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6. 삶의 분기점
설교자 김기석
본문 삼상 24:16-22
설교일시 2020/02/09
오디오파일 s20200209-2.mp3 [33312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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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분기점
삼상24:16-22
(2020/02/09, 주현 후 제5주)

[다윗이 말을 끝마치자, 사울은 "나의 아들 다윗아, 이것이 정말 너의 목소리냐?" 하고 말하면서, 목놓아 울었다. 사울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나는 너를 괴롭혔는데, 너는 내게 이렇게 잘 해주었으니, 네가 나보다 의로운 사람이다. 주님께서 나를 네 손에 넘겨 주셨으나, 너는 나를 죽이지 않았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오늘 너는, 네가 나를 얼마나 끔찍히 생각하는지를 내게 보여 주었다. 도대체 누가 자기의 원수를 붙잡고서도 무사히 제 길을 가도록 놓아 보내겠느냐? 네가 오늘 내게 이렇게 잘 해주었으니, 주님께서 너에게 선으로 갚아 주시기 바란다. 나도 분명히 안다. 너는 틀림없이 왕이 될 것이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서 굳게 설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이제 주님의 이름으로 내게 맹세하여라. 너는 내 자손을 멸절시키지도 않고, 내 이름을 내 아버지의 집안에서 지워 버리지도 않겠다고, 내게 맹세하여라." 다윗이 사울에게 그대로 맹세하였다. 사울은 자기의 왕궁으로 돌아갔고,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산성으로 올라갔다.]

∙人心惟危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입춘 추위가 이제 조금 물러가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도 봄볕이 다사롭게 비쳐들면 좋겠습니다. 예배의 자리에 불러주신 주님의 은총의 햇살 아래 머물면서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우울과 불안 그리고 미움과 작별할 수 있기를 빕니다. 재벌가의 경영권 승계를 둘러싼 가족 간의 다툼이 낯설지는 않지만, 한진 그룹의 경우는 마치 막장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합니다. 저는 입버릇처럼 세상의 모든 유혹의 뿌리는 ‘네가 신처럼 되리라’는 뱀의 말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자기를 강화하고, 다른 이들을 통제하고, 자기 의사를 관철시키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는 순간 관계는 파탄을 맞이하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지배의 포기입니다. 지배가 아니라 사귐, 경쟁이 아니라 협동, 독점이 아니라 나눔을 지향하고, 고쳐주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관계는 아름다워집니다. 누군가의 동료가 된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현대인들을 사로잡고 있는 불안함과 공허감, 절망감은 각자도생 사회가 만들어낸 결과물입니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의 말이 떠오릅니다.

“절망을 피하는 유일한 길은 자신이 목적이 되는 게 아니라 남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행복이란 자신이 남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는 확신과 같은 것이라고 하겠다.”(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선집3, 누가 사람이냐, 이현주 옮김, 종로서적, 1996, p.57-58)

공감이 가는 말입니다. 그러나 현실로 눈을 돌리면 이런 확신이 흔들립니다. 세상은 온통 우리를 이용해 먹으려는 이들로 가득 찬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런 삶의 지향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누군가의 좋은 이웃이 되기 위해 의식적인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참 미묘합니다. 어떤 때는 마음이 넉넉해서 이타적인 선택을 하지만, 다음 순간에는 마음이 얼어붙어 이기적인 생각에 확고히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인간의 마음은 늘 위태롭다’(人心惟危)고 말했던 것입니다. 오늘은 이스라엘의 역사의 두 인물 사울과 다윗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사울은 비운의 인물입니다. 사사 시대가 끝나갈 무렵 그는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역사의 무대에 끌려 나온 사람입니다. 베냐민 지파에 속한 유력한 집안 출신이었지만 사무엘을 만나기 전까지는 어쩌면 평범한 행복을 꿈꾸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무엘에 의해 기름 부음을 받던 그 운명의 날, 수줍음 많고 소박했던 그가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워진 그날, 사울은 민족의 운명을 어깨에 짊어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마치 하늘을 떠받치고 서야 했던 그리스 신화의 아틀라스처럼 말입니다. 최초에 그에게 부여된 명칭은 ‘영도자’ 혹은 ‘지도자’입니다. 히브리어로는 나기드(nagiyd)입니다. 이 단어는 지도자를 뜻하지만 기본 의미는 ‘앞에 선 사람’입니다. 뒤에서 조종하는 사람이 아니라 앞에서 솔선수범하면서 백성을 이끌어야 하는 사람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곧 왕이라는 호칭을 받습니다. 왕은 ‘멜레크’(melek)입니다. 멜레크는 원래 이스라엘에는 없던 단어로 다른 나라로부터 빌려온 말잊니다. 그는 ‘다스리는 자’입니다. 다스림이라는 말 속에 이미 계급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초창기에 사울은 자기를 나기드로 여겼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점차 멜레크로서의 정체성에 익숙해졌을 것입니다. 영혼의 전락은 시나브로 진행되는 법입니다. 다른 이들의 섬김을 받는 일이 당연한 것이 되고, 특권을 누리는 게 불편하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바른 말은 듣기 싫어지고, 달콤한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기 아닌 다른 이에게 집중되는 것을 견디지 못하게 됩니다. 그는 점점 억압적인 존재로 변해갑니다. 사람들은 멜레크에서 몰렉을 떠올렸을지도 모릅니다. 인신제물을 요구하는 신 말입니다.

∙불안에 사로잡히다
다윗이 등장하면서 사울은 뭔가에 쫓기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의 전승에 따라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애초에 다윗은 사울이 번민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 마음을 위무하기 위해 채용된 하프 연주자였습니다. 다윗의 연주를 들으면 사울은 자기 마음에 들끓고 있던 불안과 혼돈이 잠잠해짐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오르페우스는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서, 그가 하프를 연주하면 동물은 물론이고 나무와 바위까지 춤을 췄다고 합니다. 다윗도 그런 역할을 했던 것 같습니다. 사울은 그를 신임하여 자기의 무기를 드는 사람으로 삼기도 했습니다. 최측근이었다는 말일 겁니다. 그러나 그가 엘라 골짜기에서 블레셋의 거인 장수 골리앗을 물리친 후 사정은 달라졌습니다. 전쟁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난공불락처럼 여겨졌던 적장을 제거한 다윗을 영웅으로 여겼습니다. 개선행진을 할 때 사울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때 여인들이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사울은 수천 명을 죽이고, 다윗은 수만 명을 죽였다.”(삼상18:7) 사울은 몹시 언짢았습니다.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올랐습니다.

시기와 질투의 영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사울은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요3:30)고 말했던 세례자 요한이 아니었습니다. 버림받음에 대한 두려움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아이들은 낯선 곳에서 부모와 잠시 떨어지면 극심한 공포를 느낍니다. 아이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나를 향했던 사람들의 시선이 다른 이들을 향할 때 당혹스러워합니다. 사람들의 시선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자리에 있는 이들일수록 이런 불안감이 큽니다. 연예인들 가운데 공황장애나 우울증에 시달리는 이들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일 겁니다. 자기를 지우는 연습을 미리 해두지 않으면 삶이 누추해지기 쉽습니다. 정치인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잊혀지기보다는 오명이라 해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게 낫다고 여긴다지요?

질투와 시기의 감정에 사로잡힐 때 사람들은 그 질투의 대상이 사라지기를 원합니다. 사울은 다윗을 천부장으로 삼아 위험한 지역의 전투로 내몹니다. 적들의 손을 빌어 그를 제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함으로 많은 이들의 칭송을 받았습니다. 사울은 두려웠습니다. 자기의 때가 지나가고 있음을 직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을 없애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습니다. 그때마다 다윗은 사울의 아들인 요나단과 딸인 미갈의 도움으로 사지에서 벗어났고, 심지어는 여호와의 영이 사울의 계획을 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사람은 어떤 열정에 사로잡히는 순간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합니다. 열정은 좋은 것이지만 합목적성을 잃을 때 위험합니다.

∙다윗, 정치적 인간
사울에 비해 다윗은 매우 냉철합니다. 그는 정치적으로 처신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열정을 이성적 판단으로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다윗을 이상적인 존재로 소환하곤 하지만 그 형들의 평가는 좀 달랐습니다. 엘라 골짜기에서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나서는 다윗을 보고 맏형 엘리압은 역정을 냅니다. “너는 어쩌자고 여기까지 내려왔느냐? 들판에 있는, 몇 마리도 안 되는 양은 누구에게 떠맡겨 놓았느냐? 이 건방지고 고집 센 녀석아, 네가 전쟁 구경을 하려고 내려온 것을, 누가 모를 줄 아느냐?“(삼상17:28) 형이 보기에 다윗은 그렇게 사근사근한 동생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다윗은 공적인 자리에서 겸손했지만 야심가이기도 했습니다. 대중들의 시선이 자기에게 집중되면서 그는 여러 차례 위기를 겪었고, 지금은 권력 주변에서 물러나야 할 때임을 직감합니다. 그래서 그는 먼저 블레셋으로 피신합니다. 거기서도 의혹의 시선을 받자 아둘람 굴로 은거지를 옮깁니다. 그의 주변에 압제를 받는 사람들, 빚에 시달리는 사람들,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현 체제의 변혁을 바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격한 열정이 자칫 잘못 발휘되면 산적처럼 변할 수도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다윗은 그들을 잘 통솔하면서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괴롭힐 때마다 출병하여 그들을 구해내곤 했습니다. 어느새 밑바닥 민심이 다윗에게로 쏠리고 있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제거하기 위해 군대를 거느리고 추격전을 벌이지만 산악 지형에 익숙한 그들을 따라 잡을 수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다윗은 사울을 죽일 기회가 몇 차례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부하들이 사울을 제거하자고 말할 때마다 그는 부하들을 타일렀습니다. “내가 감히 손을 들어, 주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우리의 임금님을 치겠느냐? 주님께서 내가 그런 일을 하지 못하도록 나를 막아 주시기를 바란다. 왕은 바로 주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분이기 때문이다”(삼상24:6). 사울을 자기 손으로 제거함으로 쿠데타를 시도하기보다는 그는 때를 기다렸습니다. 이 말로써 다윗은 부하들에게 권위에 대한 존중을 가르쳤습니다. 논어 위령공 편에 나오는 한 구절이 있습니다. “인무원려人無遠慮 필유근우必有近憂”, 사람이 멀리 생각하는 것이 없으면, 반드시 가까운 데 걱정거리가 있게 마련이라는 뜻입니다. 눈 앞의 이익에만 집중하다 보면 자기 삶의 토대를 스스로 허무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밖에 없는 게 사람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를 스스로 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부하들은 다윗의 우유부단함에 화가 났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권위가 하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학습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각자의 시간 속으로
다윗은 골짜기 건너편에서 자기를 추격하던 사울을 부릅니다. 그리고 자기가 받고 있는 억울한 오해를 호소합니다. 그의 손에는 사울의 옷자락이 들려 있었습니다. 용변을 보기 위해 굴 속에 들어왔을 때 다윗은 그의 옷자락 일부를 잘라냈던 것입니다. 죽일 수도 있지만 죽이지 않았다는 증거였습니다. 사울은 자초지종을 깨닫고 놀랐습니다. 그리고 목놓아 울었습니다. 그 울음 속에 담긴 감정은 중층적입니다. 고마움, 질투심에 사로잡혀 있다는 부끄러움, 자기를 뒤흔들고 있는 두려움이 일시에 울음이 되어 터져나온 것이 아닐까요? 사울은 이제 말합니다. “나는 너를 괴롭혔는데, 너는 내게 이렇게 잘 해주었으니, 네가 나보다 의로운 사람이다“(삼상24:17). 이 말로 사울은 역사의 수레바퀴가 다윗에게로 향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주님께서 너에게 선으로 갚아 주시기를 바란다”면서 다윗이 틀림없이 왕이 될 것이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서 굳게 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자손을 멸절시키지 말고, 사울의 이름을 불명예스럽게 만들지 않겠다고 맹세하라고 요구합니다. 다윗은 그대로 맹세했습니다.

그리고 둘은 각자의 길로 갔습니다. 사울은 자기의 왕궁으로, 그리고 다윗은 자기 산성으로 올라갔습니다. 아직은 때가 무르익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몰락을 확고하게 예감하면서 보내야 할 사울의 시간은 비애에 가득 찬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사울과 다윗은 이후에도 추격자와 쫓기는 자로서 지냅니다. 그러다가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전사합니다. 멜레크가 아니라 나기드로서 출전을 감행했다가 그는 길보아 산에서 삶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시대가 그렇게 저물었고 다윗은 사울과 그의 벗 요나단의 죽음을 애닯아 하는 애가를 지어 바친 후에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는 앞당길 수도 없고 늦출 수도 없습니다. 그 때를 분별하며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때를 아름답게 만드셨다고 합니다. 문제는 다른 때를 바라보느라 자기 때를 한껏 살아내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어리석음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때를 지나고 계십니까? 어느 때이든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보십시오, 지금이야말로 은혜의 때요, 지금이야말로 구원의 날입니다”(고후6:2). 지금 사랑을 선택하십시오. 지금 누군가의 기도의 응답이 되십시오. 지금 정의의 편에 서십시오. 지금 누군가의 설 땅이 되십시오. 삶의 분기점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를 맛볼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우리의 삶 가운데 넘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0년 02월 09일 12시 26분 57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