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 일꾼이 받을 삯
설교자 김기석
본문 고전 9:13-18
설교일시 2022-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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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꾼이 받을 삯
고전 9:13-18
(2022/03/20, 사순절 제3주)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고, 제단을 맡아보는 사람은 제단 제물을 나누어 가진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이와 같이 주님께서도,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을 전하는 일로 살아가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런 권리를 조금도 행사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또 나에게 그렇게 하여 달라고 이 말을 쓰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하느니, 차라리 내가 죽는 편이 낫겠습니다. 아무도 나의 이 자랑거리를 헛되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것을 해야만 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 내가 자진해서 이 일을 하면 삯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마지못해서 하면, 직무를 따라 한 것입니다. 그리하면 내가 받을 삯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을 전하는 데에 따르는 나의 권리를 이용하지 않는다는 그 사실입니다.]

• 바울 윤리의 두 가지 기준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사순절 셋째 주일입니다. 내일이면 벌써 춘분입니다. 꽃샘추위가 남아 있다고는 해도 봄기운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굳은 지각을 뚫고 나오는 새싹들이 아름답습니다. 인간 세상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자연은 자기 할 일을 무심하게 해내고 있습니다. 그 한결같음이 참 고맙습니다. 물론 자연의 리듬이 많이 깨진 것도 사실이지만, 아직 완전히 망가진 것은 아닙니다. 코로나 확진자가 늘어 걱정이지만 거의 정점에 도달했다는 방역 당국의 말이 사실이기만을 빌고 있습니다. 교우들 가운데도 많은 분들이 고생하고 계십니다.

많은 이들이 제게 교회에 미래가 있겠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때마다 저는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도 대답을 듣기 원하는 분들에게는 무책임한 말을 하곤 합니다. “무너져야 할 것은 무너지겠지요. 그러나 살아 있는 것은 살아남을 겁니다.” 이런 대답의 이면에는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통해 바룩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서기였던 바룩은 민족의 장래에 대해 깊은 상실감과 우울함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나 주가 말한다. 나는, 내가 세운 것을 헐기도 하고, 내가 심은 것을 뽑기도 한다. 온 세상을 내가 이렇게 다스리거늘, 네가 이제 큰일을 찾고 있느냐? 그만 두어라”(렘 45:4b-5a).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지금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을 꼭 붙들면 그만입니다. 길을 찾기 위해 바울의 지혜를 빌려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바울은 초대 교회가 직면하고 있던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신학적 해답을 제시해야 했습니다. 모든 경우에 들어맞는 정답은 없습니다. 바울은 고심합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하나님 나라 지향’,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칭의’ 등이 그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디아포라’라 합니다. 성경이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심이 굳건하면 그 다음에는 상황에 맞게 답을 조정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신학에서는 그런 것을 일러 ‘아디아포라(adiaphora)’라고 말합니다. 우상 앞에 바쳐졌던 제물을 먹는 문제 같은 것이 그러합니다. 믿음이 확고한 사람은 그것을 먹어도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직 믿음이 연약한 이들이 그것을 보고 시험에 빠진다면 기꺼이 포기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근본은 확고하게 붙들어야 하지만 모호한 상황에서 성도들이 취해야 할 윤리적 기준을 몇 가지 제시합니다. 첫째는 자기 행동이 교회에 덕을 세우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바울 서신 도처에서 우리는 ‘덕을 세운다’는 구절과 만납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고전 8:1)
”'모든 것이 다 허용된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모든 것이 다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다 허용된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모든 것이 다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닙니다.“(고전 10:23)
“나쁜 말은 입 밖에 내지 말고, 덕을 세우는 데에 필요한 말이 있으면, 적절한 때에 해서, 듣는 사람에게 은혜가 되게 하십시오.”(엡 4:29)

다른 하나는 특권의 포기입니다. 바울은 사도들이 성도들의 도움을 받아 사는 일은 당연한 일이라고 여깁니다.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일꾼이 자기 삯을 받는 것은 비난받아야 할 일이 아닙니다. 바울은 베드로가 아내를 동반하고 다녔던 것처럼 자기도 그럴 권리가 왜 없겠느냐고 말합니다. 말씀 전하는 일에 전념하기 위해 장막 만드는 일을 그만 두어도 무방하지 않겠느냐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혹시 아직 믿음의 깊이에 당도하지 못한 이들이 시험에 들지 않을까 하여 그는 자기 권리를 내려놓고 스스로 노동하며 살았습니다. 물론 그는 다른 교회의 후원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 두 가지 기준은 모두 여린 영혼들에 대한 깊은 사랑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 직무를 따라 한 일
바울은 자기가 청렴하다고 자랑하기 위해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자기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건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조금 당황스럽습니다. 그 귀한 일을 어쩔 수 없어서 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일평생 목사가 된 것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나는 시시때때로 ‘내가 목사가 아니었다면’ 하고 상상의 나래를 폅니다. 말씀을 전하는 이로 사는 것은 참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어떤 때는 달아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할 말이 없을 때도 말해야 한다는 것처럼 무거운 일이 또 있을까요? 사람들이 달갑게 듣지 않는 메시지를 전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예레미야도 말씀 전하는 자로서의 삶에 깊은 회의를 느낀 때가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된 자기 신세를 한탄합니다. 입을 열어 말할 때마다 ‘폭력’을 고발하고, ‘파멸’을 외치자 가까운 사람들도 하나 둘 떨어져 나가 외톨이가 되었고, 더 나아가 치욕과 모욕거리가 되고 말았다고 탄식합니다. 너무 힘들어서 그는 ‘이제는 주님을 말하지 않겠다. 다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 하고 결심해 보지만 그렇게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 때마다 주님의 말씀이 나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에까지 타들어 가니, 나는 견디다 못해 그만 항복하고 맙니다.”(렘 20:9b)

사도 바울이 견디기 어려운 시련을 겪으면서도 그 일을 그만 둘 수 없었던 것도 자기 속에서 타오르는 그 뜨거운 불길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은 ‘마지못해서’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내키지는 않으나 사정에 따라서 아니 하려야 아니 할 수가 없다’는 뜻이니 딱히 번역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오해의 소지는 있는 번역입니다. 자의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도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한 말입니다. 그것은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에게 주어지는 삯은 무엇이었을까요? 바울은 복음을 값없이 전한다는 것, 자기가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내려놓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가 받는 삯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권리를 내려놓는 대신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누렸습니다.

• 초기 선교사들
저는 며칠 전 홀로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다녀왔습니다. 합정역에서 조금 걸으면 절두산 성지 옆에 있는 이 묘원을 방문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는 이 땅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많은 선교사들이 묻혀 있습니다. 한적한 그 묘원을 찾아간 것은 감리교 선교사인 스크랜튼 서거 100주년을 맞아 그의 삶을 추모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다 알지는 못하지만 묘지명(墓誌銘)에 적힌 이름을 하나하나 살피면서 그들이 감당했던 아름다운 역할과 기여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낯선 이 땅에 와서 혼신의 힘을 다하여 복음을 전하고 민족사에 기여했던 그들의 땀과 눈물이 떠올라 가슴 한 구석이 뻐근해졌습니다. 어떤 열정이 그들을 이 가난하고 혼란스럽던 나라로 보낸 것일까요?

한국 감리교의 선교는 1885년에 교육선교사 아펜젤러(H.G. Appenzeller)에 이어 한 달 후 의료선교사 스크랜튼(W. B. Scranton, 1856-1922) 입국하고, 며칠 후 스크랜튼 대부인(Mary Scranton)이 입국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스크랜튼은 예일대학교를 졸업한 후 뉴욕의과대학에 들어가 의사면허를 딴 후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에서 개업의로 활동하던 사람입니다. 그는 한국에 의료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고 신학을 공부하여 안수를 받고 1885년 5월 1일에 이 땅에 들어왔습니다. 미국 공사관 근처인 정동에 기지를 마련하고 선교에 착수했습니다. 그는 그 전 해에 미국 공사관 소속 의사 자격으로 들어온 알렌이 만든 최초의 서양식 병원 ‘광혜원’(廣惠院)에서 잠시 함께 일했습니다. 광혜원은 나중에 제중원(濟衆院)으로 이름을 바꿨고, 나중에 미국인 사업가 세브란스(l.H. Severence)의 건축 기금으로 남대문 밖에 새 건물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스크랜튼은 1885년 9월 10일, 정동에서 민간 의료 기관으로 진료소를 시작했고, 그 이듬해 새 건물을 마련하고 정식 병원을 설립했습니다. 그 병원이 바로 시병원(施病院)입니다. 시병원의 최초의 환자 중에는 풍토병에 걸려 서대문 성벽에 팽개쳐진 여인과 그의 네 살박이 딸도 있었다고 합니다. 스크랜튼은 버림받은 민간 환자들을 진료하는 데 정성을 다했습니다. 1886년에 그가 보낸 선교 보고서에는 당시 그들의 형편을 짐작하게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가 상대해서 일한 사람들은 거의가 극빈자들이었으며 종종 버림받은 자들도 돌보아 주어야 했습니다. 특히 버림받은 사람들은 그 몸의 상태가 도저히 일할 수 없는 형편이 되었을 경우엔 치료받는 동안에 생활비 전체를 우리가 부담해야만 했습니다.”(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기독교의 역사 1>, 기독교문사, p.195)

스크랜튼은 적극적으로 민중 계층과 접촉하기 위해 궁궐과 외국 공사관이 즐비한 정동을 떠나 1894년 남대문 근처 빈민지역인 상동으로 병원을 옮겼습니다. 상동은 그의 표현대로 ‘민중이 있는 곳’(where people is)이었던 것입니다. 스크랜튼 대부인은 여성들을 위한 병원의 필요성을 느끼고 미국선교부에 여성 의료 선교사 파송을 요청하였고, 1887년10월에 내한한 하워드(M. Howard)가 이화학당 내에 여성 전용 병원을 세웠습니다. 나중에 그 병원은 보구녀관(普救女館)이란 이름이 붙었고, 이 병원이 바로 서울 이대병원의 전신입니다. 스크랜튼 부인은 1886년 5월 31일 이화여학당을 시작하기도 했습니다. 동기와 형태는 다를지 몰라도 이분들의 마음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어떻게 될까요? 캐나다 출신의 의료 선교사인 윌리엄 제임스 홀의 묘비명 맨 아래에 적혀 있는 성경 구절로 다 설명이 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whether we live, or die, we are the Lord‘s/롬 14:8)

• 교회에 희망은 있는가?
‘다시금 교회에 희망이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미국 신학자인 존 캅은 한국교회의 놀라운 양적 성장의 원인을 한 마디로 정리한 바 있습니다. 민족사의 위기 때마다 백성들과 함께 하며 길을 제시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구한말부터 일제 강점기 그리고 전쟁과 그 이후 시대에 교회는 사람들의 아픔이 있는 자리에 늘 함께 있었습니다. 성경을 우리 말로 번역하여 보급하고 찬미가를 보급함으로 한글문화를 창출하는 데도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원로 문학비평가인 염무웅 선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신·구 기독교가 한국사회의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매개 역할을 하게 됨에 따라 성경번역과 우리말 찬송가의 보급은 한국인의 언어적·정서적 재구조화에 있어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염무웅, <한국 현대시>, 사무사책방, p.42-43)

우리 개화기의 선각자들은 대개 기독교를 통해 서양 문물을 접한 분들이었습니다. 교회가 있어야 할 자리는 바로 사회적 약자들이 있는 곳입니다. 편안한 삶의 자리를 떠나 고생과 위험이 기다리고 있는 이 땅에 와서 땀을 흘린 이들을 생각하면 오늘의 교회 현실이 참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지금이라도 교회는 기득권의 입장을 내려놓고 세상에서 짓밟힌 이들의 편에 서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는 비로소 그리스도의 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사서 고생하는 것이라지요? 그런데 그것은 고생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평안과 자유를 누리기 때문입니다. 타고르의 시가 그런 경험을 잘 표현해주는 것 같습니다.

“나는 이 세계의 축제에 초대받았고 그래서 내 생명은 축복받았습니다. 내 눈은 보았고 내 귀는 들었습니다. 이 향연에서 내 맡은 일은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었고 또 나는 내 힘껏 연주했습니다. 이제 보십시오. 내가 들어가서 당신의 얼굴을 보고 당신에게 침묵의 인사를 드릴 때가 마침내 오지 않았습니까?”(타고르 <기탄잘리>, 김병익 옮김, 민음사, p.31)

스크랜튼은 1922년 3월 23일 일본 고베에서 억압받은 한국 노동자들을 돌보다가 외로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지금 이 땅의 교회는 그들의 희생 위에 서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그 빚을 갚는 마음으로 살아야하겠습니다. 형편이 어려운 나라에서 복음을 전하는 이들을 귀히 여기고, 난민이 되어 떠도는 이들을 귀한 손님으로 맞이하고, 우리 사회의 땅끝에 선 이들의 설 땅이 되어줄 때 교회는 살아날 것입니다. 교회에 희망이 있나 없나를 따지기 전에 우리가 교회답게 바로 서야 합니다. 봄 기운이 만물을 깨우는 것처럼 성령께서 이 척박한 대지와 우리들의 마음 속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어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2년 03월 20일 12시 19분 15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