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5. 갈르엣
설교자 김기석
본문 창 31:43-50
설교일시 2022-01-30
오디오파일 s20220130-2.mp3 [49224 KBytes]
목록

갈르엣
창 31:43-50
(2022/01/30, 주현 후 제4주)

[라반이 야곱에게 대답하였다. "이 여자들은 나의 딸이요, 이 아이들은 다 나의 손자 손녀요, 이 가축 떼도 다 내 것일세. 자네의 눈 앞에 있는 것이 모두 내 것이 아닌가? 그러나 여기 있는 나의 딸들과 그들이 낳은 나의 손자 손녀를, 이제 내가 어떻게 하겠는가? 이리 와서, 자네와 나 사이에 언약을 세우고, 그 언약이 우리 사이에 증거가 되게 하세." 그래서 야곱이 돌을 가져 와서 그것으로 기둥을 세우고, 또 친족들에게도 돌을 모으게 하니, 그들이 돌을 가져 와서 돌무더기를 만들고, 그 돌무더기 옆에서 잔치를 벌이고, 함께 먹었다. 라반은 그 돌무더기를 여갈사하두다라고 하고, 야곱은 그것을 갈르엣이라 하였다. 라반이 말하였다. "이 돌무더기가 오늘 자네와 나 사이에 맺은 언약의 증거일세." 갈르엣이란 이름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돌무더기를 달리 미스바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라반이 "우리가 서로 떨어져 있는 동안에, 주님께서 자네와 나를 감시하시기 바라네" 하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자네가 나의 딸들을 박대하거나, 나의 딸들을 두고서 달리 아내들을 얻으면, 자네와 나 사이에는 아무도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자네와 나 사이에 증인으로 계시다는 것을 명심하게."]

• 평화 만들기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기를 빕니다. 설날 연휴에 접어들었습니다만 오미크론 확산으로 인해 불안한 마음이 가시질 않습니다. 중증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줄어들었다고는 해도 그래도 우려스럽긴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은혜의 큰 손으로 우리를 지켜주시기를 빕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흐르고 있습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나토와 가까워지는 것을 허용할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국경지대에 많은 무기가 배치되고 전쟁 훈련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일찍이 전쟁의 잔혹함을 경험했던 이들은 이 상황을 공포스럽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두 세력 사이에 낀 발트 삼국도 크게 위협을 느끼고 있습니다. 어느 일방의 이해가 관철되기보다 모든 이들에게 좋은 결과가 나타날 수 있기를 빕니다. 평화가 위협받고 있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먼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이라 하여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할 수 없습니다. 지금의 세상은 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러시아에서 유럽으로 공급되는 가스관이 차단될 경우를 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대통령 선거를 둘러싼 공방으로 여일이 없는 지금 북한은 계속해서 무기 실험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한반도가 분쟁지역이라는 사실을 세계인들에게 상기시키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평화의 길은 멀기만 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험하다고 하여 포기할 수 없는 길입니다.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던 세상에 살던 이사야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비전을 인류 앞에 내놓았습니다.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눕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사 11:6-8)

이것은 일종의 시적 상상력입니다. 상상력이니까 현실적이지는 않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상력이야말로 우리가 현실 논리에 순응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꿈꿀 수 있는 바탕이 됩니다. 에덴 이후에 태어난 첫 사람 가인이 형제 살해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사람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일이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우울하게 상기시켜줍니다. 바울 사도는 우는 사람과 함께 울고,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라고 말합니다(롬 12:15). 너무 쉬운 요구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의식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들이 겪는 아픔에 공감하는 일도 어렵지만, 다른 이들의 기쁨을 흔쾌하게 기뻐하는 일은 더 어렵습니다.

교회 전통은 질투 혹은 시기심을 일곱 가지 죄의 뿌리 가운데 하나로 꼽습니다. 시기심이 많은 사람은 늘 다른 사람을 의식합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좋은 것을 보면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시기심은 증오, 험담, 비난, 폭력의 뿌리가 됩니다. 시기심 때문에 가인은 아벨을 죽였고,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을 종으로 팔아버렸습니다. 시기심의 해독제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보면 진심으로 기뻐합니다. 저절로 ‘되는’ 사랑도 있지만 애쓰고 노력함으로 ‘하는’ 사랑도 있는 법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너희가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마 5:4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생이란 그런 사랑을 배우고 몸으로 실천하는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록 온전한 사랑에는 이르지 못했더라도 평화롭게 공존하는 법은 반드시 익혀야 합니다.

• 야곱의 기구한 삶
야곱 이야기는 깊은 갈등 속에 있던 이들이 어떻게 화해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야곱과 외삼촌이자 장인인 라반의 화해, 야곱과 에서의 화해 이야기는 언제 보아도 감동적입니다.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조상인 야곱은 정말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인생 말년에 애굽에 내려가 바로 앞에 섰을 때 나이를 묻는 왕에게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 세상을 떠돌아다닌 햇수가 백 년 하고도 삼십 년입니다. 저의 조상들이 세상을 떠돌던 햇수에 비하면, 제가 누린 햇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창 47:9) ‘험악한 세월‘이라는 말 속에 그가 경험했던 온갖 고통과 슬픔이 다 담겨 있습니다.

야곱 이야기를 읽노라면 그의 삶이 영웅들의 서사와 매우 닮아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영웅들은 개인의 경험을 통해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드러낸 인물들입니다. 영웅 이야기는 몇 가지 전형적인 패턴으로 전개됩니다. 안온했던 삶으로부터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 떠남에서 비롯된 온갖 시련과 극복, 새로운 존재로의 탄생, 그리고 귀향이 그것입니다. 야곱 이야기도 거의 동일한 패턴을 따라갑니다. 쌍둥이 형 에서와의 갈등으로 인해 고향을 떠나야 했던 상황, 돌베개로 상징되는 위기와 시련, 얍복강 나루에서 천사와 씨름하다가 엉덩이뼈가 골절되고 야곱이라는 이름 대신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는 과정, 그리고 고향에서의 정착이 그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눈이 어두운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형 에서에게 돌아갈 축복을 가로챈 후 고향을 떠난 지 20년 만에 귀향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한 사건을 보여줍니다. 야곱은 밧단아람에 있는 외가에 가서 외사촌 누이들과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자식도 많이 두었지만 그는 여전히 외부자였습니다.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고향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 야곱의 재산이 불어나자 라반의 아들들의 얼굴빛이 달라졌습니다. 어느 시대, 어디에서나 재산 문제는 언제라도 폭발할 수 있는 화약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마 6:24)고 말씀하셨습니다. ‘재물’로 번역된 ‘마모나스’는 단순히 교환의 수단으로서의 재물이나 돈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숭배를 요구한다는 측면에서 우상입니다. 예수님은 돈이 우리의 충성을 얻으려고 애쓰는 유사 신이라고 본 것입니다. 돈이 부정적으로 개입하는 순간 아름다웠던 관계는 무너지게 마련입니다. 가족 간에도 돈 문제 때문에 많은 긴장과 불화가 빚어집니다.

• 하나님 앞에 함께 서다
야곱은 더 이상 자기가 그곳에 머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외삼촌 라반이 출타 중에 가족과 재산을 정리하여 귀향길에 오릅니다. 고향을 떠나올 때 그러했던 것처럼 그는 귀향길에서도 도망자 신세입니다. 야곱이 도망한 지 사흘 만에 그 소식을 들은 라반은 즉시 자기 친족들을 이끌고 이레 동안 야곱의 뒤를 좇았습니다. 그 두 집단은 마침내 길르앗 산간지방에서 마주쳤습니다. 친족 간에 잔혹한 폭력이 자행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라반과 야곱은 일단 말로 서로를 책망합니다.

라반은 야곱이 자기를 속였다고 나무랍니다. 자기 딸들을 마치 전쟁 포로 잡아가듯 잡아갔을 뿐만 아니라, 손자 손녀들에게 입을 맞출 기회도 주지 않았고, 딸들과 석별의 정을 나눌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와 상의했더라면 북과 수금에 맞추어서 노래를 부르며 기쁘게 떠나보냈을 것이라고도 말했습니다. 이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기는 조금 어렵습니다. 그 동안에 그가 야곱에게 한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야곱이 말할 차례입니다. 그는 자기 허물이 무엇이냐고 거칠게 묻습니다. 지난 스무 해 동안 장인의 무도한 요구를 다 받아들이며 지냈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낮에는 더위에 시달리고, 밤에는 추위에 떨면서,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낸 것, 이것이 바로 저의 형편이었습니다“(창 31:40). 가족이 아니라 머슴인 셈입니다. 이런 수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장인 라반이 그의 품삯을 열 번이나 바꿔쳤다는 것입니다. 사회적 약자인 야곱은 그러한 불의한 현실을 바로잡을 힘이 없었지만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정의를 세워주셨다면서 ‘내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을 보살펴 주신 하나님‘, ‘이삭을 지켜 주신 두려운 분‘께서 자기와 함께 계시지 않았더라면 자기는 빈 손으로 고향으로 가게 되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두 사람의 주장이 거칠게 맞부딪쳐 파열음을 낼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들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폭력은 언어화되지 못한 응답이라지요? 그들은 자기들의 서운한 마음과 분노를 폭력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대화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는 말입니다. “이야기하기는 심오한 차원에서 정치를 인간화하는 방식“(조너선 색스, <사회의 재창조>, 서대경 옮김, 말·글빛냄, p.249)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의 법정을 안티로기아(antilogia)라고 합니다. 이 단어를 영한 사전은 ‘자가당착’이라 설명하지만 실은 인간의 모든 말들이 소환되어 진위를 가리는 현장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말입니다. 라반과 야곱은 하나님을 둘 사이의 재판관으로 모셨습니다. 말들이 오가면서 오해가 다 풀린 것은 아니지만, 거친 폭력의 충동은 누그러졌습니다. 마침내 화해의 가능성이 열렸습니다.

• 화해의 돌무더기
라반은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에게 언약을 맺자고 말합니다. 언약을 세우고 그 언약이 그들 사이의 증거가 되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친족들에게 돌을 모으게 하고, 그것을 함께 쌓아 돌무더기를 만들고는 그 돌무더기 옆에서 잔치를 벌이고 함께 먹었습니다. 화해의 식탁인 셈입니다. 돌무더기는 그들이 맺은 언약을 가시적으로 드러낸 것입니다. 라반은 그 돌무더기를 ‘여갈사하두다’라고 불렀고 야곱은 ‘갈르엣’이라고 불렀습니다. 각각 아람어와 히브리어 표현입니다. 나중에 이 돌무더기는 미스바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미스바는 ‘망루’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라반의 부탁과 관련됩니다. “우리가 서로 떨어져 있는 동안에, 주님께서 자네와 나를 감시하시기 바라네!“(창 31:49) 유진 피터슨은 이 미스바 이야기를 간결하게 설명합니다.

“그들은 상대에게서 무언가 이득을 취할 기회만 노리고 의심의 눈초리로 서로를 감시하며 20년간 지내 왔다. 이제 그들은 서로 감시하기를 그만두고 하나님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록 하는 데 동의했다.“(유진 피터슨, <하나님께 응답하는 기도>, 편집부 옮김, IVP, p.107)

라반은 야곱에게 두 가지를 당부합니다. 하나는 가족에 관련된 부탁이고 다른 하나는 부족에 관련된 부탁입니다. 그는 야곱에게 딸들을 박대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합니다. 또한 그 돌무더기를 경계로 하여 서로를 침해하거나 해치는 일이 없도록 하자고 말합니다. 평화 공존에 대한 제안입니다. 두 사람은 각자가 경험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언약을 받아들입니다. 야곱은 거기서 제사를 드리고, 친족들을 식탁에 초대했습니다. 그들은 음식을 함께 먹었고, 그 날 밤을 함께 지냈습니다. 다음 날 라반은 손자 손녀들과 딸들에게 입을 맞추고, 그들에게 축복하고, 길을 떠나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자칫하면 친족간의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 그들은 폭력의 충동을 내려놓고 대화를 시작했고, 하나님을 그들 사이에 모심으로 화해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살다보면 누군가와 이해관계가 엇갈려 서로 반목하고 깊은 갈등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런 문제를 잘 직시하고 풀어가는 것이 지혜로움입니다. 강자들은 때로 합법성을 가장하여 약자들의 살 권리를 훼손하기도 합니다. 야곱 이야기는 이런 상황에서 매우 중요한 것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약자들의 곁에 머물면서 그들의 권리를 찾아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가 겪은 고난과 제가 한 수고를 몸소 살피시고, 어젯밤에 장인 어른을 꾸짖으셨습니다“(창 31:42).

갈등하던 두 집단은 평화스럽게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이 에피소드를 마무리하면서 창세기 기자는 야곱이 길을 떠나서 가는데, 하나님의 천사들이 야곱 앞에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그들을 알아본 야곱은 “이 곳은 하나님의 진이구나!“ 하면서 그 곳 이름을 마하나임이라고 하였습니다(창 32:2). 화해의 자리, 평화를 선택한 그 자리야말로 하나님이 계신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애써 평화를 선택하고, 화해를 모색할 때 우리는 비로소 사랑이라는 더 궁극적인 세계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여갈사하두다, 갈르엣, 미스바의 기적이 우리 삶 가운데서도 나타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2년 01월 30일 12시 06분 2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