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52.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설교자 김기석
본문 롬 12:9-12
설교일시 2018/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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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롬12:9-21
(2018/12/31, 송구영신예배)

[사랑에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악한 것을 미워하고, 선한 것을 굳게 잡으십시오.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다정하게 대하며,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십시오. 열심을 내어서 부지런히 일하며,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십시오. 소망을 품고 즐거워하며, 환난을 당할 때에 참으며, 기도를 꾸준히 하십시오. 성도들이 쓸 것을 공급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십시오.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축복을 하고, 저주를 하지 마십시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 서로 한 마음이 되고,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사귀고, 스스로 지혜가 있는 체하지 마십시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려고 애쓰십시오.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그 일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십시오. 성경에도 기록하기를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하였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 그렇게 하는 것은, 네가 그의 머리 위에다가 숯불을 쌓는 셈이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죄의 밤은 깊어가고
오늘 이 자리까지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립니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모두의 가슴을 가득 채우시기를 기원합니다. 곡절 많은 인생길이지만 우리는 비틀거리면서도 여기까지 이르렀습니다. 상처가 된 기억들, 이루지 못한 일들이 많아 안타깝지만, 그래도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감격스럽습니다.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보살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시23:4). 시인의 고백이 참으로 적실하게 다가옵니다. 주님의 사랑 ‘덕분에’ 살았지만 또한 든든한 동행들이 있어 즐거웠습니다. 비틀거릴 때마다 다가와 손을 내밀어 주고, 외롭고 슬플 때 곁에 머물러 준 사람들 말입니다.

전우익 선생은 “해마다 낙엽을 보며 또 엄동에 까맣게 언 솔잎을 보며” 깨달은 삶의 이치를 간결하게 요약한 바 있습니다. “참삶이란 부단히 버리고 끝끝내 지키는 일의 통일“(전우익,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현암사, 1993년 5월 15일, p.19)이라는 것이지요. 버릴 것을 과감히 버려야 새로운 것이 유입될 수 있습니다. 삶을 복잡하고 누추하고 부자유하게 만드는 것들은 자꾸만 덜어내야 합니다. 그것이 물건일 수도 있고, 감정의 찌꺼기일 수도 있고, 잘못된 습관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과 작별해야 삶이 가벼워집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라도 굳게 붙잡아야 할 것들도 있습니다. 우리 삶의 원칙 같은 것이 그것입니다. 다른 건 다 양보해도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것, 그것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 존재의 터전이 흔들리는 것은 굳건하게 지켜야 합니다. 비록 손해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그래야 합니다. 선한 양심, 믿음, 이웃에 대한 존중과 같은 것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세상입니다. 우리 사회가 분명히 발전하는 측면도 있지만, 퇴보하는 측면도 제법 많습니다. 놀라울 정도로 말이 거칠어졌습니다. 가짜 뉴스가 만들어지고 유통되면서 사회적 통합의 끈도 느슨해졌습니다. 적대적인 말과 행동을 거침없이 행하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한 주 내내 이런 찬송가가 입가를 맴돌았습니다.

“죄의 밤은 깊어가고 성난 물결 설렌다 어디 불빛 없는가고 찾는 무리 많구나 우리 작은 불을 켜서 험한 바다 비추세 물에 빠져 헤매는 이 건져내어 살리세”(찬송가510장)

우리는 이런 소명 앞에 서 있습니다. 죄의 밤은 깊어가고 성난 물결이 일렁이는 세상에서 길을 잃은 이들이 많습니다. 작은 불이나마 밝혀야 합니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소용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해야 할 일이기에 해야 합니다. 새해 우리 교회가 가슴에 품고 갈 말씀은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입니다. 죄의 밤이 깊어갈수록, 악이 기승을 부릴수록 선을 굳건히 붙들고 살아갈 용기를 내야 합니다.

∙다정한 사람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사랑에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악한 것을 미워하고, 선한 것을 굳게 잡으십시오”라고 권고합니다. 9절 첫머리를 예루살렘 성경은 ‘당신의 사랑이 겉치레가 되지 않게 하십시오’(Do not let your love be a pretence)라고 옮기고 있습니다. 겉치레란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여 짐짓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 앞에서의 사랑이어야 합니다.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 되도록 애써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악한 것을 미워하고 선한 것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 악한 것을 미워한다는 말은 매우 적극적인 혐오, 즉 질색(窒塞)하는 것을 말합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손해를 입히는 것을 마치 뱀을 보는 것처럼 싫어할 때 우리는 선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선한 일은 때를 가리지 말고 해야 합니다. 우리가 경험해 보아서 아는 바이지만 악한 것은 달라붙기 쉽고 선한 것은 쉽게 빠져나가곤 합니다. 그렇기에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또한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다정하게 대해야 합니다. 무정하고 사나운 세상에서 만나는 다정한 사람을 우리를 하나님의 품으로 인도합니다. 성자 프란체스코는 ‘다정한 사람’의 본입니다. 그는 자기와 함께 하는 수도자들을 ‘나의 가장 사랑하는 형제’, ‘나의 복된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이 마음으로 대한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이 될 것입니다. 프란체스코는 형제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많은 일화 가운데 하나가 제게 참 인상 깊게 남아 있습니다. 리보 토르토(Rivo Torto)는 이탈리아의 아씨시 인근에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그곳은 프란체스코회가 시작된 곳으로 유명합니다.

수도회 초기에 그는 몇몇 형제들과 양우리였던 그곳에 머물며 금욕적인 생활을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모두가 밀짚으로 만든 매트 위에서 잠든 때에, 형제 가운데 하나가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고 죽겠다. 아이고 죽겠다." 프란체스코는 자리에서 일어나 불을 밝힌 후 죽겠다고 외친 것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한 형제가 자기가 그랬노라며 "배가 고파 죽겠다"고 말했습니다. 프란체스코는 즉시 음식을 준비한 후에 모든 형제들을 그 식탁에 동참시켰습니다. 그가 홀로 음식을 먹으면 창피를 느낄까 염려되었던 것입니다. 밥을 굶고 편태로 자기 몸을 때리면서까지 욕망을 다스리려 했던 그들이지만, 가련한 형제를 위해 기꺼이 고행을 중단했습니다. 그는 자기 옆에 있는 사람을 존귀한 존재로 여기고, 온유한 사랑으로 그들을 감싸 안음으로써 그들의 속에 있는 선의 가능성을 깨웠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존경하기를 먼저 해야 합니다. ‘존경할만해야지요?‘라고 대꾸하고 싶으신가요? 우리가 형제자매들을 존경해야 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이 귀히 여기시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환대 공동체
믿음의 사람들은 “열심을 내어서 부지런히 일하며,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는 사람(12:11)이어야 합니다. 직장이나 일터에서 믿음의 사람들은 나태하고 게으르게 지내면 안 됩니다. 언제나 성실하고 믿음직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모습이 우리 속에 있는 분을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숨이 우리 가슴을 가득 채우면 우리는 신명나게 일할 수 있습니다.

“소망을 품고 즐거워하며, 환난을 당할 때에 참으며, 기도를 꾸준히 하십시오”(12:12). 과거의 기억이 앞으로 나아가려는 우리의 발걸음을 지체하게 만들 때가 많습니다. 어거스틴은 한 사람 안에 두 의지가 싸우는 현실을 실감나게 묘사합니다. “영원한 축복이 우리를 위에서 끌어 올리고 세상의 좋은 것이 우리를 밑에서 잡아당길 때“ 우리는 어쩔 줄 모릅니다. “영혼은 진리 때문에 전자를 선택하나 습관 때문에 후자를 버리지 못해 괴로운 번민으로 분열”(어거스틴, <성 어거스틴의 고백록>, 성한용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1992년 9월 30일, 제8권 9장 24절, p.259)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뜻으로 채우기 위해 세상의 이익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환난을 겪게 된다면 그 환난은 우리가 세상에 맞서는 사람, 즉 하나님께 속한 사람임을 입증하게 됩니다.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늘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과 접속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쓸 것을 공급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십시오”(12:13). 교회는 환대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환대란 사람들에게 안심하며 머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교파가 즐겨 사용하는 말이 있습니다. ‘extravagant welcome’이 그것입니다. 익스트래버건트는 ‘도가 지나치다’라는 말에서 유래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지나친 혹은 터무니없는 환대’라 번역할 수 있습니다. 세상살이에 지친 이들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소중한 사람으로 대해주는 이들 속에서 상한 영혼이 치유됨을 경험합니다. 새해 우리 교회는 이런 환대를 일상화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결국 이런 모든 덕목들은 “기뻐하는 사람과 기뻐하고, 우는 사람과 함께 우십시오”(12:15)라는 명령에 귀결됩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 삶을 개별화합니다. 너는 너고, 나는 나라고 말하게 만듭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근원적으로 외롭습니다. 외롭기에 각자도생을 도모합니다. 그러니 삶이 고단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개별화하는 세상의 흐름에 맞서서 공동체의 따뜻함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우리는 ‘홀로 주체’가 아니라 ‘서로 주체’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지체가 된 사람들입니다. 슬픔도 기쁨도 함께 나누는 이들이 곁에 있다는 사실을 확신할 때 우리는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귐은 끼리끼리의 사귐이어서는 안 됩니다. 잘난 사람들만의 모임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서로 한 마음이 되고,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사귀고, 스스로 지혜가 있는 체하지 마십시오”(12:16). 비천한 사람과 사귄다고 하여 마치 시혜를 베푸는 것처럼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구원의 비밀을 비천해 보이는 이들 속에 숨겨놓으셨습니다. 우리가 비천해 보이는 이들 곁에 다가선다는 것은 그만큼 그리스도의 마음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적대감을 녹이는 사랑으로
나머지 구절은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12:21)라는 권고 속에 다 수렴됩니다. 악이 번성하고 있습니다. 악은 인간의 탐욕을 숙주로 하여 자랍니다. 바울은 “자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경건은 큰 이득을 줍니다”(딤전6:6)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노자의 구절이 있습니다. 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도덕경 44장), 만족함을 알면 욕됨이 없고 멈출줄 알면 위태함이 없어 가히 오래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악에게 지는 까닭은 우리 속에 기생하고 있는 탐욕 때문인 경우가 참 많습니다. 욕심만 내려놓아도 승리의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놓아야 할 것을 놓지 못하기 때문에 영혼이 누추해집니다.

사실 악은 교묘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악한 이들은 부지런하기까지 합니다. 오죽 하면 주님이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면서 "보아라, 내가 너희를 내보내는 것이, 마치 양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과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와 같이 순진해져라“(마10:16) 하고 말씀하셨겠습니까? 악한 이들은 순진한 이들을 밥으로 여깁니다. 그러니 악의 실체를 꿰뚫어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악에게 동조하지 말아야 합니다. 악이 기승을 부리는 까닭은 선한 사람들이 침묵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선한 이들이 목소리를 높여야 합니다. 목소리를 높인다고 하여 사사건건 맞서 싸우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들의 면전에서 선한 일을 끈기 있게 해야 합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 그렇게 하는 것은, 네가 그의 머리 위에다가 숯불을 쌓는 셈이 될 것이다”(12:20).

머리 위에다가 숯불을 쌓는 셈이라는 말은 그를 도덕적으로 부끄럽게 만들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상대방의 악의를 사랑과 선의를 가지고 대함으로써 그들 속에 있던 적대감을 불살라 버리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승리는 이중의 승리가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시간을 향해 나아갑니다. 시간은 해가 바뀐다고 하여 새로워지지 않습니다. 오직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로 옷 입는 사람만이 새로운 시간과 만나게 됩니다. 다가오는 한 해 내내 주님의 은총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악한 세상에서 살지만 우리는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 가슴 벅찬 소망이 우리를 지켜줄 것입니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한 해 내내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8년 12월 31일 21시 24분 3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