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24. 조용히 자라는 하나님 나라
설교자 김기석
본문 막4:26-34
설교일시 2018/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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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자라는 하나님 나라
막4:26-34
(2018/06/17, 성령강림 후 제4주)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고, 밤낮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그 씨에서 싹이 나고 자라지만, 그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싹을 내고, 그 다음에는 이삭을 내고, 또 그 다음에는 이삭에 알찬 낟알을 낸다.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댄다. 추수 때가 왔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길까? 또는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겨자씨와 같으니, 그것은 땅에 심을 때에는 세상에 있는 어떤 씨보다도 더 작다. 그러나 심고 나면 자라서, 어떤 풀보다 더 큰 가지들을 뻗어,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로, 이와 같이 많은 비유로 말씀을 전하셨다.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않으셨으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설명해 주셨다.]

∙ 역사의 간지
주님의 은총과 평안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세상이 참 빠르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이들도 많습니다. 학자들은 지방 선거 결과를 일종의 시대적 전환의 징조로 보려 합니다. 구세대의 진지가 붕괴됐다, 구시대로 회귀하는 퇴로가 차단됐다고도 말합니다. 지난 시대의 금기들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세대에게 시대 운영의 주도권이 넘어갔다는 것입니다(송호근 교수). 북미정상회담 역시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위협적이고 적대적인 말을 쏟아내던 두 정상이 손을 맞잡고 엄지를 들어 올리는 모습을 보게 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습니까? 북한은 완전한 비핵화 과정을 주도적으로 진행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이들이 있지만 평화의 서광이 이 땅에 비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철학자 헤겔은 역사를 '절대 정신'의 자기 전개 과정으로 보면서 '이성의 간지奸智'(List der Vernunft)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조금 어려운 말이지요? 우리 식으로 쉽게 말하자면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야심과 약점을 지닌 사람들을 이용해서 자신의 목표를 이루어 가신다는 말입니다. 예언자들이 포로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팔레스타인으로 귀환하도록 조치를 취한 페르시아의 고레스를 하나님의 종이라 소개했던 것을 떠올리면 되겠습니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은 이래저래 세계사적 개인이 되었습니다. 자기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는 역할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급변하는 세상에서 과거에만 집착할 수는 없습니다. 더 이상 인습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누구나 정보의 생산자가 되고, 소비자가 되는 시대입니다. 대다수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책이 아니라 유튜브를 통해 필요한 정보를 얻습니다. 유튜브는 없는 게 없는 놀이터입니다. 수없이 많은 정보들이 유통되는 시장입니다. 문제는 그 정보들이 생산되고 폐기되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데 있습니다. 변화 속에서도 꾸준히 지속되는 것이 없으면 우리는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느림 속에서만 누릴 수 있는 삶의 아름다움도 있는 법입니다. 생텍쥐페리는 <어린왕자>에서 친구는 가게에서 살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정은 관계를 맺기 위해 허비한 시간과 관련 있습니다.

∙ 인습적 지혜를 넘어
변화의 속도에 너무 뒤쳐져서도 안 되지만, 빠른 변화 속에서도 결코 놓쳐서는 안 될 가치를 굳게 붙들어야 삶이 단단해집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비유, 특히 하나님 나라의 비유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 나라를 죽은 이후에 주어질 보상으로 생각하지만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현실 속에서 실현되는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다스리시는 곳이 곧 하나님 나라라는 말입니다. 그 나라는 힘과 술수에 기초한 인간의 나라와 구별됩니다. 누가 높으냐를 두고 제자들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을 때 주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아는 대로, 이방 사람들을 다스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백성들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백성들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막10:42-44)

사람들은 자기가 비판하는 사람을 닮는 법입니다. 가부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들은 자기는 커서 절대로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자식들에게 아버지가 보였던 행동 양태를 반복하는 자기 모습에 놀라기도 합니다. 을에 속한 사람들은 갑질하는 이들을 비판하지만, 많은 경우 을의 욕망은 갑이 되는 것이라는 사실도 같은 사실을 가리킵니다. 세상의 문법에 따라 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새로운 삶의 문법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서 있는 자리가 다르면 세상이 달리 보이는 법입니다. 오죽 하면 사람은 생활을 위한 도구를 바꾸는 순간 하나님까지 바꾼다는 말이 나왔겠습니까?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살지 못하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If you can't live the way you think, think the way you live)고 합니다. 예수를 따라 산다는 것은 인습적인 지혜의 길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이 말씀 속에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의 특색은 지배하지 않음입니다. 그 통치에 참여하는 이들은 기꺼이 다른 이들을 섬기는 자리에 섭니다. 영악한 세상은 그렇게 사는 이들을 조롱합니다. 제몫도 찾지 못하는 반편 취급을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통치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과연 도래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오늘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낙심하지 말아야 함을 가르치십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렸습니다. 소중한 씨를 땅에 뿌린다는 것은 상당한 모험입니다. 새가 쪼아 먹을 수도 있고, 큰 비가 내려 떠내려 갈 수도 있고, 가물어 타 죽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농부들은 씨 뿌리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싹이 나지 않으면 움씨를 뿌리기도 하고, 가물어 싹이 타들어 가면 물을 뿌려주고, 비가 내려 뿌리가 드러나면 북을 돋워주고, 잡초를 뽑아 생장의 조건을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그 끈질긴 희망은 장엄하기까지 합니다.

농부들은 제 아무리 굶주려도 봄에 뿌려야 할 씨앗은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신영복 선생은 20년을 감옥에서 보낸 자신을 지켜준 말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석과불식碩果不食'이 그것입니다. 석과는 큰 과일을 뜻하지만, 주역의 이미지로 보자면 가지 끝에 마지막으로 남은 열매를 가리킵니다. 그것은 먹고 싶다고 하여 먹어버리면 안 됩니다. 그것을 씨로 받아 심어야 새봄에 새싹으로 돋아나고, 자라 나무가 되고, 마침내 숲을 이루게 되기 때문입니다. 농부들의 마음이 그러할 것입니다.

∙ 찢어진 것을 꿰매는 일
땅에 묻힌 씨가 발아하여 새싹이 돋아난 광경은 언제 보아도 신비합니다. 식물학자들이라면 그런 식물 발아의 과정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런 이치를 알기 어렵습니다. 씨를 뿌린 농부조차 그 이치를 잘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마치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겸허해지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 거기에 있습니다.

주님이 일상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런 일을 새삼스럽게 상기시키면서 하나님 나라가 그러하다고 말씀하시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하나님 나라의 씨앗을 뿌리는 이들은 결실이 당장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조바심내지 말고 조용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 아닐까요?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과 인내 그리고 분명한 지향입니다. 프랑스 작가인 알베르 까뮈의 글을 읽다가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가 작가의 소명이라 말하는 것이 믿는 이들의 소명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찢어진 것을 다시 꿰매야 하고 이토록 명백하게 부당한 세계 속에서 정의가 상상 가능한 것이 되도록 해야 하며 이 세기의 불행에 중독된 민중에게 행복이 의미 있는 것이 되도록 해야 한다."(알베르 까뮈, [결혼·여름], '편도나무들', 김화영 옮김, 책세상, 2009년 8월 5일, p.110-111)

찢어진 세상을 꿰매는 것, 부당한 세상에서 정의가 상상 가능한 것이 되도록 만드는 것, 진짜 행복이 무엇인지를 일깨우는 것은 믿는 이들의 소명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는 놀라운 변화의 문턱 앞에 서 있습니다. 평창 동계 올림픽이 열린 이후 이 땅에 불어오고 있는 봄바람이 사뭇 훈훈합니다. 남북의 정상들이 함께 도보 다리를 산책하고 친근한 미소를 건네기도 합니다. 장성급 회담과 고위급 회담이 열렸고, 끊어졌던 소통의 통로가 열리고 있습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도 없던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있기까지는 평화의 씨를 뿌리는 이들의 줄기찬 노력이 있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온갖 오해와 박해를 받으면서도 평화로운 세상, 분단이 극복된 나라를 꿈꿔왔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이르자 그 꿈들이 일제히 발아하고 있는 것입니다. 루쉰은 길은 처음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걸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제2이사야서의 첫 머리에 나오는 장엄한 외침을 기억합니다.

"한 소리가 외친다. '광야에 주님께서 오실 길을 닦아라. 사막에 우리의 하나님께서 오실 큰길을 곧게 내어라. 모든 계곡은 메우고, 산과 언덕은 깎아 내리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하고, 험한 곳은 평지로 만들어라.'"(사40:3-4)

생명의 씨, 평화의 씨를 뿌리는 이들이야말로 역사에 길을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흘린 땀과 눈물, 그리고 피는 허비되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때는 반드시 다가옵니다. 그것이 조용히 자라는 씨의 비유 속에 담긴 교훈입니다.

∙ 겨자풀과 같은 사람들
겨자씨의 비유도 같은 진실을 드러내 보이고 있습니다. 겨자씨는 아주 작습니다. 그러나 일단 땅에 심기면 나고 자라서 어떤 풀보다 큰 가지들을 뻗어,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정도가 됩니다. 왜 하고 많은 씨앗 중에서 주님이 겨자씨에 주목하셨을까요? 유대인들의 일상적 어법에 자주 등장했기 때문일 겁니다. 안병무 박사에 따르면 유대인들에게 겨자씨는 가장 작은 것을 상징합니다. 유대 문헌에는 '겨자씨만한 핏방울' 또는 '겨자씨만한 위협'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 데, 이것은 법정에서 자기 잘못을 변호하는 데 쓴 말입니다. "가령 누구에게 상처를 준 죄로 법정에 서게 된 사람이 그것이 극히 가벼운 상처였다는 표현으로 핏방울이 겨우 겨자씨만큼도 안 됐다고 하거나, 자기 잘못은 겨자씨만큼이나 가볍고 작은 것이라고"(안병무, [예수의 이야기], 한길사, 민중신학4, 1993년 1월 5일, p.219) 주장했다는 것입니다.

겨자씨의 비유는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더 놀라운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의도적으로 선택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제1성서인 구약에서 위대한 왕은 '큰 나무' 혹은 '백향목'에 비유되고, 그의 통치권은 '그늘' 혹은 '가지'로 표상되곤 했습니다. 에스겔서에서 하나님은 백향목 끝에 돋은 가지를 꺾어다가 우뚝 솟은 산 위에 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의 높은 산 위에 내가 그 가지를 심어 놓으면, 거기에서 가지가 뻗어 나오고, 열매를 맺으며,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다. 그 때에는 온갖 새들이 그 나무에 깃들이고, 온갖 날짐승들이 그 가지 끝에서 보금자리를 만들 것이다."(겔17:23)

회복된 나라의 꿈이 백향목으로 상징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백향목으로 상징되는 위대한 인물의 자리에 평범하지만 끈질긴 생명력을 보이는 겨자풀을 대입하고 있습니다. 겨자풀은 나무가 아니라 다년생 초본으로 척박한 곳에서도 잘 자랍니다. 주님은 그런 생명력에 주목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위대한 어떤 존재에 의해 이 땅에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이들, 자기에게 품부된 생명의 몫을 끈질기게 살아내는 사람들을 통해 도래한다는 사실을 가르치시려는 것입니다.

운전자가 뇌전증으로 쓰러져 사고의 위험이 있는 것을 보고 자기 차로 막아서 큰 사고를 막아낸 사람들, 술에 취해 길거리에 쓰러진 이를 돕기 위해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 살 권리를 되찾기 위해 거리에 나선 이들 곁에 머물러 주는 사람들, 화재가 난 줄 모르고 깊은 잠에 빠진 사람들을 깨우기 위해 애쓰다가 질식해 쓰러진 사람, 굶주린 이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대접하기 위해 나선 사람들, 난민들의 설 땅이 되어주기 위해 땀 흘리는 사람들, 바로 이런 이들이 겨자풀과 같은 이들이 아닐까요? 하나님 나라의 꿈을 품은 이들은 어떤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나 일거에 역사의 모순을 제거하고 좋은 세상을 열어주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꿈을 가슴에 품고 이 척박한 역사 속에 스며들어야 합니다. 이 멋진 변화의 계절에 우리도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답게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8년 09월 18일 09시 47분 38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