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51. 위대한 여인들
설교자 김기석
본문 룻 4:13-17
설교일시 2021-12-19
오디오파일 s20211219-2.mp3 [55630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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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여인들
룻 4:13-17
(2021/12/19, 대림절 제4주)

[보아스는 룻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 여인이 자기 아내가 되자, 그는 그 여인과 동침하였다. 주님께서 그 여인을 보살피시니,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러자 이웃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말하였다. "주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이 집에 자손을 주셔서, 대가 끊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에서 늘 기리어지기를 바랍니다. 시어머니를 사랑하는 며느리, 아들 일곱보다도 더 나은 며느리가 아기를 낳아 주었으니, 그 아기가 그대에게 생기를 되찾아 줄 것이며, 늘그막에 그대를 돌보아 줄 것입니다." 나오미가 그 아기를 받아 자기 품에 안고 어머니 노릇을 하였다. 이웃 여인들이 그 아기에게 이름을 지어 주면서 "나오미가 아들을 보았다!" 하고 환호하였다. 그들은 그 아기의 이름을 오벳이라고 하였다. 그가 바로 이새의 아버지요, 다윗의 할아버지이다.]

• 마리아의 믿음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대림절 네 번째 주일입니다. 밤이 가장 긴 날인 동지(冬至)가 다가옵니다. 동지 무렵에 성탄절이 있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합니다. 주님은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우리 가운데 오고 계십니다. 대림절이면 한번쯤 꼭 부르는 찬송가 ‘곧 오소서 임마누엘‘의 가사가 더욱 각별하게 생각되는 시절입니다. 특히 3절이 그렇습니다. “곧 오소서 소망의 주/만 백성 한 맘 이루어/시기와 분쟁 없애고/참 평화 채워주소서/기뻐하라 이스라엘/곧 오시리 오 임마누엘“. ‘오소서’라는 간구와 ‘오시리’라는 미래의 염원 사이에 담긴 기도의 내용이 절실합니다. 만 백성이 한 맘을 이루도록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시기심과 분쟁을 없애시어 참 평화를 맛보게 해달라는 청원입니다. 어둠이 지극하기에 우리는 더욱 이 찬양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대림절이 되면 기억해야 할 사람 가운데 하나가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 살던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여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이 여성을 통해 구원의 새로운 장을 여셨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했던 인사말 속에 하나님의 구원의 신비가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기뻐하여라, 은혜를 입은 자야, 주님께서 그대와 함께 하신다“(눅 1:28). 마리아는 ‘은혜를 입은 자‘로 지칭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특별한 호의를 입다‘, ‘받아들여지다’라는 뜻입니다. 이어지는 말, ‘주님께서 그대와 함께 하신다‘는 말은 임마누엘을 풀어 쓴 말입니다. 어쩌면 마리아는 이런 상황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기치 않은 소식을 들은 마리아의 반응을 성경은 ‘몹시 놀랐다‘(diatarasso)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존재 전체가 흔들리는 경험이었다는 말입니다. 마리아는 그런 당혹스러움 속에서도 천사가 전한 말의 의미를 새기기 위해 골똘히 생각했습니다. 매우 진중한 사람입니다.

가브리엘로부터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전해들은 후에 마침내 마리아는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눅 1:38)라고 말합니다. 당혹감 속에서도 마리아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한 모험에 나서기로 한 것입니다. 아무런 강제도 없었습니다. 거절할 수도 있었지만 마리아는 하나님의 계획을 받아들였습니다. 이후에 벌어질 일을 생각한다면 차마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사방에서 던져질 의혹의 눈초리를 어떻게 견딜 것이며, 요셉과의 혼인이 파탄에 이르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전혀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아무런 보장도 보상도 없는 길을 마리아가 받아들인 것은 마리아가 세상 물정 모르는 그저 순진하기만 한 시골 소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장 46절부터 55절에 나오는 마리아의 찬가는 그가 불의한 현실에 대해 얼마나 깊이 통찰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마리아는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고,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을 높이시고,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깊이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현실은 암담하다 해도 절망할 수 없던 것은 그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부력(浮力, buoyancy)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오라’는 주님의 말씀에 비교적 안전한 배를 떠나 거센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에 발을 내디뎠습니다. 계산하는 마음으로는 믿음의 세계에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마리아를 떠올리며 성경에 등장하는 몇몇 여성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 하와, 십브라와 부아
뱀의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던 인류의 첫 사람들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잘 압니다. 아담과 하와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창세기 3장 20절에서 비로소 아담과 하와라는 이름을 부여받습니다. 그 전까지는 ‘사람’ 혹은 ‘그 남자‘, ‘그 여자‘로 지칭되었을 뿐입니다. 아담은 ‘흙’을 뜻하는 ‘아다마’(‘adamah)에서 유래된 이름입니다. 그리고 하와는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그 이름에 ‘생명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라는 뜻을 부여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하와가 세상에 죄를 끌어들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뱀이 여자를 먼저 유혹한 것은 여자가 감정에 휘둘리는 비이성적 존재였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성경 텍스트가 고대의 세계관을 반영한다는 측면에서는 그럴 듯하지만 여성이 유혹과 죄에 취약하다고 말하는 것은 일종의 편견일 뿐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추궁을 듣고 하와가 자기를 죄에 끌어들였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에덴에서 쫓겨나는 순간 자기 곁에 있는 존재의 소중함을 깨달았습니다. 비난하고, 책임을 전가하고, 혐오하는 것으로는 아무 일도 이룰 수 없음을 알았을 때 그는 그 여자에게 ‘생명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라는 이름을 부여했습니다. 이름을 부여했다 하여 종속 관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와를 새롭게 받아들인 것입니다.

제국에 의해 약자들의 삶이 속절없이 유린되던 상황을 반영하는 출애굽기의 서장에서 우리는 두 여인을 만납니다. 히브리 산파인 십브라(Shiphrah)와 부아(Puah)입니다. 십브라는 ‘공정하다’는 뜻이고 부아는 ‘훌륭하다, 빛나다‘라는 뜻입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애굽 왕은 이스라엘 자손이 늘어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만일 전쟁이 일어나면 그들이 체제에 위협이 될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강제노동의 강도를 높여 그들을 제어하려 했지만 그럴수록 이스라엘 자손은 더욱 불어났습니다. 그래서 특단의 대책을 마련했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서 태어나는 아이 가운데 남자 아이들을 죽이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는 십브라와 부아를 불러서 “히브리 여인이 아이 낳는 것을 도와줄 때에, 잘 살펴서, 낳은 아기가 아들이거든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 두어라“(출 1:16) 하고 명령합니다. 산파들은 차마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왕의 명령이 지엄했지만 제국의 살육 기계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산파들은 남자 아이들도 살려두었습니다. 애굽 왕이 산파들을 불러들여 취조했습니다. 하지만 십브라와 부아는 히브리 여인들이 기운이 좋아서, 자기들이 이르기도 전에 아기를 낳아 버렸노라고 말합니다. 이 두 사람을 인류 최초의 시민 불복종 운동가라 해도 가히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생명의 편에 섰습니다. 누가 이 여성들을 연약하다거나 감상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들은 몸은 연약했을지 모르지만 제국의 폭력에 맞설만큼 강인한 정신의 사람들이었습니다.

• 룻기의 삶의 자리
마리아를 제외하면 예수님의 족보 가운데 등장하는 여인이 셋 있습니다.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밧세바]가 그들입니다. 그 가운데서 오늘은 룻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려합니다. ‘룻기’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나요? 많은 이들이 밀레의 ‘이삭줍기’를 떠올릴 것입니다. 그 그림은 목가적인 풍경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그림 속에는 가난한 이들의 고통스러운 삶과 노동 현실이 아프게 담겨 있습니다. 절망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여인들의 모습이 제 눈에는 거의 성스럽게 느껴집니다. 룻기도 이와 비슷한 맥락 속에서 탄생한 책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칙령에 따라 고국으로 귀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설렘을 안고 찾아온 고향이지만 그곳은 마음에 그리던 땅이 아니었습니다. 전쟁을 거치며 도시는 폐허로 변했고 땅은 묵정밭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성벽은 허물어져 승냥이의 소굴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민심도 흉흉했습니다. 절망의 어둠이 확고하게 그들을 사로잡았을 것입니다. 변해버린 고향을 바라보는 것처럼 스산한 일이 또 있을까요? 제 고향도 제게는 낯선 곳이 되었습니다. 공해를 배출하는 공장들과 석탄 발전소가 들어서면서 공기는 나빠졌고, 유년 시절에 뛰어놀던 산은 평지가 되었고, 친구들과 물장구치며 놀던 바다는 간척사업으로 사라졌습니다. 사람들이 돈에 눈을 뜨면서 이웃간의 갈등도 깊어졌습니다. 부모님 산소가 그곳에 있어 더러 고향에 갈 때마다 비감한 생각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습관처럼 이은상 작사 홍난파 작곡의 가곡 “옛 동산에 올라“를 흥얼거리게 됩니다.

“1. 내 놀던 옛 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니/산천 의구(依舊)란 말 옛 시인의 허사로고/예 섰던 그 큰 소나무 베어지고 없구료 2. 지팡이 도로 짚고 산기슭 돌아서니/어느 해 풍우엔지 사태져 무너지고/그 흙에 새 솔이 나서 키를 재려하는구료“

큰 소나무는 베어져 사라지고, 산기슭조차 사태져 무너진 현장을 바라보는 심정이 처연합니다. 포로생활로부터 귀환한 이들의 심정은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을 겁니다. 지도자들의 역할이 중요했습니다. 폐허를 정리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워야 했습니다. 무너진 성벽을 일으켜 세우고, 묵정밭으로 변한 땅을 개간하고, 살 집을 지어야 했습니다. 고된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너진 마음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신앙적 정체성을 새롭게 함으로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신앙의 순수성을 회복한다는 명분하에 이방인과 결혼하여 살고 있는 이들에게 이혼을 종용했습니다. ‘순수함’이라는 게 때로는 악마적으로 작동될 때가 많습니다. 순수함을 강조하는 순간 그 기준에 미달하는 것은 잡된 것으로 혹은 더러운 것으로 취급됩니다. 순수의 광풍에 내몰려 어쩔 수 없이 눈물로 헤어지는 커플들이 많았습니다. 자식들은 부모 가운데 한쪽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야말로 비인륜적 세태였습니다. 역사는 가끔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정당화하곤 합니다. 나치가 아리안 족의 우월성을 내세우며 인종 학살을 자행했던 것도 한 예입니다.

룻기는 바로 이런 시대정신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책입니다. 룻기는 모압 여성 룻을 누군가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는 사람, 즉 미덕의 표본으로 내세우며 편협한 민족주의나 종교적 편견을 넘어 관용의 정신을 발휘할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 지워진 사람
룻기는 기근으로 말미암아 고향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이주해야 했던 한 가족의 신산스러운 이야기입니다. 살기 위해 찾아간 그 땅에서 남편 엘리멜렉이 죽자, 나오미는 두 아들인 말론과 기룐을 모압 여인들과 짝을 맺어주었습니다. 말론과 룻, 기룐과 오르바 커플입니다. 그러나 불행이 겹쳐 찾아왔습니다. 두 아들은 후사조차 남기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두 아들의 이름은 그 황량한 시대에 이름 없는 민초들이 겪어야 했던 상황을 암시합니다. 말론은 ‘질병’이란 뜻이고, 기룐은 ‘황폐’라는 뜻입니다.

남편의 죽음과 두 아들의 죽음을 연이어 경험한 나오미에게 그 땅은 더 이상 머물고 싶은 곳이 아니었습니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우가 죽을 때 제가 살던 굴이 있는 언덕 쪽으로 머리를 둔다는 말입니다. 나오미는 떠나온 곳 고향 마을로 돌아갈 결심을 하고는 며느리들에게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냉정하게 떨쳐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새로운 가정을 이루어 살기를 바라는 시어머니의 배려였습니다. 오르바는 지속되는 권유를 받아들여 울면서 떠나갔습니다. 그러나 룻은 슬픔과 절망의 어둠 속에 갇힌 나오미를 차마 홀로 버려둘 수 없어 어머니와 동행하겠다고 말합니다. 그의 말이 곡진합니다.

“나더러, 어머님 곁을 떠나라거나, 어머님을 뒤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는 강요하지 마십시오. 어머님이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님이 머무르시는 곳에 나도 머무르겠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내 겨레이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어머님이 숨을 거두시는 곳에서 나도 죽고, 그 곳에 나도 묻히겠습니다.“(룻 1:16-17a)

마침내 두 여인이 베들레헴에 들어섰을 때 고향 사람들이 나오미를 반기며 맞아주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자기를 나오미가 아니라 마라라고 불러달라고 말합니다. 나오미는 ‘기쁨’이라는 뜻이고, 마라는 ‘괴로움’이라는 뜻입니다. 낯선 땅이었습니다. 이방인인 그는 언제든 이런저런 폭력에 희생될 수도 있는 취약한 처지였습니다. 룻은 늙은 나오미를 보살피기 위해 들판에 나가 이삭을 주웠습니다. 룻은 누군가를 위해 스스로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사람입니다. 룻이라는 이름의 뜻은 ‘친구’ 혹은 ‘아름다움’입니다.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 15:13) 하신 주님의 말씀을 룻은 삶으로 체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후에 벌어진 일을 우리는 압니다. 나오미의 남편 쪽으로 친척인 재력가 보아스와의 만남, 그리고 그가 보여준 호의, 그리고 결혼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 보살펴주셔서 룻은 아기를 낳았습니다. 이웃 여인들은 집안의 대가 끊어지지 않게 되었다며 나오미에게 축하의 말과 축복의 말을 건넵니다. “그 아기가 그대에게 생기를 되찾아 줄 것이며, 늘그막에 그대를 돌보아 줄 것입니다“(룻 4:15). 나오미는 그 아기를 품에 안고 어머니 노릇을 하였습니다. 아름다운 결말 같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보아스와의 결혼이 성립된 이야기 후에 거짓말처럼 룻의 이름이 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다만 ‘그 여인‘, ‘시어머니를 사랑하는 며느리‘, ‘아들 일곱보다도 더 나은 며느리‘라고만 언급됩니다. 룻은 여전히 그곳에 있겠지만 이야기 속에서는 사라집니다. 노자는 도덕경 2장에서 성인이 일하는 방식에 대해 말한 바 있습니다. “만물을 다 이루어지게 하고도 생색을 내지 않고[萬物作焉而不辭], 만물을 다 자라게 하고도 소유하지 않으며[生而不有], 할 일을 다 하고도 자부하지 않고[爲而不恃], 공을 이루고도 차지하지 않는다[功成而不居]“ 룻이야말로 이 말에 합당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어쩌면 룻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타인들의 고통 속으로 쑥 들어가 그들의 설 땅이 되어주려는 사람, 위험을 무릅쓰고 하나님의 꿈에 동참하려는 이들을 통해 주님은 이 땅에 오고 계십니다. 어려운 시절이지만 작은 등불 하나 밝히는 마음으로 누군가의 가슴에서 어둠을 몰아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시는 주님의 아름다움을 삶으로 드러내는 우리가 되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1년 12월 19일 12시 12분 1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