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51. 나그네로 오시는 주님
설교자 김기석
본문 히 13:1-3
설교일시 2019/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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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로 오시는 주님
히 13:1-3
(2019/12/22, 대림절 4주)

[서로 사랑하기를 계속하십시오. 나그네를 대접하기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어떤 이들은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대접하였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되, 여러분도 함께 갇혀 있는 심정으로 생각하십시오. 여러분도 몸이 있는 사람이니, 학대받는 사람들을 생각해 주십시오.]

∙사랑의 용기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주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대림절 넷째 주일인 오늘은 마침 동지입니다. 동짓날은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습니다. 이 날을 기점으로 하여 밤이 짧아지기에 고대인들은 태양이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날로 여겨 경축했다고 합니다. 어두운 세상에 참 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기리는 성탄절이 동지 무렵이라는 것이 의미심장합니다. 해롤드 슈와이저의 아름다운 책 <기다리는 사람은 누구나 시인이 된다>를 보면 기다림은 감미로울 수도 있지만 아릿하고 고단한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옛 사람들은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집안 청소를 하고, 마당을 쓸고, 물을 뿌리고, 은모래를 뿌리기도 했다지요? 그 정성이 손님을 귀한 존재로 여김을 나타냅니다. 기다림을 떠올릴 때면 저는 오래 전에 돌아가신 방현복 장로님이 늘 떠오릅니다. 연세가 많으신 어르신께서 아침부터 계단 청소까지 정갈하게 하시고, 목사가 탄 차가 도착할 무렵 집 밖에 나와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기다리시던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 정갈하고 공경스럽던 태도는 그 자체로 제게 교훈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런 마음으로 주님을 기다리고 있는지요? 엄벙덤벙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말씀 안에서 우리를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11장에서 위대한 본을 보인 신앙의 인물들을 소개한 히브리서 기자는 12장에서 성도들에게 어떤 어려움이 닥쳐오더라도 믿음의 길에서 떠나지 말라고 권고했습니다. 그리고 13장에서는 그들이 일상 속에서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할지를 가르쳤습니다. 오늘은 그 일부만 살펴보려 합니다. 오늘 본문은 몇 가지 명령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기를 계속하십시오’, ‘나그네를 대접하기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감옥에 있는 사람들과 학대받는 사람들을 생각해 주십시오’. 그것은 해도 그만이고 하지 않아도 그만인 권면이 아닙니다. 우리가 정녕 믿음의 사람이라면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서로 사랑하기를 계속하십시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헬라어로 ‘필라델피아philadelphia‘입니다. ‘형제적 사랑’을 뜻하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신앙 공동체 안에 있는 이들이 믿음 안에서 나누어야 할 구체적 사랑입니다. 누가는 성령의 능력 안에 있던 초기 공동체의 모습을 아름답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행2:44-47a).

정말 이런 일이 가능할까 싶지만 성령은 이런 일을 가능하게 만드는 힘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가르는 차이를 넘어서게 만드는 힘입니다. 지극한 슬픔을 당한 사람들을 만나면 우리는 종교, 인종, 이데올로기의 차이를 넘어 그들의 슬픔에 동참합니다. 재난을 당한 이들을 도우려는 사람들을 보면 인간 속에 숨겨진 선의 가능성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믿습니다. 성령은 저마다의 문제에 사로잡혀 살던 사람들이 개별적 차이를 넘어 깊은 일치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성령의 능력 안에 있을 때 사람들은 아파하는 이들과 함께 아파하고,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합니다. 성령이 열어주는 사랑의 장 안에 머물 때 우리 영혼이 정화됩니다. 죄가 사람들을 멀어지게 하는 힘이라면 사랑은 사람들이 가까워지게 만드는 힘입니다. 성령은 사랑의 영입니다. 우리가 신앙공동체 안에서 만나는 형제자매들을 지속적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능력이 우리 가운데 임해야 합니다.

∙환대의 공간 열기
사도는 또한 나그네 대접하기를 소홀히 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나그네 대접이라고 번역된 필록세니아philoxenia는 낯선 이에게 친구 되어주기 정도로 번역될 수 있는 말입니다. 고대 세계에서 나그네 대접은 가장 중요한 덕 가운데 하나로 여겨졌습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는 스파르타의 왕인 메넬레우스의 극진한 환대를 받았던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메넬레우스의 아내인 헬레네를 유혹하여 데려감으로 초래된 전쟁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메넬레우스는 필록세니아를 잘 실천했지만 파리스는 그의 환대를 배신했던 것입니다.

나그네 환대는 고대 세계의 보편적 윤리였지만 특별히 사도가 나그네 대접하기를 소홀히 하지 말라고 말한 것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세상을 떠돌던 설교자들이나 박해를 피해 고향을 등져야 했던 성도들이 많았던 현실을 반영합니다. 그런 이들이 안심하고 머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 믿음의 동료들이 꼭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나그네는 언제든 폭력에 노출될 수 있는 약자였습니다. 우리도 낯선 곳에 가면 괜히 주눅이 듭니다. 며칠 지나면 나아지지만 낯선 곳에서는 주위의 모든 것에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주면 두려움은 눈 녹듯 사라집니다. 험악한 세상이니 함부로 사람들을 집으로 맞아들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적어도 믿는 사람이라면 사회적으로 소외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 왔을 때 환대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도 있다는 말은 창세기 18장을 떠올리게 합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장막 앞에 당도한 낯선 세 사람에게 달려가서 땅에 엎드려서 절을 하며 말하였습니다. “손님들께서 저를 좋게 보시면, 이 종의 곁을 그냥 지나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는 물을 가져올 테니 발을 씻고 나무 그늘 아래서 쉬라면서 그 동안 잡수실 것을 마련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덧붙인 말이 참 아름답습니다. “이렇게 이 종에게로 오셨으니, 좀 잡수시고, 기분이 상쾌해진 다음에 길을 떠나시기 바랍니다”(창18:5). 우리는 그 나그네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가지고 온 하나님의 천사들임을 압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참 많습니다. 우리를 찾아오는 이들이 마음이 상쾌해진 후에 길을 떠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랄 때 우리 삶이 아름다워지고, 우리 주변이 따뜻해질 겁니다.

적대감이 넘치는 세상입니다. 자기에게 가까운 이들에게는 친절하지만 낯선 이들에게는 불친절하고 무뚝뚝하고 심지어는 적대적인 이들이 많습니다. 레위기 법전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먹어야 할 음식과 먹지 말아야 할 음식을 구별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새들 가운데서 맹금류는 대개 부정한 짐승으로 분류되어 취식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황새(stork, 고니)는 맹금류가 아닌 데도 부정한 짐승으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황새는 하시다hasidah인데 ‘친절한 새‘라는 뜻입니다. 친절한 새가 부정한 동물로 여겨지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랍비들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황새는 자기와 같은 종에게는 친절하지만 다른 종에게는 잔인한 새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Ariel Burger, , HMH, 2018, p.159). 나그네로 상징되는 약자들에게 설 땅을 내어주고, 그들이 자기답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야말로 거룩한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연약한 자와의 연대
사도는 갇힌 자들과 학대 받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공동번역은 이 대목을 이렇게 옮겨놓았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있으면 여러분도 함께 갇혀 있는 심정으로 그들을 기억하십시오. 학대받는 사람들이 있으면 여러분도 같은 학대를 받고 있는 심정으로 그들을 기억하십시오.“(히13:3) ‘함께 갇혀 있는 심정으로’, ‘같은 학대를 받고 있는 심정으로’라는 말이 크게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것도 초대 교회의 상황과 관련시켜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다가 모욕과 환난을 당하고, 감옥에 갇힌 이들이 많았습니다. 소유를 다 빼앗긴 이들도 있었습니다(히10:33-34). 그들은 물론 복음의 대의를 위하여 고난을 마다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사도는 바로 그런 이들이 겪는 고통을 외면하지 않을 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든든히 서 갈 것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이라 했습니다. 몸의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몸 전체가 괴로운 법입니다. 히브리서는 믿는 이들의 공동체를 가리켜 ‘하나님의 집안 사람‘(히3:6)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한 식구라면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이 감옥에 갇히거나 학대 받을 때 모른 척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엄혹했던 시기에 자식을 감옥에 보내놓고 추운 겨울에 불기 없는 방에서 지냈던 어머니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 뜨거운 사랑이 갇힌 이들을 지키는 힘이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다른 이들과 분리되어 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연대와 공감은 외로움에 내몰린 이들을 지키는 방패입니다.

며칠 전 우리는 소위 장발장 부자 이야기를 듣고 깊은 충격과 감명을 받았습니다. 30대의 가장이 배고픔에 시달리다가 아들과 함께 마트에 들어가 사과와 우유를 훔쳤다가 붙잡혔습니다. 경찰이 와서 자초지종을 듣고 보니 너무 딱했습니다. 기초생활수급자인 그는 당뇨와 갑상선 질환으로 6개월 전에 실직했고 아침도 먹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아직도 밥을 먹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경찰관이 그를 식당으로 안내하여 국밥을 사주었습니다. 그 자리에 어떤 분이 들어와서 돈 봉투를 놓고 나갔습니다. 세상에는 어려운 이들도 많지만 기회가 되면 다른 이들을 도우려는 분들도 많습니다. 이게 세상 희망의 단초입니다.

∙‘한 사람’에 집중하라
그들 부자는 그래도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기에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 냉랭한 세상에서 숨죽인 채 울고 있는 이들이 많지만 우리는 어디서부터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할지 몰라 망설입니다. 사실 어려운 이들과 대면한다는 것은 불편한 일인 게 사실입니다. 그들이 우리의 안온한 일상을 뒤흔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애써 그들을 외면하고 삽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을 외면하는 순간 우리는 가장 작은 자의 모습으로 오시는 주님께 등을 돌리는 것이니 말입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기 위해 애쓰는 이들은 우리에게 문제의 크기에 압도당하지 말고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해보라고 권합니다. 굶주린 이들이 보이면 그들을 위해 필요한 물건을 사고, 그것을 가져다주고, 그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으라는 것입니다. 마치 성전 미문 앞에 앉아 있던 걷지 못하는 걸인에게 다가섰던 베드로와 요한처럼 말입니다. 사도들은 그를 주목하여 보았고, 그를 형제라고 불렀고, 그에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도록 했습니다. 돈이 아니라 우정과 사랑, 그리고 삶의 의미를 찾도록 해준 것입니다.

어느 날 한 젊은이가 뉴욕에 있는 유대교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아브라함 조슈아 헤셸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랍비가 되려는 꿈을 품고 조언을 구하려고 저명한 랍비를 찾아왔던 것입니다. 헤셸이 그에게 어떤 경로로 찾아왔냐고 묻자, 그는 웨스트 70번 가에서 120번 가까지 걸어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헤셸이 물었습니다. “96번가에 있는 노숙자 여인을 보았나요? 한 손에 작은 손팻말을 들고 다른 손에는 담요를 들고 있는.“ 젊은이는 보지 못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헤셸은 “117번 가에 있는 퇴역 군인을 보았나요? 야구 모자를 쓰고 있고 회색 수염에 이가 몇 개 남지 않은.” 젊은이는 역시 보지 못했다고 대답했습니다. 헤셸은 또 다시 물었습니다. “자바르 외곽에서 드레드록 머리를 한 채 채 두 손을 들고 기도하는 키 큰 남자를 보았나요?” 젊은이는 유구무언이었습니다. 그때 헤셸이 말했습니다. “어떻게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눈여겨보지 않으면서 랍비가 되겠다는 것입니까?”(Ariel Burger, , HMH, 2018, p.175) 저는 이 이야기에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질문 앞에 서면 저도 유구무언입니다. 다시 한 번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에 다 응답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정녕 믿는 이들이라면 세상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풍경처럼 대하지는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웃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따뜻해질 때 주님은 우리 마음에 더욱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여건이 어떠하든 사랑을 지속하십시오. 어려운 이웃과 함께 하기 위해 편안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용기를 내십시오. 개인의 안일에만 몰두하던 삶에서 벗어나 누군가에게 선물이 될 마음을 품으십시오. 낯선 이들을 환대하십시오. 주님은 나그네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고 계십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9년 12월 22일 12시 25분 26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