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6.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설교자 김기석
본문 호11:8-11
설교일시 2022-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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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호 11:8-11
(2022/02/06, 주현 후 제5주)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원수의 손에 넘기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처럼 버리며, 내가 어찌 너를 스보임처럼 만들겠느냐? 너를 버리려고 하여도, 나의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구나! 너를 불쌍히 여기는 애정이 나의 속에서 불길처럼 강하게 치솟아 오르는구나. 아무리 화가 나도, 화나는 대로 할 수 없구나.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망시키지 않겠다. 나는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니다. 나는 너희 가운데 있는 거룩한 하나님이다. 나는 너희를 위협하러 온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 사자처럼 부르짖으신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주님의 뒤를 따라 진군한다. 주님께서 친히 소리 치실 때에, 그의 아들딸들이 서쪽에서 날개 치며 빨리 날아올 것이다. 이집트 땅에서 참새 떼처럼 빨리 날아오고, 앗시리아 땅에서 비둘기처럼 날아올 것이다. "내가 끝내 그들을 고향집으로 돌아오게 하겠다. 나 주의 말이다."]

• 신앙인의 입춘첩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기원합니다. 입춘 절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입춘첩을 붙여놓은 집들도 보입니다.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새로운 소망이 유입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한결같습니다. 저는 입춘을 맞이하며 시편 시인의 소원을 마음에 새기고 있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큰 복을 내려 주십시오.‘ ‘누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보여줄 수 있을까?‘ 하며 불평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주님의 환한 얼굴을 우리에게 비춰 주십시오“(시 4:6). 주님께서 환한 얼굴을 우리에게 비춰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세상에 근심 걱정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저마다 지고 가는 인생의 무게가 무겁습니다. 비틀거릴 때가 많습니다. 이런저런 복잡한 일들로 인해 마음이 무거워질 때면 주변에 있는 이들에게 친절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럴 때마다 정진규 시인의 시 구절을 떠올립니다. 시인은 진달래가 왈큰왈큰 지천으로 피어나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후련해졌다면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지금 나 한 사날 잘 열리고 있어/누구나 오셔, 아름답게 놀다 가셔!“(‘몸詩·14’ 중에서). 늘 기쁨에 충만할 수는 없습니다. ‘한 사날‘이라도 잘 열리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마음이 열려야 다른 이들에게 너그럽게 됩니다. 아무리 강한 것처럼 보이는 이들도 때로는 위로와 위안이 필요한 법입니다. 성인들의 내면에도 상처 받은 어린 아이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은 세상의 모든 아픔, 슬픔, 상실, 고독을 다 받아 안으셨다는 데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그 놀라운 진실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도 연약함에 휘말려 있으므로, 그릇된 길을 가는 무지한 사람들을 너그러이 대하실 수 있습니다“(히 5:2).

• 줏대 없는 비둘기
오늘 호세아서의 본문은 당신의 백성 때문에 애태우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잘 보여줍니다. 호세아는 여로보암 2세 때(786-746 B.C.E) 예언을 시작했습니다. 이 때는 경제적인 번영기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시대나 번영의 이면은 불평등과 빈부 격차입니다. 부유함으로 인해 사람들은 형제애를 잃어버렸고, 욕망의 포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수 천 년의 시간이 지나도 이 문제는 동일합니다. 풍요로움에 집착할 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이웃과도 멀어집니다. 돈은 아가서 식으로 말하자면 ‘공동체를 허무는 여우‘입니다. 여로보암 2세 때의 풍요로움이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었습니다. 세력을 키운 앗시리아 왕 디글랏빌레셀 3세(주전 745-727)의 야욕 때문입니다. 그는 전리품과 노예를 얻고 조공을 강요하기 위해 침략 전쟁을 벌이곤 했습니다. 한 나라를 정복하면 반란의 싹을 차단하기 위해 사람들을 집단 이주시키곤 했습니다. 앗시리아의 침공 앞에서 이스라엘은 지리멸렬을 면치 못했습니다. 여로보암이 죽은 후 10년 동안 5명의 왕이 등장한 것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그 중에 3명은 쿠데타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정치적 혼란이 이어졌습니다. 호세아는 자기 시대의 혼란의 원인이 하나님의 무능이 아니라 사람들의 그릇된 권력욕 때문임을 지적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왕들을 세웠으나, 나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다. 통치자들을 세웠으나, 그 또한 내가 모르는 일이다. 은과 금을 녹여서 신상들을 만들어 세웠으나, 마침내 망하고야 말 것이다“(8:4)

권력욕에 사로잡힌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오히려 외세에 의존하여 자기 세력을 키우려고 했습니다. “에브라임은 어리석고, 줏대 없는 비둘기이다. 이집트를 보고 도와 달라고 호소하더니, 어느새 앗시리아에게 달려간다.“(7:11) ‘줏대 없는 비둘기‘라는 표현이 생소합니다. 사람들 사이에 구전되던 기독교의 자연 상징을 수집해 수록한 <피지올로구스>는 비둘기가 ‘정절’과 ‘신실한 사랑‘, ‘고독한 기도‘를 의미한다고 말합니다(자연학자 피지올로구스 지음, <피지올로구스>, 노성두 옮김, 미술문화, p.116). 하나님 앞에서 비둘기처럼 정결하고 신실해야 했던 이스라엘이 자신의 정체성을 저버리고 줏대 없는 비둘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외세를 의존하는 것은 당장에는 이익처럼 보이지만 결과적으로는 더 큰 패착이 되고 맙니다. “이스라엘이 바람을 심었으니, 광풍을 거둘 것이다. 곡식 줄기가 자라지 못하니, 알곡이 생길 리 없다. 여문다고 하여도, 남의 나라 사람들이 거두어 먹을 것이다.“(8:7)

• 돌아가자
호세아는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백성들을 향해 주님께로 돌아가자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어린 아이일 때 이집트에서 그를 불러내셨고, 걸음마를 가르치셨고, 품에 안아 기르셨습니다. 죽을 고비에서 살려주시기도 했습니다. “나는 인정의 끈과 사랑의 띠로 그들을 묶어서 업고 다녔으며, 그들의 목에서 멍에를 벗기고 가슴을 헤쳐 젖을 물렸다.“(호 11:4) 우리는 자주 엇나가고, 비틀거리고, 넘어지고,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행동합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잘 아시는 주님은 인내하는 사랑과 친절로 우리를 받아주십니다. 값없이 주어지는 사랑이라 하여 무가치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짝사랑일 때가 많았습니다. 백성들은 늘 다른 사랑을 찾아가곤 했기 때문입니다.

호세아는 자기 경험에 비추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호세아의 아내 고멜은 아들과 딸 삼 남매를 낳아 기르면서도 추파를 던지는 정부를 따라 집을 떠나곤 했습니다. 배신감에 치를 떨 수도 있었지만 호세아는 주님의 권고에 따라 고멜을 받아들였습니다. “너는 다시 가서, 다른 남자의 사랑을 받고 음녀가 된 그 여인을 사랑하여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들에게로 돌아가서 건포도를 넣은 빵을 좋아하더라도, 나 주가 그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너도 그 여인을 사랑하여라“(호 3:1). ‘건포도를 넣은 빵‘은 하늘 여신을 섬길 때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호세아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가없는 사랑을 나타내는 하나의 징표였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어기고 우상들을 좇아간 백성들이 돌아오기를 애태우며 기다리고 계십니다. 사랑은 유약해 보이지만 강합니다.

노자의 도덕경 40장에 나오는 말이 떠오릅니다. ‘反者, 道之動, 弱者 道之用‘. 돌아가는 것이 도의 움직임이고, 약한 것이 도의 기능이라는 뜻입니다. 가을이 되면 나뭇잎이 떨어져 흙으로 돌아가고, 겨울이면 철새들이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사람의 참됨은 하나님께로 돌아감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를 세우시는 분이지만 그 사랑이 한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 사랑은 유약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모든 것을 품는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이제 주님께로 돌아가자. 주님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 주시고, 우리에게 상처를 내셨으나 다시 아물게 하신다”(호 6:1).

헨리 나우웬 신부는 <탕자의 귀향>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을 잃어버리는 순간, 둘째 아들이 경험했던 상실에 대해 말합니다. 그가 빈털털이가 되자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고, 존엄한 인격으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쓸모없는 존재로 여겼습니다. 심원한 고립감 속에서 그는 비로소 아버지의 집을 떠올렸습니다. 그때의 심정을 나우웬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돌이켜보면, 탕자는 전 재산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인간 존재의 근원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돼지처럼 대접해주길 바라는 자신을 자각했을 때 비로소 스스로 돼지가 아니라 인간, 그것도 아버지의 아들임을 깨달았습니다.“(헨리 나우웬, <탕자의 귀향>, 최종훈 옮김, 포이에마, p.93)

• 하나님을 알자
하나님께로 돌아설 때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시지만 사랑을 강요하지는 않으십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말하면서도 마음은 멀리 떠난 백성들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하실 뿐입니다. 마치 부모가 어긋나가는 자식을 보면서 애를 끓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정욕과 탐심, 분노, 원한, 질투 등은 모두 부모님께 아픔이 됩니다. 그 마음의 아픔을 헤아릴 줄 알 때 우리는 철이 들었다고 말합니다. 세상에는 정말 철 들지 않은 이들이 많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조롱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이다“(잠 17:5a). 우리가 사람들을 함부로 대할 때 하나님은 누구보다 안타까워 하십니다. 이웃에게 보이는 냉소, 조롱, 혐오, 무시, 폭력은 다 하나님에 대한 공격입니다.

호세아는 “우리가 주님을 알자“(호 6:3)고 호소합니다. 다앗 엘로힘(daath elohim). 히브리어 다앗은 인정, 알아차림, 지식을 뜻합니다. 순간순간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신앙생활의 연수를 자랑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일평생 교회를 다녀도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이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교회 생활에는 익숙하지만 여전히 옛 사람의 옷을 벗지 못한 이들이 얼마나 딱한지 모릅니다. 가끔 불초(不肖) 신자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하나님 혹은 예수님을 닮지 못한 신자라는 말입니다. 우리 마음 씀이, 우리 행동이 우리의 고백을 배신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너를 버리려고 하여도, 나의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구나! 너를 불쌍히 여기는 애정이 나의 속에서 불길처럼 강하게 치솟아 오르는구나.“(호 11:8b)

바로 이것이 자비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 하나 얻지 못하면 우리는 헛사는 셈입니다. 예수님은 믿는 이들이 가슴에 새겨야 할 인생의 목표를 분명하게 가르치셨습니다.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눅 6:36). 자비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은 무골호인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면서 불의에 질끈 눈을 감고 산다는 말도 아닙니다. 자비는 타자의 아픔을 경감시켜주려는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비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기 위해 주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영성 신학자인 매튜 폭스는 “자비를 ‘정의하기 위해‘ 예수는 가까이 다가가서, 기름을 바르고, 상처를 싸매고, 자기의 짐승에 태우고,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는 것과 같은 행위를 포함한 이야기 전체를 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매튜 폭스, <영성-자비의 힘>, 김순현 옮김, 다산글방, p.47)고 말합니다. 자비는 그런 의미에서 정적인 개념이 아니라 역동적인 실천입니다.

10절과 11절은 사자처럼 부르짖으시는 주님의 뒤를 따라 백성들이 진군하는 이미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살 길을 찾아서 혹은 붙들려서 이집트 땅으로 갔던 사람들, 앗시리아 땅으로 갔던 사람들이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역동적인 이미지를 떠올릴 때마다 저는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이라는 그림이 떠오릅니다. 가슴을 드러낸 자유의 여신이 시신들이 뒹굴고 있는 벌판에서 앞장 서서 사람들을 이끌고 있는 그림입니다. 여신의 손에는 자유, 평등, 박애를 뜻하는 삼색기가 들려 있습니다. 그 뒤를 총과 칼을 든 사람들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을 염두에 둔 그림입니다.

출애굽 공동체를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셨던 하나님은 사자처럼 용맹하게 그의 백성들을 자비가 넘치는 세상으로 이끌고 계십니다. 바로 그곳이 우리의 마침내 돌아가야 할 고향집입니다. 지금 시련의 시간을 가까스로 견디는 분들, 하나님에게조차 잊혀진 것 같은 쓸쓸함에 사로잡힌 분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지금 비록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는 것 같다 해도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자비로운 존재가 되기 위한 여정을 계속하십시오. 입춘 무렵, 우리들의 가슴에 하늘의 신선한 바람이 깃들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2년 02월 06일 10시 33분 1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