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 밝은 얼굴로 우리를 보소서
설교자 김기석
본문 민 6:22-27
설교일시 2022-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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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얼굴로 우리를 보소서
민 6:22-27
(2022/03/13, 사순절 제2주)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말하여라.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복을 빌 때에는 다음과 같이 빌라고 하여라. '주님께서 당신들에게 복을 주시고, 당신들을 지켜 주시며, 주님께서 당신들을 밝은 얼굴로 대하시고, 당신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님께서 당신들을 고이 보시어서, 당신들에게 평화를 주시기를 빕니다.’ 그들이 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축복하면, 내가 친히 이스라엘 자손에게 복을 주겠다."]

• 진정한 애국심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봄기운이 느껴지는 날이지만 안개와 미세먼지로 인해 주변 풍경이 흐릿하게 보입니다.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고, 그 사이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망가지고 있습니다. 백두대간을 태우던 산불은 이제 많이 잡혔지만, 산자락에 기대어 살던 이들과 피조물의 신음소리가 강산을 채우고 있습니다. 이래저래 암울한 세월입니다.

오랫동안 사람들을 들뜨게 만들었던 대통령 선거도 끝이 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기뻐하는 이들도 있지만,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다’며 탄식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함부로 하나님의 뜻 운운할 일이 아닙니다.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일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라가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소망일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방식만이 나라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은 오만입니다. 많은 이들에게 따뜻한 영감을 주는 미국의 교육학자 파커 J. 파머는 애국심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윌리엄 슬론 코핀 목사의 말을 인용합니다.

“세 부류의 애국자가 있다. 두 부류의 나쁜 애국자와 한 부류의 좋은 애국자다. 나쁜 애국자들은 무비판적 연인이자, 애정 없는 비평가다. 좋은 애국자들은 그들의 국가와 사랑싸움을 계속한다. 이들의 싸움은 신의 연인이 세계와 싸우는 방식을 반영한다.”(파커 J. 파머,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김찬호·정하린 옮김, 글항아리, p.174)

‘무비판적 연인’, ‘애정 없는 비평가’는 나쁜 애국자들입니다. 내편이니까 맹목적으로 지지하고, 내편이 아니니까 뭘 해도 나쁘게 보는 것은 애국이 아닙니다. 한쪽을 절대 선으로 상정하면 다른 쪽은 절대 악이 됩니다. 이런 분열을 가장 기뻐하는 것은 사탄일 것입니다. 좋은 애국자들은 국가와 사랑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입니다.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분별력을 가진 사람들, 분열을 가로지르며 꾸준히 일치를 모색하는 이들이 필요한 때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관계의 중심은 ‘사랑’이어야 합니다. 국가적 규모에서의 사랑 이야기가 어색할 수도 있지만, 이 때의 사랑을 저는 생명과 평화를 지향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증오와 복수심은 사회를 분열시킵니다. 사회적 약자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며칠 전 포항의 한 여대생이 타고 가던 택시 문을 열고 뛰어내렸다가 사망한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택시가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깨닫고 두려움을 느꼈던 것입니다. 여성들이 항시적으로 체험하는 공포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사실 60대의 그 운전기사는 귀가 어두워 보청기를 끼고 있었는데 목적지를 잘못 알아들었던 것이라고 합니다. 안타까운 사건입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면 그 사회의 건강과 통합 정도를 알 수 있습니다.

큰 불이 잡혔다고 하여 잔불 정리를 소홀히 하면 또 다른 불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경쟁의 마당에서 서로에게 던져졌던 날선 말들과 감정들을 거둬들여야 할 때입니다. 상대방을 조롱하거나 증오하는 일들도 그만 두어야 합니다. 광장의 열기가 가신 후에 할 일은 쟁론의 자리에 남겨진 쓰레기와 돌들을 치우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그런 성숙의 자리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진영 깨끗하게 하기
민수기는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에 병적 조사를 한 후에 벌어진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말렉과의 전투 이후 그들은 스스로 자기들을 지켜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과 동행하시지만 그들은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광야에서 진을 어떻게 편성해야 하는지, 행군할 때는 어떤 순서로 해야 할지를 정했습니다. 흩어지기 쉬운 그들을 하나로 엮어주는 것은 성막이었습니다. 성막을 세우는 일에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헌신했습니다. 그 헌신은 소속감을 창조하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조너선 색스는 성막 건설의 의미를 이렇게 말합니다. “야영지 중앙에 세워진 성막은 공공의 광장, 공공선, 그들을 공동의 자유로 이끄는 목소리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공동체의 가시적 징표로 기능했다.”(조너선 색스, <사회의 재창조>, 서대경 옮김, 말·글빛냄, p.289) 성막 안에는 언약궤가 모셔져 있었습니다. 그 언약이야말로 그들의 새로운 고향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레위인들을 성막 봉사자로 세우셨고, 그들 가운데서 제사장도 나왔습니다.

광야는 그들이 터를 잡고 살아야 하는 곳이 아니라 약속의 땅으로 가기 위한 과도기적 공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진은 늘 움직여야 했고, 진을 깨끗하게 하는 일은 공동체 전체를 위해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민수기 5장과 6장은 진을 깨끗하게 하는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청소나 방역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한 공동체를 더럽히고 허물 수도 있는 일들을 미연에 방지하거나, 사후에 처리하는 문제였습니다. 부정한 사람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어떻게 처벌해야 할지, 간음을 저지른 이들을 어떻게 징계해야 할지가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정한 사람이라는 말은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좀 문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고대세계는 늘 정결과 불결을 나누었습니다. 외부자들과 그 사회의 하층민은 늘 부정한 사람으로 분류되었습니다. 정결과 불결이라는 기준이 어떤 집단을 배제하는 데 사용되었다는 말입니다. 일종의 ‘낙인찍기’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인도 사회에 불가촉천민으로 취급받는 이들이 있음을 압니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불결하고 더러운 사람 취급 받습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받았던 차별의 역사도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불결함은 다른 민족이나 특정한 집단을 배제하기 위한 개념이 아닙니다. 피부병이나 신체적인 유출병 혹은 시체를 만진 이들은 감염을 통해 공동체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었기 때문에 잠시 격리의 시간을 가져야 했습니다. 그들은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치유되어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회복될 때까지 진영 밖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팬데믹 상황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일입니다. 격리는 일종의 경계선을 만들어 공동체를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이번 동해안에 번진 큰 산불로 숲과 많은 집들이 불에 탔지만 끝까지 불길을 이겨낸 집들도 있었습니다. 커다란 물탱크를 미리 준비했던 집들입니다. 그들은 집과 주변 숲에 물을 흥건하게 뿌려 경계선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제의적 경건도 사회 전체의 오염을 막기 위한 조치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진영을 깨끗하게 하는 일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남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이 피해자에게 원금은 물론이고 배상 혹은 보상을 해야 한다는 대목입니다. 억울한 피해자가 없어져야 사회는 건강해집니다. 율법은 피해자가 죽고 친척도 없을 때는 제사장에게 보상액을 지불하라고 말합니다. 이웃에게 저지른 죄는 공동체 전체의 건강과 안전을 위협하는 일인 동시에 하나님께 지은 죄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 복과 보호
진영을 깨끗하게 하는 이야기가 끝나는 지점에 등장하는 것이 바로 ‘아론의 축복’으로 알려진 오늘의 본문입니다. 24절부터 26절까지 이어지는 축복문은 간결하지만 매우 아름답고 심오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히브리어 글자 수입니다. 24절은 세 단어로 되어 있고, 25절은 다섯 단어, 그리고 26절은 일곱 단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말 번역으로는 그 맛을 보기 어렵습니다만 이것은 매우 의도적으로 구성된 문장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이 마치 물결처럼 퍼져가는 모습을 언어적으로 구현한 것처럼 보입니다. 유럽에 있는 유서 깊은 예배당 앞 포석이 물결무늬를 이룬 것을 보신 분들이 계실 겁니다.

각 절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전반부가 하나님의 은총이 어떻게 작동되는지를 보여준다면 후반부는 그 은총의 결과를 보여줍니다. 복 주심이 지켜 주심으로 이어지고, 밝은 얼굴로 대하심이 은혜를 베푸심으로 연결되고, 고이 보심이 평화라는 열매로 맺힙니다. 제사장들의 중요한 직무 가운데 하나가 백성들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힘겹게 사는 사람들,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고 사는 사람들, 팍팍한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기를 비는 일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일이 아닐까요?

몇 해 전 떼제 공동체에 갔을 때가 떠오릅니다. 하루에 세 번씩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는 그 시간이 참 좋았습니다. 어느 날은 기도회가 다 끝났는데도 사람들이 흩어지지 않고 한 찬양을 끝없이 반복했습니다. “주님 너를 고치시며 외면치 않으시네 주님 너를 찾으러 오시네 만나러 오시네”(Il Signore ti ristora).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의 고백에 곡을 붙인 노래입니다. 지금도 귀에 ‘일 시뇨레 티 리스토라’라는 노랫말이 귀에 쟁쟁하게 울리는 것 같습니다. 찬양을 반복하면서 사람들은 국적, 성별, 피부색, 연령의 모든 차이를 넘어 하나됨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놀라운 회복과 치유의 시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몸과 마음에 난 상처와 아픈 기억들, 미래에 대한 불안, 외로움과 두려움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분의 손길을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경계가 무너진 일치의 자리였습니다. 제사장의 축복도 백성들을 그런 자리로 인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그런 복을 주시기를 빕니다.

복을 뜻하는 히브리어 ‘바라크’(barak)는 굉장히 다양한 의미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그 단어와 결합하는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후손’, ‘땅’, ‘건강’, ‘하나님의 지속적인 임재’, ‘삶을 위해 필요한 것들’이 그것입니다. 바라크라는 단어의 기본 의미는 ‘무릎을 꿇다’입니다. 진실과 거룩함 앞에 무릎을 꿇을 줄 아는 이가 복 받은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복을 원하십니까? 저는 무엇보다도 우리 삶이 사랑의 빚임을 깨닫고, 그 빚을 갚으며 살고 싶은 열망이 우리 속에서 샘솟듯 솟아나오기를 빕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작은 일에도 만족하며 기뻐하며 사는 복을 달라고 청합니다. 홀로 만족하는 삶이 아니라 함께 기뻐하는 삶을 지향하고, 절제된 삶을 살면서도 삶의 풍요로움을 느낄 줄 아는 복을 달라고 청합니다. 하나님의 복을 누릴 때 우리 삶은 든든해집니다.

• 평화 만들기
“주님께서 당신들을 밝은 얼굴로 대하시고, 당신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며”(25). 우리가 어떻게 살 때 주님의 얼굴이 밝아지실까요? 간단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맞갖게 살 때 주님은 밝은 얼굴로 우리를 대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을 때 일어난 일을 잘 압니다. 주님은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막 1:11) 여기서 ‘좋아한다’는 말은 ‘좋다고 여기다’, ‘마음이 넉넉하다’, ‘승인하다’는 뜻을 거느린 유다케오(eudokeo)를 번역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떤 점이 하나님의 마음에 든 것일까요? 다른 것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귀히 여기고, 그들의 생명을 풍성하게 만들고 싶어했던 그 마음이 아닐까요? 주님의 밝은 얼굴과 만나고 싶은 사람은 지금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얼굴빛은 밝아질 겁니다.

옛말에 순천자흥順天者興 역천자망逆天者亡이란 말이 있습니다. 하늘의 뜻에 순응하며 사는 사람은 흥할 것이고, 하늘의 뜻을 거스르며 사는 삶은 성공한 듯 보여도 결국은 망하고 만다는 뜻일 겁니다. 26절에 나오는 “주님께서 당신들을 고이 보시어서”라는 구절은 25절에 나오는 “주님께서 당신들을 밝은 얼굴로 대하시고”와 연결됩니다. 고이 보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이 대목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얼굴을 숨기신다는 말과 대조됩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이방 신들과 더불어 음란한 짓을 하고, 하나님을 버리고, 주님과 세운 언약을 깨뜨릴 때 당신의 얼굴을 숨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신 31:18). 그렇기에 ‘주님께서 당신들을 고이 보시어서’라는 구절은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고, 그 언약을 철저히 지키라는 권고이기도 합니다.

그때 주어지는 복이 바로 평화입니다. 여러 차례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만 샬롬은 평화보다는 안녕에 가깝습니다. 샬롬이라는 단어와 결합되는 이미지는 실로 다양합니다. ‘후손’, ‘건강’, ‘가족 간의 화목’, ‘무사함’, ‘우정’, ‘마음의 평안’ 등이 그것입니다. 물론 전쟁이 없는 상태도 포함합니다. 혼돈의 시대를 살던 시인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갈 새로운 세상의 모습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사랑과 진실이 만나고, 정의는 평화와 서로 입을 맞춘다.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는 하늘에서 굽어본다”(시 85:10-11). 갈등과 분열을 넘어 평화를 지향할 용기가 우리에게 있기를 빕니다.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지키시고, 밝은 얼굴로 우리를 대하시고, 우리를 고이 보아주시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2년 03월 13일 10시 27분 30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