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50. 기다림은 영적 예민함을 가다듬는 것
설교자 김기석
본문 렘 23:3-8
설교일시 2018/12/16
오디오파일 s20181216.mp3 [16414 KBytes]
목록

기다림은 영적 예민함을 가다듬는 것
렘23:3-8
(2018/12/16, 대림절 제3주)

[이제는 내가 친히 내 양 떼 가운데서 남은 양들을 모으겠다. 내가 쫓아냈던 모든 나라에서 모아서, 다시 그들이 살던 목장으로 데려오겠다. 그러면 그들이 번성하여 수가 많아질 것이다. 내가 그들을 돌보아 줄 참다운 목자들을 세워 줄 것이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무서워 떠는 일이 없을 것이며, 하나도 잃어버리는 일이 없을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내가 다윗에게서 의로운 가지가 하나 돋아나게 할 그 날이 오고 있다. 나 주의 말이다. 그는 왕이 되어 슬기롭게 통치하면서, 세상에 공평과 정의를 실현할 것이다. 그 때가 오면 유다가 구원을 받을 것이며, 이스라엘이 안전한 거처가 될 것이다. 사람들이 그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구원이시다'라고 부를 것이다. 그러므로 보아라, 그 날이 지금 오고 있다. 나 주의 말이다. 그 때에는 사람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주'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 않고, 그 대신에 '이스라엘 집의 자손이 쫓겨가서 살던 북녘 땅과 그 밖의 모든 나라에서 그들을 이끌어 내신 주'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할 것이다. 그 때에는 그들이 고향 땅에서 살 것이다."]

∙우리의 기다림은 진실한가?
빛으로 오시는 주님의 평화와 기쁨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대림절 첫 주와 둘째 주에 저는 각각 ‘기다림은 그에게로 가는 것’, ‘기다림은 자기를 깨끗이 하는 것’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오늘은 ‘기다림은 영적 예민함을 가다듬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 합니다. 기다림의 내용은 미래에 속하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입니다. 아직 오지 않았기에 미지의 영역입니다. 미래는 설렘과 희망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우리 속에 두려움을 자아내기도 합니다. 학자들은 오늘의 젊은이들이 역사상 최초로 앞선 세대보다 못한 삶을 살게 될 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우울한 전망입니다. 미래에 대한 낙관은 많이 무너졌습니다. 장밋빛 미래가 아니라 잿빛 미래가 우리 앞에 전개될 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 희망의 조짐을 붙들고 싶어합니다. 저는 진보란 보듬어 안는 능력의 확장이라는 말에 동의합니다. 낯선 이들을 환대하고, 그들에게 설 자리를 제공하고, 차이를 존중하는 것, 약자들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야 할 마땅한 길입니다. 제레미 리프킨은 역사를 공감의 확대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이러한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회적 약자들의 삶은 위태롭고, 난민들에 대한 미움과 혐오가 도를 넘고 있습니다. 몸은 살아 있으나 영혼을 빼앗긴 것처럼 보이는 좀비족들이 너무 많습니다. 분노 조절을 못하는 사람들, 날카롭게 발톱을 세운 채 사는 사람들, 다른 이들의 고통에 무감각한 이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습니다. 위험한 세상입니다. 가야 할 길은 분명한데, 역사는 퇴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삶에 돌입해 오셔서 우리를 바른 길로 이끌어주실 주님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주중에 디트리히 본회퍼의 책을 읽다가 어둠이 지극한 바로 이 때야말로 주님을 기다린다는 의미가 오롯이 드러나는 때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들이 疑心과 摸索과 기다림 속에서 어떤 괴로움과 隘路를 느낄 때 그리고 갑자기 自己의 存在가 喪失되었고 生의 無意味性에 빠졌다고 느끼며 不安해 할 때에 아마 우리는 聖書가 말하는 ‘기다림’에 대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긴긴 밤, 自己의 등불에 불을 켜고 主人이 빨리 돌아오시지 않는가고 밤하늘을 쳐다보며 不安해 할 때 그때 아마 멀지 않은 곳에서 예수의 祝福의 말씀은 힘있게 우리에게 들려질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멀리서부터 ‘볼찌어다 내가 門밖에 서서 두드리노라’(계3:20) 또는 ‘主人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福이 있으리로다’라고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분의 音聲을 들을 수 있습니다.”(디이트리히 본회퍼, [기다리는 사람들], 손명걸 역, 信文社, 1966년 8월 27일, p.22)

의심과 상실감, 생의 무의미성과 불안이 우리 삶을 삼키려 할 때야말로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절실하게 깨닫는 때입니다. 주님은 지금 문 밖에서 서서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예기치 않은 시간에 당도하는 주인처럼 우리에게 오고 계십니다. 지금은 영혼의 혼곤한 잠에서 깨어나 위로부터 오는 소식에 예민해져야 할 때입니다.

∙지도자들의 죄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로 인해 마음이 스산해질 때마다 되뇌는 말씀이 있습니다.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너희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다.” “하늘이 땅보다 높듯이, 나의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다”(사55:8, 9). 이 말씀을 저는 희망의 밑절미로 삼곤 합니다. 내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이 높고 깊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초조함이 잦아듭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공동체를 지름길인 해변길이 아니라 에움길인 광야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그 긴 여정을 통해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뜻과 경험에 따라 사는 이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에 이끌리는 백성으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바빌로니아의 위협으로 인해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 있을 때 유다는 그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기 위해 분주했습니다. 그때 예레미야는 왕과 대신들, 그리고 백성들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아니라 그들이 한사코 외면하고 싶었던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루살렘은 결국 망한다’, ‘바빌로니아 군대에게 나가 항복하는 사람은 살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죽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무능력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공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이지만 잘못을 처벌하지 않고 넘어가는 분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먼저 나라를 책임지고 있는 왕의 죄를 준엄하게 심판하십니다.

“나 주가 말한다. 너희는 공평과 정의를 실천하고, 억압하는 자들의 손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하여 주고, 외국인과 고아와 과부를 괴롭히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 곳에서 무죄한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지 말아라.”(렘22:3)

왕이 해야 할 일은 이처럼 간명합니다. 공평과 정의를 실천하는 것,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하여 주는 것, 사회적 약자들이 안심하며 살 수 있도록 하는 것, 그 땅에서 무고한 피가 흐르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현실은 어떻습니까? 위탁모들에게 맡겨졌던 아이들이 학대를 당하다가 죽고, 이 겨울에 재개발 지역에서 쫓겨난 사람이 한강에 투신하고, 비정규직 일자리에서라도 성심껏 일하던 젊은이가 콘베이어 벨트에 끼어 죽었습니다. 태안 화력발전소의젊은 노동자 고 김용균씨는 지금 우리 사회가 얼마나 무정하고 위험한 곳으로 변모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징표인 동시에 희생양입니다. 기업이나 국가는 예산과 인력 부족을 빌미로 위험을 외주화하고 있습니다.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에서는 생명 가치는 존중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세상을 미워하십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한 결과는 무엇입니까? 역사에 대한 준엄한 심판입니다. 예레미야는 살룸, 여호야김, 여호야긴 왕을 일컬어 “내 목장의 양 떼를 죽이고 흩어버린 목자들”(렘23:1)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주님의 저주를 피할 수 없습니다. 정치 지도자들은 물론이고 어떤 자리에서든 다른 이들을 돌보아야 하는 책임을 지고 있는 이들은 이 말씀을 두렵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타락한 종교의 폐해
문제는 정치 지도자들에게만 있지 않습니다. 역사의 타락은 그들을 향해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 하는 예언자들과 제사장들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할 때 빚어지는 현실입니다. 예레미야는 “예언자도 썩었고, 제사장도 썩었다”(렘23:11)고 말합니다. 그들은 성전 안에서도 악행을 저질렀고, 간음을 행하고, 거짓말을 일삼고,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을 돕기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종교가 권력과 결탁하면 반드시 타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종교가 권력을 탐할 때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종교와 권력은 창조적인 긴장 가운데 있을 때 건강합니다. 힘 있는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만 늘어놓는 이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일꾼이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그런 거짓 종교인들을 일러 보냄을 받지 않고도 달려나가는 사람들이라 말합니다. 그들은 오지랖이 넓어 이 일 저 일 다 참견하고, 이런 자리 저런 자리에 빠짐없이 얼굴을 내밀면서도 정작 해야 할 일은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일, 자기를 지우고 또 지우는 일, 고통 속에 있는 이들 곁에 머물고 그들의 설 땅이 되어주는 일 말입니다. 그들은 다른 일로 공사다망하여 이런 데 쓸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지성과 영성 부족을 숨기기 위해 가면을 쓰곤 합니다. 꿈에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거나 기도 중에 어떤 음성을 들었다고 말하면서 사람들의 영혼을 사로잡습니다. 예레미야는 그런 이들을 가리켜 주님의 이름을 팔아 거짓말로 예언하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가끔 저는 이런 저런 종교적인 두려움에 포박된 이들을 대할 때마다 마음 깊은 곳에서 분노를 느낍니다. 사람들을 거짓된 권위나 환상으로부터 벗어나 자유인으로 살도록 하는 것이 신앙인들의 책무인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릇된 지도자들을 만난 사람들은 마치 거미줄에 묶인 듯 옴짝달싹 하지 못합니다. 죄책과 두려움으로 마비된 그들의 영혼은 마치 날개가 구겨진 나비처럼 기쁨의 하늘을 훨훨 날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언자나 제사장들의 죄를 엄중하게 벌하시는 까닭을 예레미야는 이렇게 밝힙니다. “죄악이 예루살렘의 예언자들에게서 솟아 나와서, 온 나라에 퍼졌기 때문이다.” 두려운 이미지입니다. 마치 사람들에게 독이 든 샘물을 먹이는 것 같지 않습니까? 타락한 종교는 이처럼 치명적입니다.

∙의로운 가지
하지만 절망에 빠질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공의의 하나님은 또한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죄를 지은 백성을 벌하시지만 그들을 아주 버리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세상 도처에 흩어져 사는 당신의 백성들을 모으시고,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데려오실 것이고, 그들이 번성하여 수가 많아지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참다운 목자를 세우셔서 그들을 돌보게 하실 것입니다. 다윗에게서 나온 의로운 가지인 그 목자는 세상에 공평과 정의를 실현하실 분이십니다.

그는 세상 사람들 속에 있는 선의 가능성을 일깨우시는 분이십니다. 처벌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렇게 사는 것이 기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하도록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목자를 통해 유다는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은 안전한 거처가 될 것입니다. 그 목자는 양을 “하나도 잃어버리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귀하지 않은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노자 도덕경 59장에 나오는 한 구절을 늘 명심하고 있습니다. 치인사천 막약색(治人事天 莫若嗇), 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 데 아끼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을 아끼는 것이 정치와 종교의 근본입니다. 선한 목자는 생명을 아끼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 선한 목자를 잘 압니다. “나는 선한 목자이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요10:11) “나는 선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요10:14) 말씀하신 분 말입니다. 주님이 하시는 일은 더뎌 보입니다. 눈에 띄지도 않고 효율적으로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봄볕에 온 산을 덮고 있던 눈이 녹는 것처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막을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생명의 속도는 느린 법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어두워도 빛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주님이 지금도 일하고 계시기에 우리도 일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 가운데 오고 계신 주님은 우리를 위해 길을 만들고 계십니다. 볼 생각이 없는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 길은 분명 열리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 남북한의 군인들이 비무장지대 안에 있던 GP를 철거한 후에, 철거가 제대로 이루어졌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만났습니다. 군사분계선을 알리는 노란색 천을 제거한 후에 비무장상태의 남북한 군인들이 친교의 악수를 나눴습니다. 그리고 검증을 위해 오전에는 북으로 올라가고 오후에는 남으로 내려왔습니다. 긴장이 넘치던 비무장지대, 말이 비무장지대이지 실은 서로의 총구가 날카롭게 대치하고 곳곳에 지뢰가 매설되었던 그곳에 작은 오솔길이 열렸습니다. 안심하고 오갈 수 있는 길 말입니다. 저는 꽤 오래 전부터 우리 교회를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한적한 오솔길’로 생각했습니다. 그 때문일까요? 비무장지대에 열린 오솔길은 제게 각별한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남북 혹은 북미 사이에 빚어진 긴 반목의 역사와 기억이 일시에 해소될 수는 없겠지만 저 오솔길로 오가는 동안 서로 신뢰가 싹트면 역사의 봄이 멀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변해 갑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그런 시대적 징조에 예민해야 합니다. 대림절은 세상 일에 쫓기면서 무뎌진 우리 영혼을 예민하게 벼리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혼돈을 질서로 바꾸시는 하나님, 어둠 속에서 빛을 창조하시는 하나님, 지금 울고 있는 이들 곁에 다가서시는 하나님, 무의미의 심연에 빠진 이들을 건져 올리셔서 당신의 일에 동참시키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온 몸과 마음으로 받드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8년 12월 16일 11시 19분 18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