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7. 믿음과 분별력
설교자 김기석
본문 벧후 2:1-3
설교일시 202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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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분별력
벧후 2:1-3
(2022/02/13, 주현 후 제6주)

[전에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거짓 예언자들이 일어난 것과 같이, 여러분 가운데도 거짓 교사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들은 파멸로 몰고 갈 이단을 몰래 끌어들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을 값 주고 사신 주님을 부인하고, 자기들이 받을 파멸을 재촉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들을 본받아서 방탕하게 될 것이니, 그들 때문에 진리의 길이 비방을 받게 될 것입니다. 또 그들은 탐욕에 빠져 그럴 듯한 말로 여러분의 호주머니를 털어 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그들에게 내리실 심판을 정해 놓으셨습니다. 파멸이 반드시 그들에게 닥치고 말 것입니다.]

• 봄을 기다리며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기를 빕니다. 벌써 2월의 중순입니다. 이맘때부터 저는 습관처럼 길을 걸을 때 주변을 둘러보곤 합니다. 봄 기척을 느껴보고 싶어서입니다. 버드나무에 조금씩 물이 오르면서 늘어진 가지가 연녹빛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남녘에는 벌써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나고 있다지만 서울은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공원에서 봄까치꽃이 제일 먼저 피는 자리를 암만 바라보아도 때가 이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작년에는 입춘 무렵에 노란빛 꽃망울을 내비치던 산수유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봄을 이처럼 기다리는 것은 자꾸만 움츠러들게 만드는 우리 현실이 겨울 같기 때문입니다. 오미크론의 기세가 무섭습니다. 언제 정점에 이를지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주변에 있는 이들이 확진 판정을 받아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저 올 게 왔다는 느낌 정도입니다.

대통령 선거가 채 한 달도 남지 않았습니다. 각종 의혹들이 미디어를 가득 채우고 있고, 지지하는 후보에 따라 국민들이 양분되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시대를 분별하는 지혜가 절실합니다. 검증이라는 미명하에 편집증적으로 상대편의 허물을 들춰내고 비난하고 조롱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당연한 과정이라 여기지만 그 정도가 너무 심합니다. 우리 역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숙고,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에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한 논의, 착한 사람들이 살기 쉬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건설적 논쟁 등이 보이질 않습니다. 플라톤은 철학자가 지배하는 이상국가를 제시하기도 했지만, 철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인문학적인 교양은 나라를 운영하려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합니다.

말들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쏟아지는 정보를 거르면서 참을 찾기가 참 어렵습니다. 공론장을 휘저어 흙탕물을 일으키는 이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에게 실상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사진작가인 권산 작가가 말하는 사진을 잘 찍는 방법이 떠오릅니다. 그 첫 번째가 카메라 렌즈를 닦는 것입니다. 너무나 기본적인 이야기이지만 일리가 있습니다. 우리 눈에 드리운 편견이나 선입견이라는 뿌연 먼지 혹은 비늘이 벗겨지지 않으면 참을 볼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공명정대하게 세상을 바라본다 할 수 없습니다. 서 있는 자리가 다르면 같은 대상도 달리 보이는 법입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성숙함입니다. 어쩌면 인간은 광어족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광어는 두 눈이 몸의 한 쪽에 몰려 있습니다. 어지러운 세태일수록 참을 분별하는 지혜가 절실합니다.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하늘에 길을 물어야 합니다. 신앙인은 시시때때로 하나님의 마음을 기준음으로 삼아 자기 마음을 조율하는 사람입니다. 기도야말로 그러한 조율의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바라는 바를 하나님께 청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하시려는 일이 무엇인지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 거짓 예언자들
짐승들은 자기 본능에 따라 살아갑니다. 초식 동물들에게 고통은 풀이 없거나 물을 찾을 수 없는 것이고 육식 동물들에게 쫓기는 것입니다. 풀을 뜯으면서도 귀를 쫑긋거리며 주변을 경계합니다. 육식 동물들은 사냥감이 부족하거나, 다른 동물이 자기 영역을 침범할 때 위기를 느낍니다. 사람 또한 늘 불안에 시달립니다. 삶이 불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 삶의 의미를 묻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혹은 우리의 존재가 의미가 있다고 느낄 때는 어지간한 인생의 어려움을 잘 견딥니다. 그러나 의미 없는 일에 자기 인생이 소진되고 있다고 느낄 때면 만사가 시들해지고 공허감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시간을 타고 살지만 어떤 사람은 시간에 쫓기며 삽니다. 분주함 속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을 때도 많고, 권태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래저래 삶은 힘겹습니다.

며칠 전 신문에 난 기사를 보았습니다. 지난 수 년 사이에 기독교인들 4명 중 1명이 점을 보았다더군요. 삶이 모호하다고 느끼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사람들은 누군가가 그려주는 삶의 지도를 신빙성 있게 받아들이곤 합니다. 공중파 오락 프로그램도 소위 도사라는 사람들을 출연시켜 연예인들의 사주팔자를 보여줍니다. 자막은 단순히 재미로 보는 거라고 말하지만, 연예인들은 그 도사가 하는 말을 매우 진지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입니다. 히브리서는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했지만, 떠난 것“(히 11:8)이라고 말합니다. 법궤를 멘 제사장들은 물이 넘실거리는 요단강으로 서슴없이 걸어 들어갔습니다. 베드로는 물 위를 걸으시던 주님이 “오너라!: 하고 말씀하시자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었습니다(마 14:29). 믿음이란 확실성에 근거해 사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함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불확실함을 받아들이는 힘은 물론 좋으신 하나님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입니다. 사하라 사막에 들어가 투아레그 부족과 함께 살다가 순교한 샤를 드 푸코(Charles de Foucauld, 1858-1916)의 ‘의탁의 기도‘는 늘 제 마음에 깊은 울림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몸을 당신께 맡겨드리오니 당신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저를 어떻게 하시든지 감사드릴 뿐, 저는 무엇이나 준비되어 있고 무엇이나 받아들이겠습니다.(후략)“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 11:1)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꿰뚫어보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삶으로 드러내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당신과 더불어 도래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삶으로 입증하셨습니다. 많은 이들이 거짓 예언자들에게 미혹된 채 살아갑니다. 성경에 나오는 거짓 예언자들은 대개 권력의 주변에 기생하면서 사람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그들은 다른 이들이 듣지 못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주장함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종교처럼 사탄이나 사기꾼이 암약하기에 좋은 공간이 없습니다.

초대교회도 그런 위기에 처하곤 했습니다. 사도들은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이들을 다시 율법의 멍에 아래로 이끌려는 율법주의자들과 맞서 싸워야 했습니다. 육체를 멸시할 뿐 아니라 비밀스러운 지혜를 가르친다고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과도 싸워야 했습니다. 외부의 위협이나 핍박을 견디는 것도 힘겨웠지만 내부의 적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베드로는 성경의 예언을 제멋대로 해석하면서 사람들을 오도하는 이들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주님은 니골라 당과 이세벨이 하는 일을 용납하지 말아야 하고, 발람의 가르침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새로운 집일수록 더러움이 더욱 타는 것처럼, 아름다운 것에는 추한 것들이 끼어들게 마련입니다. 발람, 니골라당, 이세벨은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살라고 가르치는 자들을 가리키는 일종의 기호입니다. 그들은 ‘좋은 게 좋은 거지‘라고 말하며 성도들을 미혹합니다. 복음의 스캔달을 제거하여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만듭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기만 하면 무슨 일이든 다 해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작은 틈이 둑을 무너지게 만드는 법입니다.

• 신앙이 교조로 대치될 때
베드로는 사람들을 파멸로 몰고 갈 이단을 몰래 끌어들이는 거짓 교사들이 등장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이들은 자기들을 값 주고 사신 주님을 부인하게 됩니다. 입술로는 주님을 공경한다고 말하면서도 삶으로는 부인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요?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마 5:20)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들이신 것처럼 서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비의 사람이라고 말하는 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주님은 세상 사람들이 겪는 슬픔과 아픔과 설움을 당신과 무관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는 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주님은 삶으로 하나님을 가리켜 보이는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여 사람들을 오도하고 지배하려는 종교 지도자들, 실상은 종교 상인에 불과한 이들에 대해 맹렬한 분노를 드러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마음으로부터 멀어질 때 기독교는 진리의 무덤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된 때부터 교회가 타락의 길을 걸었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견해입니다. 크고 화려한 바실리카 예배당에 예배드리는 이들이 카타콤베 시절의 순수하고 절실했던 믿음을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교회가 커지고 목회자들의 발언권이 커질 때가 가장 위험한 때입니다. 자기가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거나, 경세가를 자처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대중들의 박수갈채를 즐깁니다. 영혼의 전락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커질수록, 사람들의 시선이 쏠릴수록 자기 성찰을 게을리 하면 안 됩니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도 같은 사실을 지적합니다.

“모든 전통적인 종교가 지니고 있는 고질병은 괴어 있어 썩는 것이다. 안착하여 기정 사실이 되어버린 것은 무엇이거나 쉽게 부패할 수 있다. 신앙이 교조로 대치되고 자발성이 진부한 모방으로 바뀐다.“(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선집 7, <진리를 향한 열정>, 이현주 옮김, 종로서적, p.77)

괴어 썩는 것이 문제입니다. 신앙이 교조가 될 때 자유롭고 유연하고 경쾌한 복음은 굳어지게 마련입니다. 자기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 지도자연하는 이들의 가장 큰 병통입니다. 자기 이해의 첫 걸음은 자기를 의심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누구에게 속한 사람인지를 늘 재확인하고, 거기에 걸맞게 살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오도하는 이들에 대해 분노하셨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개종자 한 사람을 만들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하나가 생기면, 그를 너희보다 배나 더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마 23:15)

사람들을 개종시켜 이전보다 더 못된 사람으로 만든다는 말이 두렵게 들려옵니다. 잘 믿는다고 자처하는 이들 가운데는 시민적 상식조차 지키지 않는 이들이 많습니다. 혐오를 선동하고 편견을 강화하는 말을 서슴없이 하기도 합니다. 성찰적 지성이 작동되지 않을 때 그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집니다. 오늘의 개신교회가 이 지경이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자아가 부풀대로 부푼 이들을 영적 지도자로 받아들인 탓이 아닌가 싶습니다. 베드로는 사람들을 방탕한 길로 인도하는 “그들 때문에 진리의 길이 비방을 받게 될 것“(벧후 2:2)이라고 말합니다. 이게 오늘의 현실입니다.

• 참과 거짓 사이
그런데 베드로는 그런 거짓 교사들의 내적 동기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탐욕입니다. “그들은 탐욕에 빠져 그럴 듯한 말로 여러분의 호주머니를 털어 갈 것입니다.“(벧후 2:3) 그들은 자기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종교적 권위자 행세하고, 거기에 미혹된 이들을 통해 경제적인 이익을 취합니다. 그들은 가장 청렴한 척하기도 합니다. 그냥 청렴하면 됐지 그것을 다른 이들 앞에 나팔을 불 이유는 하나도 없는 데도 그들은 그런 진술을 통해 자기를 그럴싸하게 포장합니다.

베드로는 파멸이 반드시 그들에게 닥치고 말 것이라고 말합니다. 맥락이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의 말씀도 우리에게는 격려인 동시에 경고가 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덮어 둔 것이라고 해도 벗겨지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라 해도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마 10:26) 두려운 말씀입니다.

시절이 수상할수록 영적인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에 잇댄 채 사는 사람은 함부로 말할 수 없습니다. 자기도 오류에 빠질 수 있는 존재임을 알기에 함부로 사람들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명백한 불의에 대해서는 끝까지 저항하지만, 사람들이 연약하기에 저지르는 잘못에 대해서는 연민의 마음을 가지고 대합니다. 거짓 교사들은 사람들을 분열시킴으로 이익을 보려 합니다. 이상한 유튜버들이 자극적인 말과 영상을 통해 조회수를 올리고 후원금을 끌어 모아 제 배를 불리는 것과 유사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장벽은 허물고 사람들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려합니다. 거짓 교사들은 자기만 진리를 알고 있다고 말하지만,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자기는 진리에 이르는 길을 흔들리며 찾고 있다고 말합니다. 거짓 교사들은 우리들의 두려움을 숙주로 하여 자기 힘을 키우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두려움을 감싸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어려운 시절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하늘의 빛을 받은 사람답게 현실의 어둠을 뚫고 나가 생명과 평화의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은총이 우리를 이끌어주시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2년 02월 13일 10시 20분 28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