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 예수의 비상소집
설교자 김기석
본문 딤후2:1-7
설교일시 2019/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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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비상소집
딤후2:1-7
(2019/03/24, 사순절 제3주)

[그러므로 내 아들이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로 굳세어지십시오. 그대가 많은 증인을 통하여 나에게서 들은 것을 믿음직한 사람들에게 전수하십시오. 그리하면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또한 가르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대는 그리스도 예수의 훌륭한 군사답게 고난을 함께 달게 받으십시오. 누구든지 군에 복무를 하는 사람은 자기를 군사로 모집한 상관을 기쁘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살림살이에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운동 경기를 하는 사람은 규칙대로 하지 않으면 월계관을 얻을 수 없습니다. 수고하는 농부가 소출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내가 하는 말을 생각하여 보십시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깨닫는 능력을 그대에게 주실 것입니다.]

∙신앙의 본보기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낳은 아들인 디모데에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로 굳세어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이 평범하게 들리지 않는 것은 믿음 안에서 살려는 이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다양한 어려움을 익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 사이의 관계란 참 미묘한 것이어서, 어떤 때는 화창한 봄날 같다가도 느닷없이 폭우가 쏟아지듯 난감할 때도 있습니다. 나의 선의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선의를 이용하여 자기 잇속을 챙기려는 이들도 있고, 그것을 왜곡하여 비난거리로 삼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속상합니다. 의욕을 잃어버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을 무례하다고 판단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의 좋음이 그에게도 늘 좋을 수는 없습니다.

소와 사자가 오랜 사랑 끝에 결혼했습니다. 단순한 우화이니까 종간의 결혼이 가능한가 하고 시비를 걸지 마십시오. 소는 남편인 사자를 위해 정성껏 음식을 차렸습니다. 상 위에는 신선한 건초가 놓여 있었습니다. 사자는 싫었지만 아내의 정성을 보아 건초를 먹었습니다. 어느 날 사자는 아내를 위해 정성스런 식탁을 차렸습니다. 상 위에는 신선한 살코기가 놓여 있었습니다. 소는 싫었지만 남편의 정성을 보아 살코기를 먹었습니다. 둘의 애정에는 이상이 없었지만, 둘이 함께 지내는 일이 참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둘은 합의 이혼에 이르렀습니다. 헤어질 때 둘이 똑같이 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최선을 다했어.” 문제는 그 최선이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지식에 근거하지 않았다는데 있습니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의 여러 속성 가운데 하나로 ‘지식’을 꼽았습니다. 상대방을 바로 알려는 노력을 게을리 할 때 우리가 선의라고 생각하는 것이 폭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마음을 열고 배워야 합니다. 배워도 실수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은혜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예수의 은혜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상대방의 반응과 상관없이 그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 나를 선물로 줄 수 있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사랑의 끈질김이 있어야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로 굳세다는 말이 뜻하는 바입니다. 신앙공동체는 그런 끈질긴 사랑과 담대한 희망을 연습하는 곳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많은 증인들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헌신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터이니, 그것을 믿음직한 사람들에게 전수함으로 그들을 일으켜 세우라고 권합니다.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인 것과 같이, 여러분은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고전11:1)

이 말은 오해의 소지가 많은 말입니다. 자기를 본보기로 내세우는 것이 교만하게 보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에 대해 죽고 그리스도로만 사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철저함이 없으면 차마 할 수 없는 말입니다. 신앙의 본보기가 되는 사람이 있을 때 우리 신앙도 자랍니다. ‘큰 나무 사이로 걸어가니 내 키도 커졌다’는 말은 일리가 있습니다.

∙고난을 달게 받으라
이어지는 구절은 조금 당혹스럽습니다. “그대는 그리스도 예수의 훌륭한 군사답게 고난을 함께 달게 받으십시오”(딤후2:3). 고난을 피하려는 게 인간의 본능인데 바울은 고난을 달게 받으라고 말합니다. 지금 이런저런 일로 시련의 시간을 보내는 이들에게 이 말씀은 너무 무정하게 들립니다. 욥의 절규가 떠오릅니다. “어찌하여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자들을 태어나게 하셔서 빛을 보게 하시고, 이렇게 쓰디쓴 인생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는가?“(욥3:20) 살아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버겁게 느껴지는 이들은 지금 당장 하나님이 그 고난에서 벗어나게 해주기를 청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지금 마음이 무너진 사람에게 고난이 주는 유익을 말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입니다. 고난의 유익은 성찰적 거리를 충분히 확보했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선물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는 고난은 우리에게 교통사고처럼 예기치 않은 시간에 닥쳐와 우리 삶을 뒤흔드는 그런 수동적 고난이 아닙니다. 능동적인 고난입니다. 주류 문화에 휩쓸리기를 거절하고 새로운 흐름을 만들려는 이들은 어려움을 겪게 마련입니다. 세상은 자기들과 더불어 불의의 공모자가 되지 않으려는 이들에게 조직의 쓴 맛을 보여주곤 합니다. 따돌리고, 불이익을 주고, 조롱하고, 외면하고, 신체적 폭력을 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의 꿈을 가슴에 간직한 사람들이라면 그런 박해와 시련 때문에 꿈을 버리고 그런 문화에 동화되지는 않을 겁니다.

한승헌 변호사님은 믿음의 사람들은 ‘사서 고생하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간결하지만 본질에 잇닿은 말씀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을 기쁘게 여기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분의 몸 곧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워가고 있습니다”(골1:24)라고 말합니다. 고난을 기쁘게 여기는 사람, 예수의 상처 자국을 지니고 다니는(갈6:17) 사람을 누가 당할 수 있겠습니까? 상처 자국을 지니고 다닌다는 말은 그것을 훈장처럼 자랑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상처는 조폭들의 가슴에 새겨진 문신 같은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누구를 위해 살고 있는지를 한순간도 잊지 않도록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고정희 시인의 ‘상한 영혼을 위하여’는 많은 이들이 애송하는 시입니다. 거기에 나오는 한 대목이 제게는 늘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목숨을 건 사람들은 자유롭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달게 받으라는 말은 단순히 견디라는 말이 아닙니다. 독일의 순교자인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나치의 비밀경찰에게 체포되기 얼마 전에 ‘의인은 고난이 많다’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습니다. 그는 의인들이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은 세상이 악하기 때문이라면서, 세상이 주는 괴로움에 대한 의인의 대답은 축복하는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는 ”축복한다는 것은 어떤 것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그 어떤 사정에 불구하고 ‘당신은 하나님의 것입니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도 당신을 조롱하는 무리들을 보고 하나님께 저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본회퍼는 비상한 일이 아니고는 세상이 새롭게 될 수 없다면서, 자기를 힘들게 하는 이들을 축복하는 것이야말로 비상한 일“(디이트리히 본회퍼, <기다리는 사람들>, 손명걸 역, 신문사, 1966년 8월 27일, p.166-7)이라고 말합니다.

∙비상소집에 응한 자
주님이 ‘나를 따르라’고 제자들을 부르신 것은 즐겁게 놀자는 것도 아니고, 패거리를 지어 힘을 규합하자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영혼이 납작해진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이론이 아닌 실재로서 보여주고, 척박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앞서 실현하자고 부르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름 받은 우리들 역시 동일한 소명 앞에 서있습니다. 그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먼저 군인의 경우를 들어 믿음의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성품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군인은 자기 좋을 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군사로 세워준 상관의 뜻을 온전히 수행해야 합니다. 우울하다고 하여 대열에서 이탈해서도 안 되고, 기분 내키지 않는다고 명령을 거부할 수도 없습니다. 하필 군인의 이미지를 사용했나 싶긴 하지만 바울이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엄중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얻은 아들을 번제의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에스겔은 아내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슬퍼하거나 눈물을 흘리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고 그대로 했습니다(겔24:16-17). 따름은 엄정한 결단을 요구합니다.

“누구든지 내게로 오는 사람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식이나, 형제나 자매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눅14:26)

일제시대에 <성서조선>을 발행하면서 사람들을 진리의 길로 인도했던 김교신 선생님은 예수를 공리적으로 이용하려는 무리들과 주님의 교훈을 성현의 가르침으로 존숭하려는 이들은 부유한 젊은이가 그랬던 것처럼 물러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確信으로써 말한다. 예수의 교훈을 自我의 주판으로써 적당히 할인하여 믿으려 함은 차라리 믿지 않음만 같지 못하다는 것. 君子는 위험한 데 가까이 않을 것이며, 부지런히 修業하여 後世에 立身揚名하기가 소원일진대 하필 무엇을 즐거워 예수의 非常召集에 응할 것인가.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지혜로운 築塔의 主人과 같이 미리 앉아서 예산하라. 영리한 戰國의 왕과 같이 우선 和平을 빌 것이다. 無難 平安을 구하는 者, 圓滿 中庸을 사모하는 者, 社會 改造를 목적하는 者로서 예수의 門을 두드린 者는 다 한 번 다시 그 교훈을 吟味할 것이다.“(노평구 편, 김교신전집1, <信仰과 人生>上권 중 ‘예수와 聖人‘, 제일출판사, 1991년 10월 1일, p.57)

김교신 선생은 믿음의 사람은 예수의 비상소집에 응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누가 비상소집에 응한 사람입니까? “오직 하나님을 보려는 자, 천국을 얻기 위하여서는 소유를 다 팔고 근친도 미워하며 자기 육신의 지체 일부씩을 베어 버릴 각오를 가진 사람“입니다.

∙운동선수와 농부
믿음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덕성은 또 있습니다. 바울은 운동선수와 농부의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운동선수가 단련해야 하는 것은 육체만이 아닙니다. 그는 경기의 규칙을 잘 지켜야 합니다. 반칙을 통해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라톤 선수가 힘들다고 중간지점에서 차를 타고 가면 안 됩니다. 권투선수는 트렁크 벨트 아래 부분을 가격하거나 뒤통수를 때리면 안 됩니다. 모든 운동은 정해진 규칙이 있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하려는 이들도 지켜야 할 것이 있습니다. 상대방을 저주하거나 경멸하지 말아야 합니다. 미움이나 증오라는 무기를 사용하면 안 됩니다.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딤전6:11)라는 무기를 들고 싸워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또한 농부에게 배워야 합니다. 홍천의 농촌 마을에서 목회를 했던 고진하 목사는 농부들의 고단한 일상을 보며 ‘파릇파릇한 쟁기질’이란 시를 썼습니다.

“네 시린 등짝에 얹힌 멍에 무거워 괴로울 땐,

홍천 땅 늙은 양순 애비
두 마리 소에 빛나는 쟁기를 메워 돌 많은
황톳빛 산비알 밭을 갈던 땀 밴 풍경을 그려보아라.

왕방울 같은 두 눈 꿈뻑꿈뻑 마주치던
두 마리 소,
그 무거운 멍에 나눠지고
연초록 봄 풀잎 막 돋아나던 산비알 밭을
단숨에 갈아엎던
그 싹싹한 갈음질을 새겨보아라

낮은 산자락의 고운 아지랑이 피워 올리던
늙은 양순 애비의 파릇파릇한 쟁기질을“

농부들은 상황이 좋든 나쁘든 때가 되면 땅을 갈고, 씨를 뿌리고, 잡초를 뽑고, 벌레를 잡고, 수확합니다. 힘들다고, 땀난다고, 돌이 많다고, 잡초가 많다고 농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수확이 보잘 것 없어도 농부는 이듬해 봄에 또 씨앗을 뿌립니다. 고진하는 ‘네 시린 등짝에 얹힌 멍에 무거워 괴로울 땐‘ 홍천 땅 늙은 양순 애비가 황톳빛 산비알 밭을 갈던 땀 밴 풍경을 그려보라고 말합니다.

당장 결실이 보이지 않아도, 기대한 만큼 거둘 수 없어도, 투덜거리며 생을 허비하지 말고 담대한 희망으로 또 다시 파종을 하는 용기를 내야 합니다. 척박한 땅, 시름 겨운 땅이라 하여도 파릇파릇한 쟁기질을 통해 갈아엎는 농부의 인내야말로 생명을 풍성하게 하려는 이들이 반드시 익혀야 할 품성입니다.

죽임의 문화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 인간에 대한 예의가 실종된 이 시대에 생명의 씨앗을 심고, 평화의 씨를 뿌려 정의의 열매를 거두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빕니다. 사순절이 깊어갑니다. 자아의 감옥에서 벗어나 예수님의 마음에 접속하십시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작은 희망이라도 만드십시오. 차가운 조직에 따뜻한 기운을 불어넣으십시오. 음울한 집단에 명랑한 활기를 공급하십시오. 불의와 맞서십시오. 사람들을 도구로 삼는 세상을 향해 ‘아니오’라고 말하십시오. 우리와 함께 세상을 치유하려는 주님의 꿈에 기꺼이 동참하십시오. 그 꿈에 참여할 때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절망감과 우울은 사라질 것입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9년 03월 24일 10시 51분 20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