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2.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설교자 김기석
본문 마 9:14-17
설교일시 2019/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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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마9:14-17
(2019/01/13, 주현 후 제1주)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물었다. "우리와 바리새파 사람은 자주 금식을 하는데, 왜 선생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혼인 잔치의 손님들이 신랑이 자기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터이니, 그 때에는 그들이 금식할 것이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다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새로 댄 조각이 그 옷을 당겨서, 더욱더 크게 찢어진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가죽 부대가 터져서, 포도주는 쏟아지고, 가죽 부대는 못 쓰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담아야 둘 다 보존된다."]

∙질문, 새로운 인식의 통로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라는 목표를 정하고 달려온 지 벌써 두 주가 되었습니다. 일상 가운데서 잘 실천하고 계신지요? 지난 금요일 아침에는 기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파인텍 노사 협상이 타결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426일 동안 75m 높이의 굴뚝에 머물던 이들이 내려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약자들의 소리를 사람들이 모른 척 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야고보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약1:27)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신앙생활의 목표는 둘입니다.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아주는 것과 이 시대의 풍조를 따르지 않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자꾸만 우리 삶을 말씀의 빛 앞에 세워야 합니다. 신앙이 습관이 되지 않으려면 순간순간 하나님의 마음과 접속하려는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철학의 출발은 ‘놀람’이라고 말합니다. 당연의 세계는 우리에게 의문을 품게 하지 않습니다. 당연의 세계는 그저 그곳에 있을 뿐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도 당연하고, 겨울 한복판에 봄이 들어서는 것도 당연합니다. 당연의 세계에는 놀람도 감사도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가끔 당연의 세계가 전혀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라기도 합니다. 놀람은 전혀 낯선 것과 만날 때도 일어나지만, 매우 익숙하던 것들을 통해서도 발생합니다. 구상 선생은 ‘말씀의 실상’이라는 시에서 영혼의 눈에 끼었던 무명의 백태가 벗겨지자 세상이 온통 신비라고 노래했습니다. “노상 무심히 보아오던/손가락이 열 개인 것도/異蹟에나 접하듯/새삼 놀라웁고/창 밖 울타리 한구석/새로 피는 개나리꽃도/復活의 示範을 보듯/사뭇 황홀합니다.” 이 마음을 얻을 수 있다면 우리는 욕망의 애옥살이에서 어느 정도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질문은 가끔 새로운 인식의 통로가 되기도 합니다. 어느 날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묻습니다. "우리와 바리새파 사람은 자주 금식을 하는데, 왜 선생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습니까?" 이 질문은 순수한 질문이라기보다는 비난이 담겨 있는 질문입니다. 금식을 하지 않는 예수의 제자단은 경건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생각이 담겨 있으니 말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이를 평가하는 나름의 잣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자기 나름의 잣대를 절대화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그 잣대가 다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을 때 우리는 갈등 속에 빠집니다. 유대인들의 경우 ‘금식’은 ‘기도’와 ‘자선’과 더불어 경건의 매우 중요한 척도였습니다. 금식이란 음식을 먹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을 차단함으로써 인간의 동물적 욕구를 제어하기 위한 행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금식의 의무를 소홀히 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 신랑이 함께 있을 때
금식은 경건 훈련에 매우 중요합니다. 물론 요한의 제자들이 금식했던 것은 단순히 경건 훈련의 일환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종말론적 심판이 임박했다고 믿었습니다. 금식은 그 날에 대한 준비였던 셈입니다. 그러나 금식이라는 척도 그 자체를 절대시하고, 그 척도를 가지고 다른 이들을 함부로 재단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금식은 열심히 하지만 자기 욕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도 많고, 기도를 열심히 하지만 오만한 사람도 있고, 자선을 베풀지만 늘 자기만족에 빠져 사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사야는 다투고 싸우면서 금식을 하는 행태, 주먹질이나 하려고 하는 금식을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이 무엇인지를 가르칩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사58:6) 이게 本입니다. 밥을 굶는 것은 末입니다. 末을 붙드느라 本을 버리는 것은 어리석음일 따름입니다.

예수님은 혼인 잔치에 온 손님들은 신랑이 자기들과 함께 있을 때는 슬퍼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기쁨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주님이 계신 곳에서 사람들은 생명의 회복을 경험했고, 화해와 일치를 경험했고, 생을 함께 경축하는 잔치를 벌였습니다. 기쁨과 생동감, 그것이 예수 운동의 특색이었습니다. 주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기뻐할 줄 모르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비관주의와 우울함이 우리 삶을 엄습하고 있습니다. 삶의 긴장이 나날이 높아가고, 긴장을 풀기 위해 사람들은 더 큰 자극을 원합니다. 큰 자극에 길들여진 이들은 또 다른 자극을 찾습니다. 덤덤하고 담담한 일상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잊고 사는 이들이 많습니다. 신랑이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신 이들은 홀로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기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두운 세상은 주님과 그를 따르는 이들의 그 멋진 삶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은 쉽게 조종되지 않기에 불편한 사람들입니다. 유혹에도 잘 안 넘어가고, 문명의 본질을 꿰뚫어보기에 시대의 풍조에 부화뇌동하지 않습니다. 나희덕 시인의 ‘파일명 서정시’는 제게 큰 각성을 주었습니다. 시 제목인 ‘파일명 서정시’는 구동독 정보국이 시인 라이너 쿤쩨에 대해 수집한 자료집 이름입니다. 동독의 정보당국은 왜 시인을 감시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나희덕은 그 파일 속에 시인의 이런 일상이 기록되었을 거라고 말합니다.

“화단에 심은 알뿌리가 무엇인지
다른 나라에서 온 편지가 몇통인지
숲에서 지빠귀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옷자락에 잠든 나방 한마리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하루에 물을 몇통이나 길었는지
재스민차를 누구와 마셨는지
도서관에서 어떤 책을 대출받았는지
강의 시간에 학생들과 어떤 말을 주고받았는지
저물 무렵 오솔길을 걷다가 왜 걸음을 멈추었는지
국경을 넘으며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나희덕은 시인의 이런 일상이 대체 왜 불온한 것인지를 묻다가 놀라운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들이 두려워한 것은/그가 사람의 마음을 열 수 있는 말을 가졌다는 것/마음의 뿌리를 돌보며 살았다는 것/자물쇠 고치는 노역에도/시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일은 사람의 마음을 열 수 있는 말을 가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마음의 뿌리를 자꾸 돌보는 사람, 그래서 일상 속에 깃든 신적 광휘를 보아내는 사람이야말로 독재자들에게는 위험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위험한 분 맞습니다. 로마가 그를 십자가에 처형한 것은 어쩌면 정치적으로 타당한 결정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삶 혹은 다른 세상을 상상하게 만드는 것처럼 위험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의 새로움
예수님은 과거를 답습하지 않았습니다. 늘 과거의 전통 속에 담긴 속뜻을 헤아리려고 노력했습니다. 법고창신法古刱新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논어에 나오는 온고지신溫故知新과 거의 같은 의미입니다. 옛것을 본받으면서도 변화할 줄 알고 새것을 만들면서도 법도에 맞게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苟能法古而知變 刱新而能典).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셨습니다. 주님은 옛 율법을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을 새롭게 해석하셨습니다. 산상수훈에 등장하는 내용을 떠올려 보십시오.

“옛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살인하지 말아라. 누구든지 살인하는 사람은 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는다”(마5:21-22a)
“‘간음하지 말아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은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하였다.”(마5:27-28)

‘~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라는 구문은 이혼과 맹세, 보복과 원수에 대한 태도에서도 동일하게 등장합니다. 주님은 옛 교훈을 버리지 않되 그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시대 상황에 맞게 재해석하셨습니다. 법고창신을 그대로 실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종교적인 언어를 일상의 언어로 번역하셨습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비유는 매우 심오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비유 어디에서도 종교적인 용어나 교리적인 언어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일상생활의 단면을 보여주거나, 그들이 늘 사용하는 언어를 사용하십니다. 밭을 갈러 나간 농부, 씨를 뿌리는 사람, 밭에서 밀과 함께 자라는 가라지 때문에 속상해 하는 하인, 그물을 끌어올리고 고기를 골라내는 어부, 밀가루 반죽을 하는 여인,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 온 집안을 다 쓰는 여인,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목자. 그 어디에도 사람들을 가르는 거룩의 언어가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종교성은 삶으로 재해석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종교적인 언어에 중독되어 살아갑니다. 죄, 용서, 중생, 칭의, 화해, 구원, 영생, 종말, 심판, 천국, 재림에 대한 이해의 차이 때문에 사람들이 갈라서고, 서로를 정죄하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교리적이고 종교적인 언어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우리의 맥락에 맞게 새롭게 해석하고, 그것을 가장 일상적인 언어로 재맥락화하는 것입니다. 가장 거룩한 언어를 쓰는 사람들의 삶이 지독히도 세속적이고, 신령의 탈을 쓰고 사는 이들이 제 욕망의 노예가 되어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삶으로 번역되지 않는 종교적 언어는 다른 이들을 배제하거나 심판하는 독단이 되기 쉽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비종교적인 언어로 기독교의 진리를 표현할 수 있는지를 탐구했습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명제를 내놓았습니다. ‘신 없이 신 앞에’(ohne Gott vor Gott). 이상한 말이지요? ‘신 없이‘란 신이 없다거나 죽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신’이라는 낡아빠진 기표에서 벗어나자는 말입니다. 인간이 만든 신에 대한 표상에서 벗어날 때 사람은 벌거벗은 존재로 실체이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라는 말을 굳이 동원하지 않더라도 마치 하나님 앞에 선 듯 살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늘 한적한 곳을 찾아가 하나님 앞에 엎드리셨고, 중요한 결정을 앞둘 때에는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사건건 하나님의 뜻을 빙자하여 일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접속된 분으로 사셨을 뿐입니다.

∙포도주와 가죽 부대
예수님은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다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하면, 새로 댄 조각이 그 옷을 당겨서, 더욱더 크게 찢어진다”는 것입니다. 시절이 변했는데도, 옛 법도나 관습만 지키려는 태도는 고루할 뿐입니다. 물론 새것이 다 좋다는 말은 아닙니다. 기독교는 이제 우리 시대의 문제에 대한 답을 내놓아야 합니다. 지난 시절에는 민주주의를 정초하는 일이 중요했다면, 이제는 돈이 주인이 되어 버린 세상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자기 중심을 잃지 않고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야 합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가죽 부대가 터져서, 포도주는 쏟아지고, 가죽 부대는 못 쓰게 된다”도 같은 맥락의 가르침입니다. 생베 조각이나 새 포도주는 복음의 새로움 혹은 예수 안에서 구현된 복음을 상징합니다.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의 기쁨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613개의 율법 규정의 속박 속에 갇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정결의식이 부정한 자로 규정한 사람들과 기꺼이 접촉하셨습니다. 그리고 율법이 세워놓은 장벽 너머의 사람들과 즐겁게 만났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바리새파를 비롯한 유대인들은 그런 예수의 모습을 불경건으로 낙인찍었습니다. 자기들이 금과옥조처럼 붙들고 있는 행동의 준칙을 과감히 위반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굴레에 갇혀 계실 수 없었습니다.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내쫓고, 소외된 이들의 벗이 되는 일에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둘이 서로 버성기다가 결국 부대가 찢어지고 말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를 교리의 틀 속에 가두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사소한 차이 때문에 죽일 듯이 싸우기도 합니다. 초기 신학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본질상 같은 분인지 본질이 유사한 분인지를 두고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동일 본질을 나타내는 단어는 ‘homoousia’이고 유사 본질은 ‘homoiousia’입니다. 헬라어 ‘이오타’ 곧 ‘i’ 자 하나 때문에 사람들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차이를 넘어설 용기가 필요합니다. 서로의 상처를 헤집기 보다는 서로의 슬픔을 부둥켜 안으려 할 때, 싸늘한 비판의 눈길보다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불안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로부터 오는 기쁨에 사로잡혀 살 때 우리는 새로운 질서가 우리 가운데 수립됨을 볼 수 있을 겁니다. 기독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새로운 삶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는 낡은 삶의 옷을 벗고 그리스도로 옷 입은 새로운 사람이 되십시오. 주님은 우리와 더불어 세상에 생명과 평화의 나무를 가꾸고 싶어하십니다. 이러한 부름에 응답하여 일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9년 01월 13일 12시 28분 30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