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8. 아름다운 소문
설교자 김기석
본문 롬 16:17-20
설교일시 2021-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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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소문
롬16:17-20
(2021/05/02, 부활절 제5주, 교회설립기념주일)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이 배운 교훈을 거슬러서, 분열을 일으키며, 올무를 놓는 사람들을 경계하고, 멀리하십시오. 이런 사람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네 배를 섬기는 것이며, 그럴 듯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사람들의 마음을 속이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순종은 모든 사람에게 소문이 났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일로 기뻐합니다. 나는 여러분이 선한 일에는 슬기롭고, 악한 일에는 순진하기를 바랍니다. 평화의 하나님께서 곧 사탄을 쳐부수셔서 여러분의 발 밑에 짓밟히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있기를 빕니다.]

∙여기까지 도우신 하나님
생명과 평화의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주님은 113년 전 청파교회를 이 땅에 세우시고, 귀한 일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주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하셨다는 고백이 절로 나옵니다. 각 시대마다 주어진 하나님의 뜻이 날실이었다면, 그 뜻을 이루기 위해 헌신한 교우들의 노력은 씨실이었습니다. 날실과 씨실이 엮여 청파교회의 역사라는 태피스트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피륙이 성길 때도 있고, 촘촘할 때도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무늬를 이루고 있습니다. 참 고맙습니다. 우리를 신실하게 여겨 당신의 일을 맡겨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교회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땀을 흘려 헌신하셨던 분들의 수고 또한 감사합니다.

연로하신 교우들을 볼 때마다 그분들이 감내해왔던 소중한 역할들이 떠올라 가슴이 울컥해집니다. 조금씩 기력이 떨어지고, 기억이 흐려지는 어르신들을 볼 때마다 세월의 무상함을 절감합니다. 코로나 상황이 속히 좋아져서 더 자주 만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우리 교우들 가운데도 의료계나 특수 시설에 근무하는 분들과 75세 이상의 교우들이 코로나 백신을 맞았다는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 면역 반응에 조금 힘들어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대개는 별탈이 없는 것 같아 감사합니다. 우리도 힘들지만 인도의 상황은 정말 심각한 것 같습니다. 하루 40만 명 이상의 확진자가 나오고 있고 사망자 또한 그만큼 많아지고 있습니다. 미국 영국 EU를 비롯한 국제사회의 협력이 절실한 때입니다. 백신 민족주의가 세상에 조금 더 높은 장벽을 만들고 있습니다. 백신과 원료물질과 제조 기술을 공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힘 있는 이들이 그렇지 못한 이들을 돌보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인간의 도리입니다. 지금은 지구인의 윤리가 작동되어야 하는 때입니다. “많이 받은 사람에게는 많은 것을 요구하고, 많이 맡긴 사람에게는 많은 것을 요구한다”(눅12:48b),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당합니다”(고전12:26a)라는 말씀이 더욱 크게 다가오는 날들입니다. 공감의 능력을 잃어버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부터 멀어집니다. 조용하지만 꾸준히 고통 받는 이들 곁에 다가서는 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아름다운 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바울은 로마 교인들의 순종이 모든 사람에게 소문이 났다고 말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도 바울은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으로부터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만 울려 퍼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여러분의 믿음에 대한 소문이 각처에 두루 퍼졌습니다.“(살전1:8)라고 말합니다. ‘아름다운 소문‘이라는 제목은 바로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목회실 식구들이 웃으면서 이 설교 제목이 ‘정의로운 소문’이라는 드라마를 연상시킨다면서 ‘소문’은 초능력을 가진 사람 이름이라고 알려줬습니다. 뭐 그러면 어떻습니까? 교회가 추문거리로 전락한 이 시대에 아름답게 호명되는 교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올무를 놓는 사람들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그 원리에 대해 설명하고, 구원받은 사람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상세하게 가르친 바울 사도는 편지의 말미인 16장에 이르러 로마에 있는 그리운 사람들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하며 문안 인사를 합니다. 무려 26명입니다. 바울이 직접 만났던 이들도 있고, 간접적으로 알게 된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름을 호명하는 순간 바울의 마음에는 어떤 기억이 스멀스멀 피어올랐을 겁니다. 함께 겪어왔던 일들, 기쁨과 슬픔의 순간들, 절실한 기도, 어느 것 하나 버릴 수 없는 소중한 기억들이었을 겁니다. 저는 거기서 호명되고 있는 이들이야말로 바울이라는 위대한 전도자의 활동을 뒷받침해온 일종의 생태계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있었기에 바울 사도는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도 복음 전도자로서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인생 말년을 맞은 누군가가 나의 이름을 긍정적 의미에서 중요한 타자로 호명한다면 나름대로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그렇게 문안 인사를 마친 바울은 마지막 당부의 말을 건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이 배운 교훈을 거슬러서, 분열을 일으키며, 올무를 놓는 사람들을 경계하고, 멀리하십시오. 이런 사람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네 배를 섬기는 것이며, 그럴 듯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전한 사람들의 마음을 속이는 것입니다.“(롬16:17-18)

저는 요즘 날이 갈수록 세상도 사람도 이해하기 어렵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각자가 타고난 성향도 다르고, 사는 과정에서 획득한 자기 정체성도 있지만 그러나 그것도 경우에 따라서 전혀 달리 나타나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온유하다가 어떤 때는 급한 마음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너그럽다가도 상황이 바뀌면 옹색해지기도 합니다. 따뜻한 눈으로 이웃을 바라보기도 하지만 차가운 눈빛으로 살필 때도 있습니다. 나의 마음 씀을 보고 놀랄 때가 더러 있습니다. 나도 잘 모르겠는 판에 남을 어떻게 다 이해한다고 하겠습니까? 그렇기에 아름다운 사람들을 보며 그를 거울 삼아 자꾸 나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마음 혹은 예수님의 마음이라는 거울에 나를 비춰보는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 한결같은 사랑, 미쁘심, 의로우심, 공평하심(시36:5-6) 앞에 설 때마다 우리는 입을 가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함께 길을 가는 사람들은 서로 격려해가며 그 진리의 길을 꾸준히 걸어야 합니다. 문제는 그 길에서 다른 마음을 품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그리스도라는 푯대로부터 멀어지게 만듭니다. 거짓 교사들은 옛날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지금도 도처에 있습니다. 사람들을 교묘한 말로 꾀며 오도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렇기에 성도들에게 바른 교훈을 거슬러서, 분열을 일으키고 올무를 놓는 사람들을 경계하라고 말합니다. 그런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만 기실 그들이 섬기는 것은 자기들의 배라는 것입니다. ‘배’라는 것은 다양한 의미를 거느린 은유입니다. 배를 섬긴다는 말은 자기 욕망에 이끌려 산다는 말일 겁니다. 욕망에 사로잡히는 순간 분별력이나 자제심은 작동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처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무정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탐욕이 곧 우상숭배(골3:5)라는 말도 같은 사실을 가리킵니다. 신앙을 혹은 교회를 자기를 강화하거나 확장하려는 욕망 충족의 수단으로 삼는 이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속여 본(本)이 아니라 말(末)에 집중하게 만듭니다. 사도는 그런 이들을 멀리하라고 권합니다.

∙새로운 생태계
경계하고 멀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지 않는 메시지를 전하는 이들을 경계하고 비판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이것도 참 중요한 일입니다. 제가 이 교회의 담임목사로 취임하기 전에 전임자인 박정오 목사님께서 제게 진지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김 목사, 나는 이 교회에 와서 30년 넘게 일하면서 무엇이 기독교가 아닌지에 대해 가르쳤어. 그런데 무엇이 기독교인지는 가르치지 못했어.“ 존경하는 목사님의 엄정한 자기반성이자, 제가 해야 할 일에 대한 암시였습니다. ‘좋은 게 좋은 게 아니라, 옳은 게 좋은 거다’라는 말씀은 우리가 귀가 닳도록 들었던 말씀입니다. 그런 분별이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런 삶을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이것을 잘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지요?

제가 오래 전부터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에 동참한 이들의 삶에 나타나야 할 열매가 생명과 평화라고 강조한 까닭은 박 목사님의 그런 탄식 때문이었습니다.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새로운 질서가 세워지지 않습니다. 싸우는 동안 우리 또한 거칠어지고, 진이 다 빠질 수 있습니다. 이게 우리의 경험입니다. 느헤미야 시대에 예루살렘 성벽을 쌓던 젊은이들이 반은 일을 하고, 나머지 반은 창과 방패와 활과 갑옷으로 무장을 하였던 것처럼, 짐을 나르는 이들이 한 손으로는 짐을 나르고 다른 한 손으로는 무기를 잡았던 것처럼(느4:16, 17), 우리는 분별하는 동시에 아름다운 삶의 생태계를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그곳에 가면 고향을 느낄 수 있고, 환대받는다는 느낌이 들고, 새롭게 살고 싶은 열망이 일어나는 곳, 바로 그곳이 교회여야 합니다. 고진하 시인의 ‘제비산부인과-불편당 일기’라는 시는 먼 데서 날아와 처마 밑에 집을 짓고 알을 품고 있는 제비를 보며 적은 작품입니다. 불편당은 그가 살고 있는 집의 시골집 당호입니다. 제비는 낯선 곳에서 날아와 포란(抱卵)의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며 시인은 안쓰러움과 동시에 고마움을 느낍니다. 시의 2, 3연입니다.

“아기들 우는 소리
들리지 않는
불임의 마을,
먼 데서 날아와
몸 푸는 너를 보며
얼마나 반갑던지

머잖아
어린 새끼들
둥지를 박차고 나와
마당을 가로지른
빨랫줄에 앉아 우짖으면
푸른 하늘이 더 팽팽해지겠네.“

새 교우들과의 줌미팅을 할 때마다 이 시가 떠오릅니다. 새로운 사귐과 예배 공동체 안에서 그들의 내적 생명이 튼튼해지고, 기쁨의 샘이 터져나올 수 있기를 빌게 됩니다. 세상이 소란할수록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려는 의지가 더 커져야 합니다.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지식을 더하고, 지식에 절제를 더하고, 절제에 인내를 더하고, 인내에 경건을 더하고, 경건에 신도간의 우애를 더하고, 신도간의 우애에 사랑을 더하는(벧후1:5-7) 교회의 꿈을 버리지 마십시오.

∙선한 데 지혜로우라
바울 사도는 로마 교인들의 순종이 모든 사람들에게 소문이 났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특정한 개인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복음에 대한 순종을 이르는 말일 겁니다. 순종이란 자기의 뜻과 생각을 잠시 유보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해를 뛰어넘는 것이 믿음입니다. 십자가의 신비가 바로 그것을 가리킵니다. 주님도 살고 싶은 생명이었지만 하나님의 뜻에 대한 ‘아멘’이 되기 위해 자기 생명을 바쳤습니다. 사도들도 평안한 일상을 꿈꾸는 평범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몸에 채우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순종입니다.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신뢰하기 때문에, 보상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에 그 뜻을 따르는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하기 어려운 이들입니다. 사람을 숭배하느라 진리의 길에서 멀어지는 사람을 볼 때마다 안타깝습니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따를 수는 있지만 그를 숭배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많은 이들이 자기들의 헛헛함 마음을 채워줄 우상을 필요로 합니다.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들에 환호성을 보내는 이들이 있습니다. 특정한 정치인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정도가 지나치면 자기와 생각이 다른 이들에 대해 폭력적인 태도를 취할 때도 많습니다. 모든 우상화는 경직된 태도를 낳습니다. 경직된 것은 생명을 품기 어렵습니다.

로마 교인들이 복음을 따라 살려고 노력한다는 소문을 들었기에 바울은 그들에게 한 가지를 더 당부합니다. 선한 데는 지혜롭고 악한 데는 순진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주님이 하셨던 당부를 떠올리게 합니다. “보아라, 내가 너희를 내보내는 것이, 마치 양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과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와 같이 순진해져라.“(마10:16) ‘선한‘ 데 지혜로우라는 말은 선한 일을 하는 데 무능한 사람이 되지 말라는 말입니다. ‘선하다’는 뜻의 ‘아가싸스agathos‘는 ‘올곧다’, ‘즐겁다’는 뜻도 내포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즐겁게 올곧게 감당하는 것이 아름다운 삶의 비결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악한 일에 물들지 않도록 늘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려고 애쓸 때 하나님께서는 사탄을 쳐부수셔서 우리 발 밑에 짓밟히게 하실 것입니다. 사탄 곧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아니라, 그를 밟고 일어선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맑고 깨끗한 영혼이 아니고는 사탄을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닦고 또 닦아야 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홀로는 할 수 없어도 함께라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안에서 우리가 하나 될 때 이 놀라운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숲에 핀 난초의 향기가 길가는 이들의 마음을 흐뭇하게 만들 듯 우리가 함께 이루어가는 삶의 이야기가 삶에 지친 많은 이들에게 생수 한 잔과 같은 시원함과 기쁨을 안겨줄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1년 05월 02일 11시 33분 1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