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4. 끊어지면 안 되는 사랑의 고리
설교자 김기석
본문 잠 17:9-17
설교일시 2022-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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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지면 안 되는 사랑의 고리
잠 17:9-17
(2022/01/23, 주현절 후 제3주)

[허물을 덮어 주면 사랑을 받고, 허물을 거듭 말하면 친구를 갈라놓는다. 미련한 사람을 백 번 매질하는 것보다 슬기로운 사람을 한 번 징계하는 것이 더 효과가 있다. 반역만을 꾀하는 악한 사람은 마침내 잔인한 사신의 방문을 받는다. 어리석은 일을 하는 미련한 사람을 만나느니,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곰을 만나라. 악으로 선을 갚으면, 그의 집에서 재앙이 떠나지 않는다. 다툼의 시작은 둑에서 물이 새어 나오는 것과 같으니, 싸움은 일어나기 전에 그만두어라. 악인을 의롭다고 하거나, 의인을 악하다고 하는 것은, 둘 다 주님께서 싫어하신다. 미련한 사람의 손에 돈이 있은들, 배울 마음이 없으니 어찌 지혜를 얻겠느냐? 사랑이 언제나 끊어지지 않는 것이 친구이고, 고난을 함께 나누도록 태어난 것이 혈육이다.]

• 허물을 덮는 사랑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주현절 후 세 번째 주일인 오늘 우리는 대한과 입춘 사이를 지나고 있습니다. 시간은 빠르게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가지만 새롭고 신선한 느낌이 들지는 않습니다. 전도서 기자는 “만물이 다 지쳐 있음을 사람이 말로 다 나타낼 수 없다“(전 1:8)고 말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생기가 빠져나간 것 같은 느낌이 들고, 내적인 공허감에 사로잡히면 만사가 시들해 보입니다.

물론 주변에는 뭔가에 엄청난 열정을 보이는 분들이 있습니다. 먹는 것에 진심인 분도 있고, 재산 모으기에 최선을 다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주식이나 비트코인, 부동산에 대한 관심 또한 깊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소비사회의 신민이 되어 삽니다. 정치의 계절이어서인지 정치적 담론들이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습니다. 문제는 품격 있는 언어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데 있습니다. 경박하고 상스럽고 무책임하고 상처를 주기로 작정한 듯한 말들이 마구 동원되고 있습니다. 곁에 서 있다가 구정물을 한 바가지 뒤집어쓴 것처럼 불쾌합니다.

화해자가 되어야 할 기독교인들조차 장벽을 만들고 높이는 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입으로는 사랑을 말하면서도 자기와 다른 입장에 서 있는 이들에 대한 증오와 혐오를 감추려 하지 않습니다. 이런 현실을 목도할 때마다 사랑의 공동체를 허무는 이들을 향한 유다서의 경고가 우렁우렁 들려옵니다. 유다는 그런 이들을 가리켜 “자기들의 수치를 거품처럼 뿜어 올리는 거친 바다 물결이요, 길 잃고 떠도는 별들“(유다 1:13)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또한 짙은 어둠에 갇힌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의 모듬살이에 갈등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서로 비스듬히 기댄 채 살 수밖에 없지만, 내가 기대고 있는 그 사람이 혹은 나를 기대고 있는 그 사람이 싫어질 때도 있습니다. 생각과 지향이 다르면 더욱 그러합니다. 가끔은 새처럼 날개가 있다면 이 꼴 저 꼴 보지 않고 살 수 있는 장소로 물러가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생은 그런 감정의 파고를 겪으면서도 사랑을 배워가는 과정입니다. 人間이라는 단어 속에 이미 사람은 다른 이들과 창조적인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사람답게 된다는 뜻이 새겨져 있습니다. 함께 살기 위해서는 그의 다름을 받아들이고 존중해야 합니다. 히브리의 지혜자는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허물을 덮어 주면 사랑을 받고, 허물을 거듭 말하면 친구를 갈라놓는다“(잠 17:9). 허물의 사전적 의미는 잘못, 실수, 과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허물’이라 번역된 단어는 실은 ‘한계를 넘어섬‘, ‘위반’, ‘범죄’를 뜻하는 히브리어 페쉐(pesha‘)입니다. 조금 심각한 죄입니다. 알고 저지른 것이든 모르고 저지른 것이든 그러한 잘못은 남에게도 피해를 주지만 당사자의 마음에 짙은 그림자로 남게 마련입니다. 인간은 부끄러움을 아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잘못은 드러내 바로잡아야 할 때도 있지만, 덮어줌으로 스스로 깨달을 기회를 주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대홍수 이후에 포도농사를 짓던 노아는 어느 날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은 채 누워 있었습니다. 사람들을 구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그를 괴롭혔던 것일까요? 어쩌면 자기가 직면했던 비극적인 현실을 잊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둘째 아들 함은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보고 바깥으로 나가 형제들에게 알렸습니다. 셈과 야벳은 겉옷을 가지고 가서, 둘이서 그것을 어깨에 걸치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덮어 드렸습니다(창 9:23).

허물을 덮어준다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허물을 덮어주는 것은 그가 회복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주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허물을 반복적으로 들춰내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는 그런 기억을 소환하여 상대방을 당혹스럽게 만들고, 그의 영혼에 드리운 그림자를 더욱 짙게 만듭니다. 그들의 관계는 깨지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허물을 덮어주라는 말이 잘못 그 자체를 묵인해주라는 말은 아닙니다. 10절이 앞의 구절을 보충해주고 있습니다. 정문일침의 말로 꾸짖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돌로 치려는 무리들이 다 돌아가자 그 여인을 보고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마시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이 전제된 꾸지람은 우리 영혼을 밝히는 빛이 됩니다.

• 반역만 꾀하는 사람
11절은 반역만을 꾀하는 악한 사람과 어리석은 일을 하는 미련한 사람에게 닥칠 운명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반역을 꾀한다는 것은 사사건건 엇나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세상에는 남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을 역사적 사명으로 타고 난 것처럼 보이는 이들도 있습니다. 어쩜 그렇게 누군가의 부정적인 모습을 잘 찾아내는지 탄복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들은 참 딱한 사람들입니다. 자기 속에 두려움이 많고 열등감이 강한 사람일수록 다른 이들에 대해 부정적입니다. 그들은 정작 필요할 때는 용기를 내지 못합니다. 그는 평화의 적입니다. 사랑의 공동체를 훼손하기 일쑤입니다.

때로는 저항 혹은 반항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거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비인간 취급을 받는데도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처신한다면 우리 믿음이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의 존엄을 누가 지켜주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용기를 가지고 억압하는 자들과 맞서야 합니다. 미국에서 억압받은 흑인들의 입장에 서서 기독교를 재해석한 신학자 제임스 콘은 늘 백인 주류 사회와 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부터 보았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당당함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제임스, 말해줄 게 있다. 나는 네 엄마가 백인의 집에서 일하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을 거야. 나는 돈이 많지 않지만, 성폭력에 대해 알고 있고, 괴롭힘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비록 1년에 천 달러 밖에 벌지 못하지만 밖으로 나가 날마다 나무를 모아 팔며, 그 외엔 한 푼도 받지 않고 있다. 자신의 고결함을 내다 팔아서는 안 된다. 그 누구도 너의 고결함을 돈 주고 사도록 해선 안 된다. 세상이 너에게 줄 수 없고 또 빼앗아 가지 못하는 기쁨이 있기에 무너져 내릴지언정 당당해야 한다.“(제임스 콘,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홍신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p.3-4)

‘자신의 고결함을 내다 팔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 어린 제임스 콘의 마음에 마치 금강석 철필로 쓴 것처럼 새겨졌습니다. 그 한 마디가 일평생 그를 지켜준 방패였습니다. 반항하는 인간은 새로운 세상을 상상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11절이 말하는 반역만을 꾀하는 악한 사람 혹은 어리석은 사람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다른 이들 속에 있는 선의 씨앗을 짓밟곤 합니다. 공익을 말하면서도 그들은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잠언은 그들이 부지불식간에 잔인한 사신의 방문을 받게 된다고 말합니다.

• 둑을 막으라
14절입니다. “다툼의 시작은 둑에서 물이 새어 나오는 것과 같으니, 싸움은 일어나기 전에 그만두어라.“ 늘 경험하는 바이지만 사람은 사소한 것 때문에 의가 상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공동체 운동을 했던 어느 목사님이 했던 말이 떠오릅니다. 공동체가 위기에 빠지는 것은 이념이나 지향이 달라서가 아니라, 치약을 짜는 습관, 옷을 벗어 놓는 습관 등 사소한 차이가 갈등을 빚는 경우가 제법 많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공동의 지향과 공동체 운동을 통해 자본주의의 대안을 만들어내자는 멋진 포부가 그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았지만, 서로 생활 습관의 차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 다툼이 일어납니다.

작은 것들도 쌓이면 큰 무게가 됩니다. ‘티끌 모아 태산‘,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 ‘낙숫물이 댓돌을 뚫는다‘는 말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반복과 지속의 힘이 얼마나 큰 지를 보여줍니다. 반복되는 무시, 비하, 모욕은 공동체의 담을 허무는 여우입니다. 솔로몬의 노래로 알려진 아가서에 나오는 한 구절입니다. "여우 떼를 좀 잡아 주오. 꽃이 한창인 우리 포도원을 망가뜨리는 새끼 여우 떼를 좀 잡아 주오."(아가 2:15) 봄이 되어 꽃이 활짝 피고 향기가 넘실거립니다. 이제 바야흐로 사랑의 잔치가 벌어질 찰라입니다. 그러나 그 잔치가 흥겨우려면 ‘새끼 여우 떼‘를 함께 잡아야 합니다. 그 여우는 새끼 여우입니다. 위험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냥 두어도 별 탈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새끼 여우 떼가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우리 관계에 금을 가게 만드는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조급증, 자기중심성, 무정함, 무례함, 교만함, 자기 의와 같은 것들이 아닐까요? 스스로 중요한 존재가 되려는 마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옳음을 강조하느라 사랑과 존중과 따뜻함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둑에서 물이 새는 것을 방치하는 순간 문제는 커집니다. 골로새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이들이 명심해야 할 것을 이렇게 요약하여 들려줍니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납하여 주고, 서로 용서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는 띠입니다.“(골 3:13-14)

이 마음을 잃는 순간 교회는 세상과 다를 바 없어집니다. 신앙생활은 말씀을 거울로 삼아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고, 지향을 분명하게 하고, 애써 자기의 옛 삶과 결별하는 고단한 과정입니다. 그런 노력이 없다면 신앙생활은 그저 습관일 뿐이고 이사야의 말대로 성전의 뜰만 밟는 셈입니다. 독일의 루터교 목사였던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의 말이 가끔 떠오릅니다.

“우리가 만약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로 충만하지 않다면, 세상을 애정 어린 선한 눈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을 사랑으로 붙들어주지 않는다면, 하나님 또한 우리를 돌보아 주지 않으실 것이며 교회를 다니는 것과 상관없이 우리를 불신자로 여기실 것입니다“(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 <행동하며 기다리는 하나님 나라>, 전나무 옮김, 대장간, p.63)

• 친구와 혈육
16절입니다. “미련한 사람의 손에 돈이 있은들, 배울 마음이 없으니 어찌 지혜를 얻겠느냐?“ 제가 가장 높이 평가하는 사람은 배움에 열린 사람입니다. 학생정신이야말로 참 사람의 길을 가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배움에 열심인 시대입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조건을 만들기 위해 기능을 배우고, 자격증을 따고, 물질적인 안정을 이룬 이들 가운데는 교양인이 되기 위해 뭔가를 배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작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한 마음 공부는 소홀히 합니다. ‘더 나은 존재‘가 뭐냐고 물으면 간단하게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이기심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조심스럽게 배려하고, 어려움에 처한 이들과 연대하기 위해 사랑의 수고를 기꺼이 행한다면, 더 나아가 그의 편이 되려다가 고난받는 것까지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조금은 나은 존재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작년 4월에 세상을 떠난 채현국 선생의 말이 제게는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는 1970년대 초반까지 삼척시 도계에서 흥국탄광을 운영하던 거부였습니다. 개인소득세 납부액이 전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였다니 그의 재산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1973년에 그 탄광을 정리해서 종업원들한테 다 분배해버리고 맙니다. 광부들에게 장학금을 주어 자식들을 안심하고 기르게 하고, 병원을 차려 무료 진료를 받게 하고, 마지막에는 광부들이 이후에 10년씩 더 일한다 치고 미리 퇴직금을 앞당겨 계산해서 나눠주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도울 수 있었느냐는 말에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난 도운 적 없어요. 도움이란, 남의 일을 할 때 쓰는 말이죠. 난 내 몫의, 내 일을 한 거예요. 누가 내 도움을 받았다고 말하는지는 몰라도 나까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될 일이죠.“(이진순, <당신이 반짝이던 순간>, 문학동네, p.296)

난 내 몫의 일을 했을 뿐, 누군가를 도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이 놀랍지 않습니까? 이런 마음을 쓰는 이들이 있어 세상은 여전히 살만한 곳이 됩니다. 인간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사람이 진짜 지혜자가 아니겠습니까? 이제 마지막 구절입니다.

“사랑이 언제나 끊어지지 않는 것이 친구이고, 고난을 함께 나누도록 태어난 것이 혈육이다.“(잠 17:17)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요 15:14)라고 하셨고,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막 3:35)라고 하셨습니다. 낯선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세상에 갈등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친구와 형제가 되라는 부름 속에 있습니다. 지금 곁에 있는 이들은 우리를 더 나은 존재가 되도록 도와줄 소중한 인연들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합니다.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고리를 느슨하게 만듭니다. 주님은 이 척박한 세상을 치유하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사랑의 연결고리를 든든하게 만드는 일이야말로, 이 시대에 교회로 부름 받은 우리 모두의 소명입니다. 우리가 서있는 삶의 자리가 어디이든 사랑의 고리를 든든하게 만드는 보람을 맛보며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2년 01월 23일 12시 16분 16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