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26. 명랑한 수인(囚人)
설교자 김기석
본문 행26:24-29
설교일시 2018/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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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한 수인(囚人)
행26:24-29
(2018/07/01, 성령 강림 후 제6주)

[바울이 이렇게 변호하니, 베스도가 큰소리로 “바울아, 네가 미쳤구나.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였구나” 하고 말하였다. 그 때에 바울이 대답하였다. “베스도 총독님, 나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나는 맑은 정신으로 참말을 하고 있습니다. 임금님께서는 이 일을 잘 알고 계시므로, 내가 임금님께 거리낌없이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한 구석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므로, 임금님께서는 그 어느 사실 하나라도 모르실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그립바 임금님, 예언자들을 믿으십니까? 믿으시는 줄 압니다.” 그러자 아그립바 왕이 바울에게 말하였다. “그대가 짧은 말로 나를 설복해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고 하는가?” 바울이 대답하였다. “짧거나 길거나 간에, 나는 임금님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고 있는 모든 사람이, 이렇게 결박을 당한 것 외에는, 꼭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빕니다.”]

∙우연인가, 소명인가?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기원합니다. 인생은 참 신비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태어났고, 안간힘을 다하며 시간 여행자로 살다가, 때가 이르면 모든 것을 버려두고 떠나야 합니다. 살아온 날을 돌이켜 보면 마치 꿈을 꾼 것 같기도 합니다. 장자는 꿈에 나비가 되어 놀다가 깬 뒤에 자기가 나비 꿈을 꾼 것인지 나비가 장자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모를 지경이었다고 말합니다. 이게 그 유명한 호접몽胡蝶夢 이야기입니다. 남가일몽南柯一夢이라는 고사도 떠오릅니다. 남쪽으로 뻗은 나뭇가지 밑에서 꾼 꿈이라는 뜻의 이 고사는 당나라 덕종 때 양자강 하류에 살던 순우분이라는 사람의 경험을 들려줍니다. 어느 날 그는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다가 느티나무 아래에서 낮잠에 들었습니다. 꿈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 왕의 명령이라며 그를 재상으로 임명했습니다. 공주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기도 했습니다. 행복도 잠시 전쟁이 일어나 모든 것을 잃었고 아내인 공주도 죽었습니다. 허망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문득 눈을 뜨자 해는 아직 다 기울지 않았고, 진짜 아내는 마당을 쓸고 있었고, 술주전자도 그대로 있었습니다. 이 고사는 우리가 느끼는 기쁨도 슬픔도 어쩌면 꿈처럼 허망한 것인지도 모른다고 가르칩니다. 어쩌면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은 살라는 명령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살라는 구체적인 지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암중모색하며 살아갑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우리 인생에는 특별한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우리 삶의 방향을 결정짓거나 돌이키게 한 일들 말입니다. 만해 한용운은 ‘님의 침묵’에서 그런 경험을 인상 깊게 표현했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제게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삶의 허망함에 지쳐 어쩔 줄 몰라 하며 방황하던 1976년 2월 어느 날 제 귀에 들려온 교회 종소리는 제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종소리에 이끌려 찾아간 교회에서 저는 예수님과 만났고, 인생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잿빛으로 물들어 버겁기만 하던 인생이 돌연 밝아졌습니다. 삶의 문 밖에 서성거리고 있던 제가 문 안으로 받아들여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우연히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인생은 소명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어 우리가 세상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 일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 인생의 과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생명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잔뜩 주눅을 들어 살아가는 이들을 일으켜 세워 역사의 주체가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와 만난 사람들은 모두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 버림으로 얻는 자유
바울의 생은 드라마틱합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그 시대 사람들의 인습적인 가치관에 매인 채 살아갔습니다. 잘 나가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사회적 자본을 만드는 일에도 열성을 보였습니다. 그는 로마 시민이었고, 바리새파에 속했고, 당대의 가장 유명한 랍비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공부했고, 종교적 열심에 있어서 동년배들을 능가했습니다. 그는 자기들의 전통을 뒤흔드는 불온한 이들 곧 예수를 따르는 이들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박해하는 일에 열정적으로 동참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운명의 날이 다가왔습니다. 기독교인들을 색출하기 위해 다마스커스로 가다가 ‘그 빛’과 만난 것입니다. 신비한 빛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신 예수님은 박해받는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셨습니다. 그 빛과 만난 바울은 며칠 동안 앞을 볼 수 없었습니다. 캄캄한 어둠이 그를 뒤덮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안다고 생각했던 세상이 그에게 낯선 곳으로 변했습니다. 삶의 토대가 무너진 것 같았습니다. 맹목적인 열정, 종교적 열심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가 처해 있던 그 깊은 어둠은 요나가 머물던 물고기 뱃속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는 그 어둠 속에서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자기 속에 빛이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지금까지 안다 하던 것이 무지였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했던 일이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임을 말입니다. 아나니아의 도움으로 시력을 회복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그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삶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갈2:20)

부활하신 주님과 만난 후 그의 삶은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습니다. 박해하던 사람이 박해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그의 삶이 비참해진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가 겪었던 박해와 시련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얻어맞고, 정처 없이 떠돌아 다녀야 했습니다. 세상의 쓰레기처럼 되고, 만물의 찌꺼기 취급을 받기도 했습니다(고전4:11-13). 고린도후서 11장 23절 이하에는 그가 감내해야 했던 온갖 박해가 다 나열되어 있습니다. 그가 겪은 일 중에 하나라도 겪는다면 우리는 당장 하나님께 볼멘소리를 내뱉거나 그 길에서 달아날지도 모릅니다. 그는 왜 온갖 박해와 위험을 자초하는 삶을 택했던 것일까요?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사로잡힌 사람 곧 하나님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끼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접속하고 나니 지금껏 추구해왔던 인생의 목표가 부질없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것들은 한결같이 그를 부자유의 길로 인도했습니다. 남을 의식하고 사는 삶, 남과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삶의 결국은 영혼의 목마름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앞서 걸으신 그 길, 하나님의 마음과 잇댄 삶은 달랐습니다. 시련과 고통이 따랐지만 정신은 점점 더 맑아졌고, 가야 할 길은 더욱 또렷하게 보였습니다. 이전에 그렇게도 애집하던 것들은 무가치한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주님은 값진 진주를 발견한 상인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그 진주를 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그 말씀에 가장 부합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가장 값진 것, 그리스도를 알고 또 그 안에서 발견되기를 바랐기에 이전에 좋아하던 모든 것들을 오물처럼 버렸습니다(빌3:8). 버리지 않으면 얻을 수 없습니다. 그는 자기를 치장해주던 모든 사회적 자본을 버림으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 증언자로 서다
오늘 본문은 바람처럼 떠돌며 세상에 복음을 전하던 바울이 갇힌 자(囚人)가 되었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바울은 로마가 지배하고 있던 지중해 세계를 종횡으로 누비면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했습니다. 세 번에 걸친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그는 유대인들의 모함으로 체포되고 맙니다. 체포된 후에도 바울은 증언자로서의 사명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병영에 끌려 들어갈 때도, 의회 앞에 섰을 때도, 사람들에게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했습니다. 그의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꽉 차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속에 있는 것을 바깥으로 내놓는 법입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바울을 죽이려던 유대인들의 음모를 차단한 것은 이방인인 천부장이었습니다. 아이러니입니다. 그는 바울을 가이사랴에 주재하고 있던 총독 벨릭스에게 보냅니다.

닷새 뒤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더둘로라는 변호사를 대동하고 와서 총독에게 바울을 모함합니다. “우리가 본 바로는, 이 자는 염병 같은 자요, 온 세계에 있는 모든 유대 사람에게 소란을 일으키는 자요, 나사렛 도당의 우두머리입니다. 그가 성전까지도 더럽히려고 하므로, 우리는 그를 붙잡았습니다.”(행24:5-6) 마치 바울이 혁명을 획책하는 사람처럼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총독은 바울에게 자기 변론의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바울은 자기는 모함을 당하고 있다고 설득력있게 말합니다. 바울의 말을 들은 벨릭스는 서둘러 청문회를 종결하고 바울을 감옥에 가뒀습니다. 바울의 무죄함을 알면서도 유대인들과 척지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가끔 바울을 따로 불러내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곤 했습니다.

그렇게 두 해가 지나고 새로운 총독 베스도가 부임했습니다. 그가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교의 원로들과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을 때, 성전 체제의 유력자들은 총독에게 바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서 그를 예루살렘으로 불러 올리라고 청합니다. 노중에 사람을 매복시켰다가 죽이려는 것이었습니다. 눈치 빠른 베스도는 그들의 음모를 알아차리고는, 차라리 고소인들이 가이사랴에 가서 정식 재판을 진행하자고 역제안을 합니다. 마침내 가이사랴에 법정이 섰습니다. 고소인들은 바울이 군중을 선동하여 폭동을 유도하였고 가이사에게 반기를 들려 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가 성전을 더럽혔다고도 말합니다.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인데, 그들은 바울의 가르침을 제멋대로 곡해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기득권의 토대를 뒤흔드는 사람에 대한 증오심은 이렇게 집요합니다. 그들은 국가의 질서를 지키고 또 신앙의 순수성과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는 바울을 제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명분은 그럴듯하지만 실제로 그들이 지키려는 것은 자기들의 이익일 뿐입니다. 손익계산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는 순간 신앙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마는 법입니다. 존 웨슬리는 돈 지갑이 회심하기 전까지는 진짜 회심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참으로 적확한 말입니다. 베스도는 바울에게도 자기 변론의 기회를 부여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들의 증언이 거짓임을 지적하는 동시에 황제에게 상소한다고 선언합니다.

베스도는 바울을 황제에게 보내기 전에 그의 죄목을 특정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마땅한 죄를 찾기 어려웠습니다. 그런 일로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그의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아그립바 왕과 그의 누이인 버니게가 가이사랴에 왔습니다. 베스도는 팔레스타인 사정에 정통한 그들의 도움을 받고 싶어합니다. 아그립바도 그 일에 흥미를 보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왕과 총독 그리고 장교들과 요인들이 모인 자리로 소환됩니다. 바울은 그 엄위한 자리에 서서도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삶의 내력을 들려줍니다. 그 이야기는 곧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었습니다. 바울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고 예수 믿는 자들을 박해하던 자기의 과거로부터 시작하여 부활하신 주님과 만난 이야기, 그리고 이방인의 사도로서 살았던 이야기를 다 들려준 후에, 예수야말로 모세와 선지자들이 증언한 바로 그분, 곧 고난을 당하지만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세상의 빛이 되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 범접할 수 없는 자유
베스도에게 고난의 신비는 아직 낯선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많은 학문이 그를 미치게 한 것 같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기가 맑은 정신으로 참말을 하고 있다면서, 아그립바 왕은 그동안 갈릴리와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일을 다 알 것이라면서, 그 모든 일이 예언자들의 예언의 성취라고 말합니다. 긍정하자니 뒷감당할 자신이 없고, 부정하자니 옹색해질 것 같자 아그립바는 “그대가 짧은 말로 나를 설복해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고 하는가!”라고 엉너리칩니다. 그 때 바울이 한 말이 놀랍습니다.

“짧거나 길거나 간에, 나는 임금님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고 있는 모든 사람이, 이렇게 결박을 당한 것 외에는, 꼭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빕니다.”(26:29)

기가 막힌 말입니다. 한껏 위엄을 갖추고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 무엇 하나 부족한 것 없이 누리고 싶은 것을 다 누리고 사는 사람들 곧 인생의 정점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두 해를 죄수로 살아온 사람이 한 말입니다. 인습적인 지혜는 더 이상 작동되지 않습니다. 누가 자유인이고 누가 죄수인지 알 수 없습니다. 결박을 당한 것이 행복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건 쓰라린 일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쓰라림 때문에 자유를 포기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출세를 위해 양심을 버릴 수도 없고, 호의호식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외면할 수도 없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해서만 무언가 할 수 있습니다”(고후13:8)라고 말합니다. 이 말 한 마디를 할 수 있었기에 그는 진정 자유인입니다. 그래서 나는 바울을 명랑한 수인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갇혀 있지만 그는 자유인입니다. 정신이 짓눌리지 않았기에 그는 명랑하게 예수를 전합니다.

우리가 진정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라면 이런 자부심을 품어야 합니다. 예수로 인해 손해를 본다 해도 결단코 후회하지 않는 정신의 크기를 갖춰야 합니다.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소설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에 나오는 작중 인물인 토르시의 본당신부가 한 말이 큰 울림이 되어 다가옵니다. “하느님의 말씀! 그건 벌겋게 단 쇠일세. 그런데 그 진리를 가르치는 자네는 손으로 덥석 움켜쥐지 않고 화상을 입을까 봐 부젓가락으로 그걸 집으려 들 텐가?“(p.80) 오늘 우리는 어떤 신자입니까? ‘벌겋게 단 쇠‘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화상을 입는 한이 있더라도 덥석 손으로 움켜쥐려 할 때 하늘의 자유가 우리에게 유입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작은 나로부터 벗어나 공적 세계에 대한 책임의 자리로 인도합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의 꿈에 동참하는 사람들입니다. 새롭게 시작되는 올해의 하반기에 우리의 믿음이 더욱 깊어지고 넓어질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8년 09월 18일 09시 47분 44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