곳을 찾으셨으리라 봅니다.

물론 이분들의 마음을 한 마디 말로 정의내리긴 어렵겠습니다만, 한편으로 새교우분들이 내려 준 이 과제와 함께, 더불어 고민해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청파교회가 지켜온 오랜 전통과의 조화입니다. 청파교회를 소개하는 소개 문구 중에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한적한 오솔길 갈은 교회’라는 것이 있습니다. 목사님이 쓰신 <일상 순례자>라는 책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청파교회는 차분히 스스로를 돌아보며, 소란스럽지 않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훈련을 하는 교회입니다. 새로운 꿈과 기대를 갖고 이곳을 찾은 분들과 또 그간 청파가 지켜온 이 전통 사이의 균형을 잘 맞춰가는 게, 우리 앞에 놓인 과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갈피를 잡기 어려울 때는 ‘하나의 기준점’을 떠올려야 합니다. 그 기준점은 바로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 즉 ‘주님께서 꾸신 꿈’을 다시 살펴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과연 제자들을 향해 어떤 기대를 품으셨고 또 무엇을 가르치셨는지 그리고 그분은 어떤 세상을 마음속에 그려 오셨는지를 함께 고민해 봐야 합니다.

• 꿈꾸는 예수

요한복음 1장을 보면, 요한은 예수에게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모습을 보았습니다(요1:14). 여기서 ‘진리’란 ‘알레테이아(aletheia)’를 말하는데, ‘알레테이아’는 ‘잊고 있던 것을 생각나게 하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길을 잃고 방황할 때마다, 참 고향과 참 쉴 곳이 어디인지를 떠올리게 하셨습니다. 물론 여기서 참된 쉼이 있는 곳은 장소라기보다는 주님과 동행하는 그 순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우리가 어디로부터 왔고 또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생각나게 하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참 고향을 생각나게 하시는 분이기도 했지만, 그는 스스로 꿈꾸는 자이기도 했습니다. 예수께서 꾸신 꿈은 이사야서 말씀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먼저 예수께서는 함께 어울려 사는 세상을 꿈꾸셨습니다.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사11:6)” 다니는 세상을 꿈꾸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두려움 없이 누군가를 맞아들이고, 누구나 자기 몫에 만족해하는 세상을 꿈꾸셨습니다. 바로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훈련도 하지(사2:4)” 않는 바로 그런 세상을 예수께서는 꿈꾸셨습니다.

그러니까 꿈꾸는 자로써의 예수는 너와 내가 어떠한 편견 없이 어울리고, 또 다른 누군가를 적대시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존재로 여기는 세상! 바로 이 세상을 꿈꾸고 기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요? 우리는 예수의 꿈을 잃어버린 채, 너무 날카로워져 있고 또 사랑을 주기보다 받기만을 바라며 살고 있진 않았던가요? 자기반성이 필요할 때입니다.

사실 이러한 ‘예수의 꿈’은 청파교회만 회복해야 하는 꿈은 아닙니다. 지금 이 땅위의 많은 교회들이 잃어버린 꿈이기도 합니다. 교회들이 점점 매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코로나 이후, 종교의 매력이 점점 하향세를 타고 있습니다. 교회가 자랑거리가 되지 못하는 이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 어떻게 돌파해야 할까요? 물론 답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 부분을 함께 고민해 봐야 합니다.

• 좁은 길로 들어가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누가복음>의 말씀은 꽤 익숙한 말씀 중 하나입니다. 해당 본문은 예수의 공생애 기간 중에 있었던 일을 보여주는데, 오늘 본문에 등장한 예수의 음성은 점점 높아지고, 또 그가 전하는 메시지의 강도 또한 점점 세지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예수께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구원받을 사람의 수가 적으냐고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한 가지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입니다. 비유라는 게 그러하듯, 예수께서는 많다/적다라고 답하지 않으시고, 조금은 우회적으로 대답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들어가려고 해도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집주인이 일어나서,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면서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졸라도, 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눅 13:24-25)

사실 이미 문 자체가 좁기 때문에, 그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우리는 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의 수’마저도 많지 않을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집주인이 일찍, 그 문을 닫아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이 닫히고 나면, 이미 집주인과 관계있던 사람일지라도, 그곳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됩니다. 아무리 주님 가까이서 음식을 먹고 나누었다 할지라도 또 길에서 주님의 가르침을 듣고 배웠다 할지라도 그 사실이 구원과 무관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예수께서는 안 그래도 좁은 문을 더 좁혀 놓았던 것일까요?

예수께서 어떤 나쁜 마음을 품어서 그러셨던 것은 아닙니다. ‘절박함’,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 이후, 사람들이 받게 될 임박한 심판 때문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심판’은 ‘지옥의 형벌’ 같은 걸 말하지 않습니다. 빛을 잃고 어두워진 세상, 어둠의 욕망만이 가득한 세상이 곧 심판의 결과인 것입니다. 예수의 마음은 사람들을 향한 연민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속히, 어둠의 길에서 벗어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길 바랐던 것입니다.

• 좁은 문: 하나님으로 충만해지는 길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좁은 문’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지를 말입니다. 여기서 ‘좁다’라는 말은 ‘환난’과 유사한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좁은 길’은 곧 ‘환난의 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환난의 길로 들어가라고 명하십니다. 그럼 여기서 우리는 또 이 ‘환난’이 무엇을 말하는 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여러 가지 의미를 들 수 있겠지만, 저는 이 환난을 ‘누군가를 사랑하려고 애쓰다가 상처 입은 영혼 혹은 가슴’이라고 정의내리고 싶습니다.

사랑의 무게가 많이 가벼워진 세상이 되었지만, 사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쩌면 제대로 사랑한 사람은 추해질 수밖에 없는지도 모릅니다. 철학자 김진영 선생님은 ‘타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곧 타자를 아름답게 만드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누군가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줘버리게 되면, 결국 자기 안에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게 됩니다. 텅 비어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정말 제대로 사랑한 사람은 모든 것이 소진된 상태가 되기 때문에 추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환난’은 내가 추해질 것을 각오하고 덤비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께서는 ‘환난의 길’로 들어가라는 이 말씀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어떤 마음이 드셨는지요? 솔직히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그리 반갑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고통을 피하고 싶은 것이 우리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구원 받기 위해 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길 힘쓰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서 하는 고생 길! 만약 구원받는 이 길이 불행하기만 한 길이라면 또 예수를 따른다는 것이 꽃길이 아니라 고생길이기만 하다면, 우리는 정말 그 길을 기꺼이 또 즐겁게 걸어갈 수 있을까요?

우리는 복음서 한 군데를 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신 이 말씀은 마태복음 7장에 한 번 더 등장합니다. 마태복음 7장을 보면, ‘좁은 문’을 ‘생명으로 이끄는 문’으로 비유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널찍하여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길이 비좁아서, 그것을 찾는 사람이 적다.” (마 7:13-14)

‘좁은 문’은 ‘환난이 가득한 고생길’을 뜻하지만, 또한 그 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 ‘생명’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로마서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는데, 로마서 8장을 보면, 성령에 속한 생각은 ‘생명과 평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생명’이란 ‘하나님으로 인해 충만해진 상태’를 말합니다. 성경에서 생명을 얻었다는 말은 우리의 목숨이 연장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해 생기 있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좁은 문’은 곧 ‘생명으로 이끄는 문’이고,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하나님으로 인해 충만해진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좁은 문’은 환난을 자처하는 길이면서도, 또 한편으로 ‘하나님으로 인해 충만해진 상태’를 일컫는 것입니다. 만약 ‘좁은 문’이 주님으로 인해 충만해지는 길이라면, 우리는 이 길을 기꺼이 또 당당하게 걸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우리가 이 ‘좁은 문’을 겁내지 않아도 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 문으로 들어가길 힘쓰다보면, 어느새 자신과 함께 걷고 있는 이들을 만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가 먼저 좁은 곳으로 들어가길 힘쓴다면, 반드시 동행을 만나게 될 것이고 또 누군가는 나의 모습을 보고 그 뒤를 따르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주님 편에 서려는 자를 결코, 홀로 내버려 두지 않을 것입니다.

• 예수의 꿈과 좁은 문

오늘은 청파교회 백 열 네 번째 설립기념주일입니다. 기념하고 축하해야 마땅한 날입니다. 오늘의 청파교회가 있기까지 많은 분들의 수고와 헌신, 기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근본이신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다시 새로운 출발을 모색해야 할 때입니다.

2년이 넘는 펜데믹 기간은 누군가에게는 새로 도약할 기회가 되었고 또 누군가에게는 어둠의 통로를 걷는 위기의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이 과도기와 같은 시간에, 많은 새교우분들이 청파교회를 찾아주셨습니다. 이제는 늘 변함없는 모습으로 전통을 지켜 오셨던 기존의 교우분들과 또 새로 이곳을 찾은 새교우분들이, 다함께 다시 ‘예수의 꿈’을 꾸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점점 매력을 잃고 있는 교회에 대한 책임감을 갖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좁은 문’이 환난과 어려움만 있는 길이 아님을, 이 길을 걸을 때 하나님의 은총과 내적인 충만함이 가득할 것을 믿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믿음 가지고 하루하루 명랑하게 지내는 저와 여러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신 말씀 기억하며 거둠의 기도드리겠습니다.

등 록 날 짜 2022년 05월 01일 10시 18분 20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