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 주님의 빛 안에서 걷다
설교자 김기석
본문 고후 4:1-6
설교일시 2022-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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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빛 안에서 걷다
고후 4:1-6
(2022/02/27, 산상변모주일)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어서 이 직분을 맡고 있으니,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부끄러워서 드러내지 못할 일들을 배격하였습니다. 우리는 간교하게 행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환히 드러냄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의 양심에 우리 자신을 떳떳하게 내세웁니다. 우리의 복음이 가려 있다면, 그것은 멸망하는 자들에게 가려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경우를 두고 말하면,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서,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합니다.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을 여러분의 종으로 내세웁니다. "어둠 속에 빛이 비쳐라" 하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속을 비추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 아비소스의 문이 열렸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주현절 마지막 주일이자 산상변모주일입니다. 수난의 어두운 골짜기로 들어가시기 전 주님은 제자 세 명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제자들은 거기서 해처럼 환하게 변화된 주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오늘 강단보 색이 흰색인 것은 그 사건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산은 오래 머물 곳이 아니었습니다. 산에서 내려오신 주님은 수난이 예기되는 예루살렘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셨습니다. 빛과 어둠이 몸을 맞대고 있는 셈입니다.

이 시기에 우리 마음이 가볍지 않습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세계가 격랑 속에 휘말리고 있습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동쪽 지역에 있는 돈바스의 친러 반군을 지원한다는 명목 하에 침략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전문가들은 그 전쟁의 배경으로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무산시키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유럽으로 천연가스를 공급하는 송유관 설치 문제도 아주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라고 합니다. 복잡한 국제정세의 논리를 이 거론할 수는 없지만 이 전쟁이 수많은 약자들의 삶을 볼모로 삼고 있다는 측면에서 불의합니다. 서경식 선생은 이런 싸움의 배경을 아주 간명하게 설명합니다. “과거부터 일관되게 모든 싸움의 배경에는 패권국가의 정복욕, 지배자의 권력욕, 그리고 권력에 빌붙어 막대한 이익을 탐하는 자들의 물욕이 있었다.”(한겨레신문, 2022/02/25일자 서경식 칼럼, ‘이상 없는 시대에 온전한 정신으로’ 중에서).

명분이 무엇이든 모든 전쟁은 힘이 없는 사람들의 삶을 거덜내게 마련입니다. 전쟁이 벌어지자 사랑하는 가족들이 생이별을 하고 있습니다. 외신은 아내와 자식들을 안전한 곳으로 떠나보내면서 전장에 남는 가장의 눈물겨운 모습을 담은 사진을 전송하고 있습니다. 피난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집니다. 난민들이 발생할 것이고, 무고한 이들이 죽거나 다칠 겁니다. 전쟁은 기획하고 실행하는 이들의 안전만 보장하고, 나머지는 다 위험에 빠뜨립니다. 칸트는 ‘영구평화론’이라는 글에서 “모든 국가의 원수는 전쟁을 타인의 비용, 즉 인민의 비용으로 치르기 때문에, 전쟁으로 아무런 손실도 입지 않는 국가 원수는 전쟁 수행 여부에 관한 결정권을 갖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모든 전쟁은 불의합니다. 전쟁과 폭력은 어떤 경우에도 최종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크라이나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국제적으로 연대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저는 이 전쟁의 소문을 들으면서 요한계시록 9장에 나오는 한 광경을 떠올렸습니다.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하늘에서 떨어진 별 하나가 아비소스의 열쇠를 받아 그 문을 엽니다. 큰 연기가 피어올랐고 그 연기 때문에 해와 하늘이 어두워졌습니다. 파괴의 세력인 메뚜기들이 나와 땅을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 냉전체제가 해체된 지 3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유럽은 내전의 상처를 입은 지역도 있기는 했지만 침략 전쟁이 없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그런 의미에서 세계를 다시 위험 속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국제 사회가 협력하여 조속히 전쟁을 끝내고 평화의 질서를 세워야 할 때입니다.

• 소명으로서의 평화
예언자들은 제국들이 발흥하며 세상을 전쟁터로 만들 때 평화로운 세상의 꿈을 인류 앞에 제시하곤 했습니다. 이사야 11장에 나오는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눕는 세상의 꿈이 대표적입니다.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 세상은 어처구니없는 꿈처럼 보이지만, 그 꿈조차 없다면 우리는 절망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겁니다. 이사야(2:4), 요엘(3:10), 미가(4:3) 같은 예언자들은 나라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세상, 나라와 나라가 서로를 치지 않는 세상을, 다시는 전쟁 연습을 하지 않는 세상을 꿈꿨습니다. 주님도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마 5: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화해자로, 장벽 철폐자로 부르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자기에게 주어진 사도의 직분이 하나님의 자비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비는 하나님 성품의 핵심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하나님께 속한 사람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에 연회 자격심사 위원회에 참석하여 목회자 후보생들과 면담을 했습니다. 목회자로서의 품성과 자질을 갖췄는지를 살펴보는 동시에 그들을 격려하기 위한 자리였습니다. 같은 반에 속했던 목사님 한 분은 모든 후보생들에게 ‘소명이 확실한가?’를 물었습니다. 어떤 신비한 체험을 했는지를 묻고자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소명이 위기의 시간, 유혹의 순간 그들을 지켜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깊이 공감이 가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부름 받은 이들은 순례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쉼 없이 자신을 살피고 닦아야 합니다. 방심하는 순간 우리는 세속의 물결에 휩쓸릴 수밖에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그 직분을 잘 감당하기 위해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먼저 부끄러워서 드러내지 못할 일들을 배격해야 합니다. 옛 선비들은 신독愼獨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신독이란 남이 보지 않는 곳에 혼자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도록 조심하여 말과 행동을 삼가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진실한 사람은 간교하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지 않고 오히려 진리를 드러냅니다. “우리는 진리를 환히 드러냄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의 양심에 우리 자신을 떳떳하게 내세웁니다.”(4:2b)

요즘 ‘유퀴즈’라는 오락프로그램을 통해 대중들에게 친숙해진 분이 계십니다. 프랑스 출신의 두봉 주교입니다. 그는 프랑스 오를레앙 출신으로 파리외방전교회의 파송을 받아 1954년에 한국에 왔습니다. 가난한 나라에 오게 된 것이 정말 기뻤다고 합니다. 1969년에 가톨릭 안동교구의 초대 교구장이 된 그는 내내 약자들의 편에 서서 살았습니다. 지금 90세가 넘은 그분의 해맑고 천진한 웃음소리가 네 귀를 맑게 했습니다. 어느 인터뷰에서 그는 “저는 예수님이라는 분에게 탄복한 사람입니다. 저는 예수님이라는 분에게 반한 사람입니다. 저는 예수님이라는 분에게 사로잡힌 사람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소박하지만 확고한 고백입니다. 그는 자기 삶을 돌아보며 기쁘고 떳떳하게 살았다고 말합니다. 철저한 자기 부인에 이르렀기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떳떳한 삶,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어둠의 일을 버리고 빛 가운데서 걸을 때 비로소 가능한 일입니다.

• 빛을 보고 산다는 것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복음이 가려져 있게 마련입니다. 눈이 있다고 보는 것은 아닙니다. 볼 마음이 없는 이들은 혹은 어둠이나 욕망의 비늘이 눈을 가리고 있는 이들은 진실을 볼 수 없습니다. 오로지 자기 안위에만 신경을 썼던 빌라도는 진리이신 주님을 앞에 두고도 “진리가 무엇이오?”(요 18:38) 하고 묻습니다. 이사야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백성들의 상태를 안타까워합니다(사 6:9). 그들이 그 지경이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마음이 둔하여졌기 때문입니다. ‘둔하다’고 번역된 히브리어 샤맨(saman)은 ‘살찌다’, ‘기름이 끼다’라는 뜻입니다. 마음에 살이 찌고 기름이 끼면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합니다.

똑같은 진실을 바울은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였다고 말합니다. ‘이 세상의 신’은 우리 시대를 장악하고 있는 정신 혹은 풍조를 말합니다. 어느 시대에나 그 시대 사람들을 사로잡는 정신이 있습니다. 지금은 돈이 우상화되고 있습니다. 돈이 말하는 세상입니다. 돈의 인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돈, 출세, 권력에 맛들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마련입니다.

복음은 멸망하는 자들에게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에는 희생, 나눔, 돌봄, 낮아짐, 고난이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권력의 길도 아니고 자기 확장의 길도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부인의 길입니다. 십자가는 이래저래 걸림돌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라는 책에서 괴테의 시를 인용합니다.

“장미꽃으로 촘촘히 둘러싸인 십자가가 서 있다.
누가 십자가를 장미꽃으로 장식하였는가?
그 험한 십자가를 사방으로 부드럽게 둘러싸기 위하여
花環은 부풀어지고 있다.“(몰트만,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김균진 옮김, 한국신학연구소, 1979, p.42에서 재인용)

장미꽃만 바라보면 안 됩니다. 그 틈으로 보이는 보배로운 피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는 무명이 벗겨져야 볼 것을 바로 보게 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합니다. 창세기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어졌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을 수단으로 여기는 제국의 폭력에 대한 저항 담론입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외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 고백 속에는 인간의 소명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은 하나님을 가리켜 보이는 존재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빌립의 부탁에 뭐라 대답하셨습니까?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요 14:9). 우리가 하는 말이, 사는 모습이, 우리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는지요? 약자들의 편에 서고,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고, 고통 받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모든 수고를 다하는 이들을 보며 사람들은 어렴풋이나마 하나님이 계심을 깨닫게 됩니다.

• 얼굴
태초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빛이 우리의 어두운 마음 속을 비추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참 얼굴 하나 보고 가기 위함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얼굴만 보면 세상을 잊고,
그 얼굴만 보면 나를 잊고,
시간이 오는지 가는지 모르고,
밥을 먹었는지 아니 먹었는지 모르는 얼굴,
그 얼굴만 대하면 키가 하늘에 닿는 듯하고,
그 얼굴만 대하면 가슴이 큰 바다 같애,
남을 위해 주고 싶은 맘 파도처럼 일어나고,
가슴이 그저 시원한,
그저 마주앉아 바라만 보고 싶은,
참 아름다운 얼굴은 없단 말이냐?
저 많은 얼굴들 저리 많은데
왜 그리 다 미울까, 다 더럽기만 할까!
(함석헌 전집 6, <수평선 너머> 중에 나오는 ‘얼굴’ 부분, 한길사, p.88)

변화산에 올랐던 제자들도 해처럼 빛나는 주님의 진면목을 보았습니다. 자기들과 늘 같이 동행하던 주님, 함께 걷고, 함께 음식을 나누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번민하던 주님의 모습과는 구별된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계시의 시간이었습니다. 마치 일상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가 문득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감쌀 때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귀하게 여겨지고 사랑스럽게 여겨지는 것처럼, 주님은 하늘에 속한 존재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셨습니다. 빛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실패와 배신과 버림받음의 깊은 계곡을 앞두고 주님이 그렇게 당신의 진면목을 드러내신 것은 환난의 풍랑 앞에 서게 될 제자들의 가슴에 꺼지지 않는 불꽃을 심어주시기 위한 것이었을 겁니다.

함석헌 선생님이 보고 싶어 하던 ‘참 얼굴’은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풍랑이 이는 갈릴리 호수에서 태산처럼 누워 평안히 잠자던 그 얼굴, 죽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 뿌리며 우시던 얼굴, 사람들의 호산나 찬양을 들으면서도 온유하고도 빛나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얼굴, 채찍으로 도둑 무리 내몰면서 아버지 집 더럽히지 말라시던 그 얼굴, 울고 있는 예루살렘 거리의 여인들을 보며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너희 자손들을 위해 울라 하시던 그 얼굴, 부활의 빛 아래서 밝게 빛나던 얼굴을 우리도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도 그런 얼굴을 닮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때 비로소 우리는 평화와 생명의 씨를 뿌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험한 세월입니다. 우리는 전쟁과 테러와 질병과 가난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동시에 연대하여 그 어둠을 헤쳐 나가야 합니다. 하늘의 빛을 받아야 감당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빛이 우리를 이끄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2년 02월 27일 12시 07분 10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