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36. 유익이 되는 징계
설교자 김기석
본문 히 12:4-13
설교일시 2020-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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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이 되는 징계
히12:4-13
(2020/09/06, 창조절 제1주)

[여러분은 죄와 맞서서 싸우지만, 아직 피를 흘리기까지 대항한 일은 없습니다. 또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향하여 자녀에게 말하듯이 하신 이 권면을 잊었습니다. "내 아들아, 주님의 징계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그에게 꾸지람을 들을 때에 낙심하지 말아라.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사람을 징계하시고,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신다." 징계를 받을 때에 참아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자녀에게 대하시듯이 여러분에게 대하십니다.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자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모든 자녀가 받은 징계를 여러분이 받지 않는다고 하면, 여러분은 사생아이지, 참 자녀가 아닙니다. 우리가 육신의 아버지도 훈육자로 모시고 공경하거든, 하물며 영들의 아버지께 복종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더욱더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육신의 아버지는 잠시 동안 자기들의 생각대로 우리를 징계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기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유익이 되도록 징계하십니다. 무릇 징계는 어떤 것이든지 그 당시에는 즐거움이 아니라 괴로움으로 여겨지지만, 나중에는 이것으로 훈련받은 사람들에게 정의의 평화로운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나른한 손과 힘 빠진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똑바로 걸으십시오. 그래서 절름거리는 다리로 하여금 삐지 않게 하고, 오히려 낫게 하십시오.]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태풍 마이삭이 지나가고 새로운 태풍 하이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행히 한반도를 비켜 지나간다고 합니다. 첩첩산중이라는 말이 요즘처럼 실감날 때가 없습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닥쳐오는 이런 재난 상황 중에 도시에 사는 이들은 그런 대로 견딜 만하지만, 수확을 앞두고 논에 엎드린 벼 포기, 밭에 뒹구는 낙과를 바라보는 농부들의 마음은 참담하기 이를 데 없을 겁니다. 아마 가두리 양식장을 하는 어부들의 사정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거리두기 2.5단계가 계속되면서 자영업자들이 겪는 피해는 실로 어마어마합니다. 모두가 겪는 일이긴 하지만 특히 취약계층들이 체감하는 공포와 절망감은 큽니다. 정치인들의 눈길과 손길이 세심하게 그분들을 살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작은 교회들도 큰 어려움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어찌어찌 근근이 버텨오곤 있다지만 미래를 가늠하기 어려운 현실인지라 속이 바짝 타들어가고 있을 겁니다. 이럴 때일수록 교회들의 따뜻한 연대가 절실합니다. 사도행전에는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소아시아와 유럽의 교회들이 마음을 모아 모 교회를 도왔던 사실이 적시되어 있습니다. 교회의 공교회성은 그렇게 확보되었던 것입니다. 누차 이야기 했지만 지금은 다시 시작할 때입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정신을 꼭 붙들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믿음의 사람들을 일러 ‘흩어져서 사는 나그네’, ‘택하심을 입은 이들’이라고 명명했습니다(벧전1:1). 나그네는 길 위의 사람입니다. 잠시 우정을 나누기 위해 사람들 곁에 머물지만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기독교인의 실존을 일러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항하여 몸을 내밀면서“ 달려가는 삶이라 했습니다(빌3:13b).

한 마디로 기독교인은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in the world, but not of the world) 사람들, 곧 죄의 중력과 맞서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가치관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습니다. 길들여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사는 이들에게 그런 이들은 눈엣가시입니다. 불의에 공모하기를 거부함으로 자기들의 어둠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진실하게 믿는 이들은 조롱, 천대, 사회적 박탈, 박해를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는 고난의 현실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교인들을 향해 “여러분은 죄와 맞서서 싸우지만, 아직 피를 흘리기까지 대항한 일은 없습니다”(히12:4)라고 말합니다.

믿음은 계산이 아니라 헌신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자기 욕망과의 싸움인 동시에 우리를 길들이려는 세상에 맞섬입니다. 바울 사도는 거짓 사도들에게 미혹당하고 있는 교인들에게 바른 신학 이론이 아니라 상처 입은 자신의 몸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나는 내 몸에 예수의 상처 자국을 지고 다닙니다”(갈6:17). 이보다 더 강력한 증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런 상처가 우리에게도 있는지요? 그리스도가 아닌 잘못된 지도자들을 따르다가 비난의 표적이 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박해받고 있다는 이미지를 강화함으로 자기들의 반사회적 행태를 종교적으로 치장하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위험으로 몰아가는 일은 명분이 무엇이든 악합니다. 분별이 필요합니다.

∙들을 귀
그리스도를 따른다 하면서도 우리 마음은 아차 하는 순간 옛 삶의 인력에 끌려 들어가곤 합니다.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는 세상의 지배를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의 나그네된 백성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정착민으로 살곤 합니다. 가야 할 길을 잊고 산다는 말입니다. 일상의 무게에 짓눌려 혹은 세상의 달콤한 것에 마음이 팔려 우리 영혼이 깊은 잠에 빠져들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징계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는 ‘허물을 뉘우치도록 주의를 주고 나무람, 또는 부정이나 부당한 행위를 되풀이하지 못하도록 제재를 가함‘이지만, 이 단어가 우리에게 연상시키는 것은 감봉, 견책, 면직, 파면 등입니다. 이 단어를 듣는 순간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움찔하게 됩니다. 징계를 유쾌하게 받아들일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헬라어로 ‘징계‘를 뜻하는 파라클레시스paraklesis는 ‘가까이 부름, 간청, 훈계, 격려‘라는 뜻을 포괄합니다. 이 단어는 성령의 다른 이름인 보혜사 곧 파라클레토스parakletos와 유사합니다. 보혜사는 돕는 분이고, 조언을 해주고, 하나님의 마음에 접속되도록 해주는 분입니다. 징계는 그러니까 부정적 질책이라기보다는 긍정적 질책이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꾸지람‘이라는 단어는 파이다이아paideia를 번역한 것입니다. 아이를 훈육하여 잘못을 바로잡아주고 그릇된 열정을 제어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꾸지람은 한 사람이 이기적으로 처신하지 않고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살 수 있는 인격으로 이끌기 위한 것입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도 있습니다만, 그래서 격려하고 북돋는 일은 매우 중요하지만,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가르쳐 주는 것도 매우 중요한 교육입니다. 유대인들은 어릴 때부터 할라카(Halakha)와 아가다(Aggada)를 통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배웁니다. 할라카는 유대인들의 삶을 지배하는 법, 규례, 규범을 가리키고, 아가다는 이야기 형태로 전승되는 교훈입니다.

하나님의 징계 혹은 꾸지람의 방식은 참 다양합니다. 선포되는 말씀, 벗들과의 대화, 실패의 경험, 관계의 어려움, 질병, 예기치 않은 재난 등이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징계하기 위해 그런 불행을 일으키신다는 말이 아니라, 그런 재난이나 고통은 우리 마음의 지각을 깨뜨려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능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공동체를 저주해달라는 모압 왕의 요청을 받고 길을 떠나던 발람을 꾸짖고 그의 눈을 열어주기 위해 그가 타고 가던 나귀의 입을 여셨습니다. 주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제자의 온 무리가 기쁨의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고 바리새파 사람들이 몰려와 예수께 “선생님의 제자들을 꾸짖으십시오” 하고 요구했을 때 주님이 뭐라 하셨습니까?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다.”(눅19:40) 문제는 들을 귀가 있느냐 여부입니다.

∙거룩한 삶이라는 과제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시는 까닭은 분명합니다. 거룩함에 참여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징계 혹은 꾸지람은 우리 몸과 마음에 붙은 더러운 것들, 부적절한 것들을 털어내기 위해 주어지는 사랑입니다. 조금 겸손해지기 위해서는 많은 시련을 겪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화의 불이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과 물 사이를 몇 번씩 통과해야 조금쯤 깨끗해지는 게 우리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만 징계하시고, 받아들이는 사람만 채찍질하십니다. 아프고 쓰리지만 이게 진실입니다.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거룩함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거룩함을 뜻하는 카도쉬kadosh나 헬라어인 하기아테스hagiotes는 ‘구별되다, 뛰어넘다’는 뜻입니다. 거룩함은 하나님과 인간이 구별되는 지점입니다. 그런데 거룩함에 참여한다는 말은 어찌 보면 언감생심입니다. ‘햄릿’의 말처럼 인간은 그저 먼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먼지에게 거룩하라 하심은 어떤 뜻일까요? 하나님은 출애굽 공동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하나님인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레19:2b) 이 명령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무신론적 과학주의자들은 인간은 ‘벌거벗은 유인원’ 혹은 ‘이기적인 유전자’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진화의 산물일 뿐 거룩한 삶의 목적 따위는 없고, 자기 DNA를 남기려는 본능에 충실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그런가요?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습니다. 인간의 인간다움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은 자기 좋을 대로 처신하지 않습니다. 자극에 반응하는 즉자적 존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할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행복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기도 합니다. 본능 혹은 욕망에 굴복하지 않을 때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허무와 패배가 예견된다 해도 부조리에 항거하고, 누군가의 이웃이 되려 할 때 사람은 하나님을 가리켜 보이는 존재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이 얼마나 고귀한 존재일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레위기는 거룩함의 내용을 종교적 진술로 채우지 않습니다. 진짜 거룩함은 일상의 삶 속에서 드러나는 법입니다. 추수할 때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배려하여 밭의 한 모퉁이를 남겨두는 것, 이웃을 속이지 않는 것, 품꾼의 삯을 떼먹지 않는 것, 듣지 못하는 사람을 저주하지 않는 것, 눈이 먼 사람 앞에 걸려 넘어질 것을 놓지 않는 것, 재판할 때 제멋대로 판단하지 않는 것, 남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면서 이익을 보려 하지 않는 것, 바로 이런 것이 거룩함입니다. 이런 거룩한 삶을 한 마디로 요약한 것이 “너는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 나는 주다.”(레19:18b)라는 구절입니다. 거룩함에 참여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삶을 능동적으로 선택하며 산다는 뜻입니다.

∙정의의 평화로운 열매
하나님의 징계와 꾸지람을 통해 우리가 그런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면 그보다 고마운 일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그렇게 훈련된 사람들이 있는 곳에 열리는 열매가 있습니다. ‘정의의 평화로운 열매’입니다. 정의를 구현함으로 얻어지는 평화의 열매일 수도 있고, 평화를 지향함으로 얻는 정의의 열매일 수도 있습니다. 야고보도 같은 진실을 말한 바 있습니다. “정의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평화를 위하여 그 씨를 뿌려서 거두어들이는 열매입니다.”(약3:18) 평화의 씨를 뿌려 정의의 열매를 거두는 것이 기독교인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해 “정의를 뿌리고 사랑의 열매를 거두어라. 지금은 너희가 주를 찾을 때이다. 묵은 땅을 갈아 엎어라. 나 주가 너희에게 가서 정의를 비처럼 내려 주겠다”(호10:12)고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는 정의와 사랑의 열매가 연결되고 있습니다.

정의와 평화, 정의와 사랑, 이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몸입니다. 우리의 지향은 분명합니다. 나그네 인생길 걷는 동안 이런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가끔 세찬 바람이 불어 우리 삶을 뒤흔들어 놓을 때도 있고, 폭우가 쏟아져 우리 길을 끊을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투덜거리며 주저앉아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사도는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나른한 손과 힘 빠진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똑바로 걸으십시오. 그래서 절름거리는 다리로 하여금 삐지 않게 하고, 오히려 낫게 하십시오.”(히12:12-13)

욕망의 벌판을 비틀걸음으로 걷지 마십시오. 똑바로 걸으십시오. ‘똑바로‘라는 뜻의 헬라어 아르싸스orthos는 ‘곧은, 직립한‘이라는 뜻입니다. 자꾸 죄에 이끌리는 마음을 은총을 향해 들어 올리십시오. 중력에 이끌리는 몸을 일으켜 이웃에게 다가가십시오. 자세가 달라지면 마음도 달라지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위험을 무릅쓸 때 우리 속의 비애는 줄어들고, 불확실성도 가실 것입니다. 주님의 징계를 고마움으로 받아들이십시오. 칭얼거리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사람의 당당함으로 현실의 무게를 견디십시오. 우리가 주님을 신뢰하듯이 주님도 우리를 신뢰하십니다. 창조절기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우리 삶이 이 무너진 세상을 일으켜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창조 역사에 동참하는 나날이 되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0년 09월 06일 10시 24분 16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