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3. 용서받을 수 없는 죄
설교자 김기석
본문 암 1:3-11
설교일시 2021-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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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받을 수 없는 죄
암1:3-11
(2021/06/06, 성령 강림 후 제2주일)

["나 주가 선고한다. 다마스쿠스가 지은 서너 가지 죄를,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 그들이 쇠도리깨로 타작하듯이, 길르앗을 타작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하사엘의 집에 불을 보내겠다. 그 불이 벤하닷의 요새들을 삼킬 것이다. 내가 다마스쿠스의 성문 빗장을 부러뜨리고, 아웬 평야에서는 그 주민을 멸하고, 벳에덴에서는 왕권 잡은 자를 멸하겠다. 아람 백성은 기르로 끌려갈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나 주가 선고한다. 가사가 지은 서너 가지 죄를,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 그들이 사로잡은 사람들을 모두 끌어다가, 에돔에 넘겨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가사 성에 불을 보내겠다. 그 불이 요새들을 삼킬 것이다. 내가 아스돗에서 그 주민을 멸하고, 아스글론에서 왕권 잡은 자를 멸하고, 손을 돌이켜 에그론을 치고, 블레셋 족속 가운데서 남은 자를 모조리 멸하겠다." 주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나 주가 선고한다. 두로가 지은 서너 가지 죄를,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 그들이 형제의 언약을 기억하지 않고 사로잡은 사람들을 모두 끌어다가, 에돔에 넘겨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두로 성에 불을 보내겠다. 그 불이 요새들을 삼킬 것이다." "나 주가 선고한다. 에돔이 지은 서너 가지 죄를,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 그들이 칼을 들고서 제 형제를 뒤쫓으며, 형제 사이의 정마저 끊고서, 늘 화를 내며, 끊임없이 분노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가인의 후예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현충일(顯忠日)입니다. 역사의 격랑 속에 내몰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기리자는 뜻에서 제정된 날입니다. 한가로운 평화는 모두가 꿈꾸는 이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그러한 꿈을 깨뜨리고 모든 생명을 위험 속으로 몰아갑니다. 우리의 오늘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 덕분에 가능해졌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을 고마움으로 기억하는 것은 우리들의 의무입니다.

전쟁의 세기라 할 수 있는 20세기, 세계 1, 2차 대전을 다 겪었던 앨버트 슈바이처는 ‘생명에 대한 외경’을 자기 삶의 알짬으로 삼았습니다. “나는 살려고 하는 생명에 둘러싸인 살려고 하는 생명이다.“ 단순하지만 심오한 말입니다. 내 생명이 소중한 것처럼 다른 생명도 소중히 여기는 것이 인간의 과제입니다. ‘다른 생명‘은 비단 인간만이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 중에서도 인간은 각별합니다. 자기 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초식동물들을 보면 자기 동족들이 육식 동물의 공격을 받아 잡아먹히는 데도 멀뚱멀뚱 바라만 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무리를 지어 다니기는 하지만 그들은 개별화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려운 이들을 보면 연민을 느끼고, 위험에 처한 사람을 보면 스스로 위험 속으로 뛰어들어 그들을 구해내려 합니다. 인간의 아름다움은 누군가의 신음소리에 반응할 줄 아는 데 있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전쟁과 테러의 공포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인간성에 반하는 일들이 자주 벌어집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고, 나라와 나라 사이에 전쟁이 사라지고, 군사연습도 하지 않는 세상을 꿈꾸지만(사2:4, 욜3:10, 미4:3)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는 얼마 전까지 지속되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전투를 목격했습니다.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팔레스타인의 미사일 공격을 막아낸 ‘아이언 돔’의 위력이 아닙니다. 그 싸움 과정 가운데 죽어간 사람들과 그 가족들의 아픔입니다. 나희덕 시인의 신작 <예술의 주름들>을 읽다가 케테 콜비츠의 조각 ‘부모’(1932년)와 만났습니다. 전쟁 중에 죽은 아들 페터를 떠올리며 만든 작품입니다. 자식을 앞세우고 남겨진 부모의 아픔이 절절하게 형상화 되어 있습니다. 나희덕 시인은 그 작품을 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두 팔을 품에 숨겨 넣고 무릎 꿇은 아버지와 몸을 앞으로 숙인 채 두 손을 모은 어머니의 모습에서 우리는 종교적인 느낌을 받게 된다”(나희덕, <예술의 주름들>, 마음산책, p.94). 이런 아픔이 없는 세상을 우리는 꿈꿉니다. 전쟁만 사람을 사지로 몰아넣지는 않습니다. 일터에 나갔다가 불의의 사고를 만나 귀가하지 못하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그 가족들의 절통한 사연을 외면한다면 역사는 발전할 수 없습니다.

∙풍요로운 시대의 이면
오늘은 아모스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배워보려 합니다. 아모스는 예루살렘에서 약 15km 남쪽에 있는 소읍 드고아에서 목자로 살던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를 “집짐승을 먹이며, 돌무화과를 가꾸는 사람”(암7:14)이었다고 소개했습니다. 그가 부름을 받았을 때 유다의 왕은 웃시야(주전 787-736)였고, 이스라엘의 왕은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주전787-747)이었습니다. 아모스는 남왕국 출신이지만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활동했습니다. 여로보암 2세 시대는 이스라엘 역사의 중흥기라 말할 수 있습니다. 앗시리아가 등장하면서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시리아의 세력이 약화되었습니다. 잠시 힘의 공백 상태가 생겼고, 이스라엘은 그 때를 틈 타 상대적인 번영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아람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요단강 동편 지역을 확보했습니다. 다윗 시대에 버금가는 영토를 확보한 셈입니다. 전쟁 특수로 말미암아 경제적 풍요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문제는 풍요는 언제나 그림자를 낳는다는 데 있습니다. 부유층들은 사치를 일삼았고, 사회적 약자들의 신세는 늘 그렇듯 위태로웠습니다. 낙수효과(trickle-down effect)라는 용어가 한 동안 유행했습니다. 대기업에 투자가 확대되어 경제가 회복되면 그 혜택이 저소득층까지 미치게 된다는 뜻이지만, 현실은 그것과 사뭇 다릅니다. 어느 시대든 부가 공평하게 분배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아모스 사대에 풍요를 누리는 사람들은 여름 별장, 겨울 별장을 지어놓고, 대접으로 포도주를 퍼마시고, 가장 좋은 향유를 몸에 바르고, 상아 침상에 눕고, 하프 소리에 맞추어 헛된 노래를 흥얼거리며 살았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 따위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돈을 받고 의로운 사람들을 팔고, 신 한 켤레 값에 빈민을 팔았”습니다(암2:6). 경제적으로 예속된 사람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성적으로 유린하기까지 했습니다.

종교 또한 번성했습니다. 사람들은 베델로 몰려가고, 길갈로 달려가며 자원예물을 풍족하게 바치기도 했지만 그들은 더 이상 언약 백성답게 살지 않았습니다. 이웃들을 배려하고 돌보고 사랑하지 않는 종교는 아무리 장엄한 의식과 화려한 치장을 한다 해도 하나님께는 역겨운 것입니다. 아모스의 말은 우리에게 큰 충격을 줍니다.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암5:21-23)

이 구절 이후에 아모스 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바로 그 문장이 등장합니다.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5:24) 사자의 포효처럼 들립니다. 아모스의 예언활동은 1년 정도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갑작스럽게 막을 내립니다. 추방을 당한 것인지, 유배를 당한 것인지, 죽임을 당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민족들에 대한 심판 예고
아모스서가 다른 예언서과 구별되는 점은 다른 민족들에 대한 심판 이야기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심판에 대한 경고에 뒤이어 다른 나라에 대한 심판을 예고하는 다른 예언서와는 배치가 다릅니다. 아모스서에서 다른 민족에 대한 심판이 첫 머리에 등장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스라엘의 죄가 그들의 죄를 능가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함입니다. 아모스의 예언을 듣는 사람들은 내심 다른 나라에 대한 심판 예고에 열광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늘 분쟁 가운데 있던 나라에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언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감정에 딱 부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조에 불과했습니다. 앞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죄를 준엄하게 꾸짖습니다. 그들의 죄가 다른 민족의 죄를 능가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아모스는 그런 수사의 전략을 사용한 것입니다. 일종의 수사학적 바림(gradation)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림은 색을 칠할 때 한쪽을 엷게 하고, 다른 쪽으로 갈수록 차차 진하게 칠하는 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다른 민족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할 때 아모스는 동일한 문장을 거듭 사용합니다. “~~가 지은 서너 가지 죄를,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라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세 가지면 세 가지지 왜 서너 가지일까요? 'x+1'의 형태는 죄의 심각성 혹은 확장성을 나타내기 위한 의도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죄는 또 다른 죄를 부릅니다. 죄는 사람들을 무감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서너 가지라 하여 아모스가 각 민족의 죄를 그 숫자에 맞추어 언급하지 않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죄’는 반역이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종주국에 대한 제후국의 반역 혹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죄에는 벌이 따른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용서하지 않겠다’는 말씀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사납고 난폭한 세상
다마스쿠스의 죄는 잔인함입니다. 아람은 오랫동안 북왕국과 크고 작은 전쟁을 벌인 나라입니다. 요단강 동쪽, 특히 ‘길르앗’ 지역의 주도권을 쥐기 위한 싸움이 치열했습니다. 길르앗은 화석암이 뒤덮인 지대였기 때문에 농사에는 부적절했지만, 목축에는 아주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샘이 많고 겨울에 비가 풍부하고, 여름에 이슬 또한 풍성히 내려 숲이 발달했고, 치료효과가 뛰어난 유향(발삼)이 나는 곳(렘8:22, 46:11)으로 유명했습니다. 다마스쿠스는 어찌하든지 그 땅을 차지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런 다마스쿠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들이 쇠도리깨로 타작하듯이, 길르앗을 타작하였기 때문이다”(암1:3b). 적대 관계가 오래 계속되면서 서로에 대한 원한감정이 깊었기 때문일까요? 그들은 필요 이상으로 잔인했습니다.

다음으로 ‘가사‘로 대표되는 블레셋에 대한 심판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시다시피 블레셋은 이스라엘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 수시로 갈등을 빚어온 부족 연맹체입니다. 그들의 죄는 전쟁을 통해 사로잡은 사람들을 에돔에 넘긴 것입니다. 그들은 분쟁의 시기에 피난처를 찾아 나선 이들을 품어 안기는커녕 그들을 적성 국가에 노예로 팔아넘겼던 것입니다. 인간성에 반하는 죄입니다.

‘두로‘는 지금의 레바논에 속하는 지역입니다. 두로는 지중해 무역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무역을 통해 부유해지자 교만해졌습니다. 에스겔은 두로의 죄를 “물건을 사고 파는 일이 커지고 바빠지면서 너는 폭력과 사기를 서슴지 않았다”(겔28:16)고 지적했습니다. 두로는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맺은 평화조약을 헌신짝처럼 버렸습니다. ‘형제의 언약을 기억하지 않았다’는 말은 바로 그것을 가리킵니다. 영원한 우방도 적도 없다는 말이 실감나는 현실입니다. 그들은 상황이 달라지자 이스라엘 사람들을 끌어다가 에돔에 넘겨주었습니다.

‘에돔‘의 죄는 더 심각합니다. 에돔은 에서에게서 유래된 나라입니다. 아모스는 에돔의 죄를 칼을 들고서 제 형제를 뒤쫓고, 형제 사이의 정마저 끊고, 늘 화를 내며, 끊임없이 분노를 품고 있다고 지적합니다(암1:11). 특이한 것은 다른 나라의 죄는 과거형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반해 에돔의 죄는 현재형으로 서술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에돔은 나중에 예루살렘이 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당할 때도 잔인하게 처신했습니다. 그들은 강대국의 폭력을 방조했고, 심지어 곤경에 처한 이들의 집을 약탈했고, 피난길에 나선 이들을 가로막고, 그들을 적에게 넘기기까지 했습니다.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암몬’과 ‘모압’의 죄에 대한 지적과 심판이 2장 3절까지 이어집니다. 암몬은 길르앗에 쳐들어가서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가르기까지 했습니다. 모압은 에돔 왕의 뼈를 불태워 재로 만들었습니다. 국제 관계가 냉혹하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지만 인간성에 반하는 죄를 저지르는 일까지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잔인한 일들을 인간성에 대한 반역만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십니다.

인류 역사에 분쟁이 그칠 사이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모든 일들이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곤경에 처한 이들을 그 큰 어려움 속으로 내몬다든지, 필요 이상으로 잔인하게 대하는 일은 스스로 심판을 자초하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난민이 되어 떠도는 이들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질 것을 요청합니다. “너희는 너희에게 몸붙여 사는 나그네를 학대하거나 억압해서는 안 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몸붙여 살던 나그네였다“(출22:21). 벼랑 끝에 내몰린듯 위태로운 지경에 처한 사람의 설 땅이 되어주는 일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국가 간의 분쟁만 문제겠습니까? 이해관계가 모든 가치의 척도가 된 세상입니다. 이익과 손해를 따지지 않을 수 없지만, 평화로운 공존과 사랑에 위배되는 일이라면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려는 마음은 낭만주의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요? 우리는 적어도 그런 일을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이 아닐까요? 바리새파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물었을 때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아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말할 수도 없다. 보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눅17:20-21)고 대답하셨습니다. 우리 가운데 임하는 하나님 나라, 그것은 사랑과 존중과 이해와 더불어 임합니다. 약자들을 돌보고, 그들의 설 땅이 되어주려는 마음과 더불어 임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냉혹해도 그런 삶을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표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이 다른 이들이 수고한 덕분인 것처럼, 우리 또한 누군가 거둘 생명과 평화의 씨를 뿌리며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은총 가운데 그런 소명을 잘 감당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1년 06월 06일 10시 45분 35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