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37. 자기 초월이라는 소명
설교자 김기석
본문 신 31:9-13
설교일시 2018/09/16, 창조절 3주
오디오파일 s20180916.mp3 [15849 KBytes]
목록

자기 초월이라는 소명
신 31:9-13
(2018/09/16, 창조절 3주)

[모세가 이 율법을 기록하여, 주님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 자손 제사장들과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에게 주었다. 모세가 그들에게 명령하였다. “일곱 해가 끝날 때마다, 곧 빚을 면제해 주는 해의 초막절에, 온 이스라엘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뵈려고 그분이 택하신 곳으로 나오면, 당신들은 이 율법을 온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읽어서, 그들의 귀에 들려주십시오. 당신들은 이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만이 아니라 성 안에서 당신들과 같이 사는 외국 사람도 불러모아서, 그들이 율법을 듣고 배워서,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경외하며,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키도록 하십시오. 당신들이 요단 강을 건너가서 차지하는 땅에 살게 될 때에, 이 율법을 알지 못하는 당신들의 자손도 듣고 배워서,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십시오.”]

∙ 개신교회의 현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저는 가을이 되어도 가을을 만끽하지 못합니다. 해마다 가을은 각 교단의 총회가 열리는 계절입니다. 총회에서 논의되고 결정하는 일들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기여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오히려 개신교회가 얼마나 퇴행적 집단인지를 만천하에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명성교회의 세습을 둘러싼 논쟁, 동성애 문제, 다소 진보적 목소리를 내는 기관과 잡지에 대한 이단성 심사, 여성 안수 문제 등이 다뤄지고 있습니다. 수준 높은 신학적 논쟁은 없고 감정 과잉의 반응만이 도드라진 모임입니다. 자기들과 신학적·신앙적 입장이 다르다고 하여 다른 교파에 속한 목회자를 이단으로 지정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반지성주의와 무례함이 도를 넘고 있습니다. 김삼환 목사는 명성교회의 세습을 반대하는 이들을 일러 ‘마귀’라고 단언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을 무너뜨리기 위한 조직적 움직임이 있다면서, 그들과 맞서야 한다고 교인들을 부추겼습니다. 우리는 피폐한 영혼의 바닥을 보고 있습니다.

세상은 아주 싸늘한 눈으로 개신교회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비아냥과 저주를 퍼붓기도 합니다. 역사의 나무에 핀 가장 아름다운 꽃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교회가 세상의 추문거리가 되었습니다. 역사는 발전하고 있는데, 교회는 퇴행을 거듭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계2:5b)던 주님의 말씀이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다른 이들은 몰락의 징후를 다 알고 있는데 오직 교회만이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가 굳게 지켜야 할 것은 ‘진리, 진실, 진정성’이지 ‘우리 편‘이 아닙니다. 우리끼리 자화자찬하고, 우리끼리만 행복한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아닙니다. 아브라함 조수아 헤셸은 말합니다.

“모든 전통적인 종교가 지니고 있는 고질병은 괴어 있어 썩는 것이다. 안착하여 기정 사실이 되어버린 것은 무엇이거나 쉽게 부패할 수 있다. 신앙이 교조로 대치되고 자발성이 진부한 모방으로 바뀐다.”(아브라함 헤셸, 진리를 향한 열정, 이현주 옮김, 종로서적, 1985년 3월 20일, p.77)

∙야수성을 넘어
긴장이 사라질 때 신앙생활은 습관이 되고, 진리를 따르는 거룩한 삶은 소멸됩니다.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 치열하게 성찰하고 노력하지 않는 한 우리는 과거의 인력에 속절없이 끌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끌려가는 삶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성도들이 놓치지 말아야 할 생의 목표를 간결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난날의 생활 방식대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그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엡4:22-24)

새 사람이 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나의 부족함을 알아차리는 일입니다. 나의 영적 참상을 깨닫고 아파하지 않는 사람은 새로워질 수 없습니다. 자기기만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의 너절함에 대한 절망입니다.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거짓된 자아에 절망하지 않는 사람은 새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의 눈에서 티끌을 빼겠다고 하면서 자기 눈 앞의 들보는 보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그런데 자기에 대한 절망에만 머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하는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갈망이 없어 우리 삶은 지리멸렬입니다. 갈망한다는 것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개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편안함만을 구합니다. 전도된 진리 추구입니다.

아프지만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말씀 앞에 겸손하게 엎드려야 합니다. 세상이라는 어두운 숲길을 걷다보면 길을 잃기 일쑤입니다. 그럴 때마다 잠시 멈추어 서서 방향을 가늠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다른 이들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입니까?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손에 넣는 것입니까? 우리가 정녕 믿는 이들이라면 하나님의 마음과 깊은 일치를 이루는 것이야말로 우리 인생의 목표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고,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 살아가는 것 말입니다. 세상적으로 보자면 그런 삶은 어리석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 길만이 우리를 참된 자유로 이끌어 줍니다.

사람의 사람됨은 다른 이들의 요구에 응답함으로 형성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강도 만난 사람을 위해 자기의 모든 일정과 계획을 바꿔야 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그럴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고통 받는 타자들과 연루되기를 꺼렸습니다. 오직 자기에게만 몰두한 채 사는 사람은 참 사람의 길에서 벗어난 사람입니다. 앞서도 언급한 아브라함 헤셸은 인간성의 반대는 야수성이라면서 “야수성이란 이웃 사람의 인간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그의 요구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아브라함 헤셸, <누가 사람이냐>, 이현주 옮김, 종로서적, 1996년 4월20일, p.46)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우리를 개별화하려는 세상에 맞서 하나님의 뜻하심에 ‘아멘’ 할 때, 이웃의 신음소리에 반응할 때, 허무와 부조리에 맞서 사랑을 선택할 때 사람이 되는 법입니다.

∙역사를 새롭게
하나님은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라는 소명을 주셨습니다. 그들이 40년 동안이나 광야생활을 해야 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그 소명에 합당한 존재로 단련되기 위해서였습니다. 자기 속으로 구부러진 인간이 타자들을 소중한 이웃으로 대하고, 그들을 위해 자기를 선물로 내줄 수 있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법입니다. 모세는 자기 욕망의 감옥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한 이들과 40년을 동행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출애굽의 대의를 완수하지 못한 채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가 되었음을 알았기에, 백성들에게 용기를 불어넣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여호수아가 백성을 이끌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들과 동행하시면서 약속하신 바를 이루어주실 것이니 용기를 잃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모세는 율법의 말씀을 기록하여 주님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 자손 제사장들과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에게 주면서 “일곱 해가 끝날 때마다, 곧 빚을 면제해 주는 해의 초막절에” 백성들을 불러모아 율법을 그들의 귀에 들려주라고 명했습니다. 왜 하필이면 초막절입니까? 초막절이 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카’(sukkah)라는 초막을 지어놓고 일주일 동안 그 안에서 생활했습니다. 초막은 엉성하게 지어야 했습니다. 비도 새고 밤하늘의 별빛도 스며들도록 지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조상들이 겪었던 광야생활의 신산스러움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삶이 평안해지면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이 사람의 버릇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장치를 마련해 초심을 잃지 않도록 배려하셨습니다. 초막절에 가장 중요한 것은 율법을 낭독하는 일이었습니다. 율법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우선적 관심이었습니다. 설 땅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설 땅을 제공해주고, 자기 목소리를 갖지 못한 사람들의 눌린 소리를 들어주고, 투명 인간 취급받는 사람들에게 발언권을 주는 것이 율법의 정수입니다.

특히 면제년에 시행되는 초막절기에는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만이 아니라, 성 안에 사는 외국 사람들도 다 초대해야 했습니다. 율법 낭독은 어떤 의미에서는 역사의 방향잡기라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바로 살고 있는지 돌아보고, 어긋난 자리에 있다면 돌이키기 위한 장치였습니다.

∙치열하게 기억하기
하루하루 일상에 떠밀려 살다보면 우리가 왜 사는지, 왜 이 세상에 보냄을 받았는지, 우리 존재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까맣게 잃어버리게 마련입니다. 삶은 어느덧 습관이 되고, 우리에게 부여된 역할을 그저 충실하게 수행하는 것으로 할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에 길들여진 채 살아갑니다. 바울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라“(롬12:2)고 말했지만 우리는 시대의 풍조를 넘어갈 내적 힘을 잃고 말았습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혹은 우리 가운데서 행하신 일들을 치열하게 기억하는 일을 통해 깊어집니다. 이 시대는 우리에게 행복의 신기루를 보여주면서 우리를 미혹합니다. 그 신기루를 따라갈수록 삶은 고달파지고, 불안이 깊어집니다. 삶은 불안정하고 미래의 전망도 불투명하기에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맹렬하게 현실에 매달립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몸에 힘이 들어가고, 정신적 여백은 점점 사라집니다. 여백이 없기에 이웃들을 환대하지 못합니다. 이웃과의 따뜻한 교감이 없기에 외롭습니다. 존재의 망각에 빠지는 겁니다. 이게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다른 삶도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우리는 삶을 축제로 바꾸며 살아야 합니다. 자꾸만 우리 삶을 더 큰 지평 속에서 바라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신명기서에서 우리가 자주 마주치는 단어가 있습니다. ‘기억하라’가 그것입니다. 신명기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종살이로부터 해방하신 것, 애굽에서 행하신 일, 광야에서 동행하신 일도 기억해야 하지만, 하나님을 격노하게 했던 일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기억하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자코르(zakhor)인데, 그 기본 의미는 ‘마음에 뿌리를 내리다’ 혹은 ‘새기다’입니다. 기억은 단순한 메모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기억은 망각에 저항하는 행위입니다. 우리 삶이 고달픈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가락에 실어 노래했습니다. 노래는 기억의 장치이기도 합니다. 해마다 반복하는 절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신앙 공동체는 기억의 공동체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총을 함께 기억하고 경축하는 이들이 곁에 있을 때 우리는 현실을 넘어설 용기를 내게 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언제나 우리의 예측을 넘어섭니다. 하나님이 사용하는 방법은 참 다양합니다. 미국 감리교회 서부지역 평신도 지도자 수련회에 참석했던 대북서지역(Great Northwest Episcopal Area) 그랜트 하기야(Grant Hagiya) 감독이 설교 중에 들려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2004년 허리케인 카타리나가 미국 동남부 지역을 강타했을 때 미국 서부 지역의 감리교도들이 복구 지원을 위해 팀을 꾸리고 현장으로 달려갔다고 합니다. 그는 당시 감리사였는데 어려운 이웃들을 돕고 싶은 열의는 있었지만 솜씨가 형편없어서 자기가 어떤 일을 하고 나면 꼭 다른 사람이 마무리를 해야 했다고 합니다. 하루는 바람에 날아간 어느 집 지붕을 고쳐주라는 지시가 본부에서 내려와 그는 봉사자들과 함께 그 집에 가서 온종일 지붕을 고쳤습니다. 일은 저녁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어둑어둑해질 무렵 차 한 대가 그 현장으로 들어왔습니다. 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봉사자들을 멀뚱멀뚱 바라보았습니다. 그 집주인 부부였습니다. 그들은 아무런 통보도 받지 못했다면서 어쨌든 집으로 좀 들어오시라고 봉사자들을 초대했습니다. 물이 잔뜩 고인 집은 앉을 공간조차 없었습니다. 나중에 봉사자들은 자기들이 엉뚱한 주소를 찾아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들 부부는 망설임 끝에 자기들의 속내를 털어놓았습니다. 허리케인으로 인해 그들은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삶의 희망은 허물어졌고 살아갈 힘도 잃었습니다. 그래서 둘은 자기들에게 의미 있는 마지막 장소로 돌아와 그 밤에 세상을 하직하기로 작정하고 돌아왔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현실에 직면한 것입니다. 부부는 이제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연민에 사로잡힌 봉사자들은 그들에게 용기를 내라고 격려하고는 함께 기도를 드리자고 제안했습니다. 기도를 마친 후 그들은 마음에 감동되는 대로 곧 다시 돌아와 집을 지어주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잘못된 주소를 들고 갔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착오를 통해 두 생명을 구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엄숙한 시간’이라는 시가 떠올랐습니다. “세상 어디선가 지금 울고 있는 사람/까닭 없이 울고 있는 그 사람은/나를 우는 것이다.” 세상은 이렇게 한 통속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주 가끔 우리는 그런 사실을 깨닫고는 감동합니다. 바로 이런 깨달음의 순간이 자기 초월의 순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 속에서 일으키시는 기적은 많고도 많습니다. 그 이야기를 함께 나눌 때 우리는 세상의 인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젊은 세대들에게 남겨주어야 할 유산이 있다면 하나님과 동행했던 삶의 기억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다가 어려움을 겪은 이야기도 나누고, 어려움 속에서 경험한 자유의 기억도 나누고,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나눌 때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현실은 여전히 어둡습니다. 허무와 절망의 어둠이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러나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순례자로 살아가는 동료들이 우리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어둡다고 투덜거리기보다는 한 점 등불을 밝히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자기 연민과 한계에 갇히지 않고, 자기를 초월하는 사랑의 사람이 될 때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이 이 땅에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 삶이 세상의 희망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8년 09월 16일 11시 37분 06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