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 살아있는 돌과 같은 존재
설교자 김기석
본문 벧전 2:1-10
설교일시 2022-01-02
오디오파일 s20220102.mp3 [44820 KBytes]
목록

살아 있는 돌과 같은 존재
벧전 2:1-10
(2022/01/02, 성탄절 후 제2주)

[그러므로 여러분은 모든 악의와 모든 기만과 위선과 시기와 온갖 비방하는 말을 버리십시오. 갓난 아기들처럼 순수하고 신령한 젖을 그리워하십시오. 여러분은 그것을 먹고 자라서 구원에 이르러야 합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습니다. 주님께 나아오십시오. 그는 사람에게는 버림을 받으셨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받은 살아 있는 귀한 돌입니다. 살아 있는 돌과 같은 존재로서 여러분도 집 짓는 데 사용되어 신령한 집이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십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보아라, 내가 골라낸 귀한 모퉁이 돌 하나를 시온에 둔다. 그를 믿는 사람은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돌은 믿는 사람들인 여러분에게는 귀한 것이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집 짓는 자들이 버렸으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돌"이요, 또한 "걸리는 돌과 넘어지게 하는 바위"입니다. 그들이 걸려서 넘어지는 것은 말씀을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그렇게 되도록 정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기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여러분이 선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으나, 지금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자비를 입지 못한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자비를 입은 사람입니다.]

• 새해 아침의 기도
새해 첫 주일 아침입니다. 흘러가는 시간의 강물에 놓인 첫번째 징검돌에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습니다. 선하신 주님의 이끄심에 따라 영원과 연결된 시간을 누릴 수 있기를 빕니다.  현실은 여전히 어둡지만 우리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실 주님을 신뢰합니다.

저는 새해를 맞을 때마다 안도현 시인의 ‘새해의 기도‘를 천천히 읽곤 합니다.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가 그 속에 다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두 손을 모으고 무릎을 조아리고 새해에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나 자신과 내 가족의 행복만을 위해 기도하지 말고, 한 번이라도/나 아닌 사람의 행복을 위해 꿇어앉아 기도하게 하소서./한 사람, 한 사람의 기도가 시냇물처럼 모여들어 이 세상 전체가/아름다운 평화의 강이 되어 출렁이게 하소서.“ 이렇게 시작된 기도는 남의 허물을 함부로 가리키던 손가락을 부끄럽게 해달라는 기원과 남을 위해 열린 적이 없는 지갑을 부끄러워하게 해달라는 기원으로 넘어갑니다. 일일이 다 인용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대목만은 명심하고 싶습니다. “새해에는 스스로 깨우치게 하소서. /내 배부를 때 누군가 허기져 굶고 있다는 것을, /내 등 따뜻할 때 누군가 웅크리고 떨고 있다는 것을, /내 이마에 햇살이 닿을 때 누군가의 등에는 그늘이 지고 있다는 것을 새해에는 알게 하소서“. 새해에는 연약한 것들을 쓰다듬고, 빛나지 않는 것들을 사랑하고, 외롭고 쓸쓸한 이들 곁에 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명랑함으로 주변을 물들이고, 작고 사소한 일에도 감사할 수 있기를 빕니다. 정치판에서 들려오는 소란한 소리들로 세상이 어지럽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시인과 함께 기도합니다. “사람 사이의 반목과 지역간의 분열을 조장하는 정치인들에게는/우레와 같은 호통을 내려 정신이 번쩍 들게 하소서.“

• 버릴 것 버리고
기도(祈禱)는 단순히 비는 행위가 아니라 바라는 바를 이루기 위한 노력(冀圖)을 내포합니다. 우리가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라고 기도할 때 넋을 놓고 주님의 개입을 기다리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감리교회의 아침 기도문 중에 “오늘 우리의 삶이 누군가 당신께 바치는 기도의 응답이 되게 해주십시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배고픈 이에게 밥을 대접하고, 외로운 이의 벗이 되고, 어둠 속에 방황하는 이들의 빛이 되어줄 때 우리 기도는 비로소 진실한 것이 됩니다.

새로움은 그저 오는 것이 아니라 낡은 것, 닳아빠진 것과 결별하는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사도는 진리의 순례자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버려야 할 것을 단호하게 버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모든 악의와 모든 기만과 위선과 시기와 온갖 비방하는 말을 버리십시오“(벧전 2:1). 한달음에 읽었지만 여기 언급된 악덕들 하나하나를 깊이 살펴야 합니다. 이 모든 악덕들은 우리와 이런저런 모양으로 연결된 사람들을 대할 때 우리가 보이는 태도입니다. 두 가지 태도가 두드러집니다. 하나는 자기를 돋보이게 하거나 자기 이익을 확보하려는 욕구입니다. 다른 하나는 다른 이들을 깎아내리거나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태도입니다. 이 둘은 사실 한 뿌리에서 나옵니다. 인간의 죄성입니다. 이런 악덕에서 벗어나는 길은 자기를 모든 세상의 중심에 세우지 않으려는 겸허한 ‘자기 부정‘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이웃들의 아픔을 이해하게 되고, 함부로 대하지 않게 됩니다.

고린도에 보내는 편지에서 사도 바울은 기독교인들에게 꼭 필요한 윤리적 태도를 설명한 바 있습니다. ‘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 것‘이 그것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우상 앞에 바쳐졌던 제물을 먹는 문제 때문에 아주 심각한 분열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물론 다른 문제들도 많았지만 이 문제 또한 간단치 않았습니다. 고대세계에서 제일 좋은 고기는 신에게 바쳐졌던 고기였습니다. 성도들 가운데 일부는 그 고기를 사다 먹는 것이 신앙에 위배되는 일이 아니라 생각했고, 또 일부는 그 고기를 먹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배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 문제 앞에서 단호했습니다. 자기는 믿음 안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우상 앞에 바쳐진 제물을 먹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걸 보고 다른 사람이 실족한다면 기꺼이 그 자유를 유보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유가 누군가의 걸림돌이 되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고전 8:9).

‘나는 안다‘ 하는 자부심으로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참 많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고전 8:1b)라고 말한 끝에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도 그가 마땅히 알아야 할 방식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고전 8:2)이라고 말합니다. 수도 없이 읽은 구절이지만 오늘은 ‘마땅히 알아야 할 방식‘이라는 구절이 유난히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마땅히 알아야 할 방식이란 젠체하지 않는 태도, 사랑의 태도가 아닐까요? 악의, 기만, 위선, 시기, 비방하는 말을 멀리해야 우리 영혼이 맑아집니다.

버리는 것만으로 존재가 새로워지지는 않습니다. 좋은 것으로 채우지 않으면 오히려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찍이 이런 영적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들려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귀신이 머물던 곳을 떠나 깃들 곳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다가 찾지 못하자 ‘내가 나온 집으로 되돌아가겠다‘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사이에 집이 말끔하게 치워져 있는 것을 보고 그는 자기보다 더 악한 다른 귀신 일곱을 데리고 와서 그 집에 자리를 잡고 살았습니다(눅 11:24-26). 그의 나중 형편이 처음 형편보다 나빠졌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두려움으로 받습니다. 스스로 잘 믿는다 여기는 이들 가운데 이기적이고, 배타적이고, 폭력적이고, 무례하고, 교만하고, 무절제한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 신령한 것으로 채우라
더러운 것들을 비웠으면 더 아름다운 것으로 채워야 합니다. “갓난 아기들처럼 순수하고 신령한 젖을 그리워하십시오. 여러분은 그것을 먹고 자라서 구원에 이르러야 합니다“(벧전 2:2). ‘순수하고 신령한 젖‘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가 영적인 존재로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자양분이 아닐까요? 인간이 영적 존재라는 말은 육체가 명하는 대로, 즉 나 좋을 대로 살지 않는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그는 홀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다른 이들의 고통에 등을 돌리지 않습니다. 늘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삽니다.

오늘을 가리켜 ‘영성의 시대’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제도로서의 종교가 쇠퇴하는데 비해, 일상적이지 않는 경험을 갈망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뜻일 겁니다. 문제는 영성에 대한 관심이 개인주의를 강화하거나 조장하는 경우도 많다는 사실입니다. 미국 뉴욕 주에 있는 뉴스케테 수도원의 데이비드 수사는 이런 현실을 매우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소위 영성이라는 것을,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이완된 기분 사이를 오가며 그네 타기를 하기 위한 피로회복제로 사용하는 것 같아요. 문제의 뿌리를 찾고자 의미를 탐구하며 참된 신념과 영감에 의존하는 대신에 말이죠. 그 결과 ‘영성’은 사람들의 ‘마지막 약물‘이 되어가고 있어요.“(뉴스케데 수도승들, <행복을 꿈꾸는 수도원>, 박효섭 옮김, 푸른숲, p.170)

참된 영성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세계와 무관한 정신적 평안에 안주하게 하지 않습니다. 참된 영성가들은 인간의 음습한 욕망으로 인해 눅진눅진해진 현실에 하나님의 뜻을 끌어들이기 위해 분투합니다. 사람들에게 인간이 마땅히 지향해야 할 삶의 방향을 가리키고, 메마른 사회를 인정이 넘치는 곳으로 바꾸기 위해 헌신합니다. 이런 일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하늘로부터 오는 자양분을 자꾸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깨달음과 감격,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이에게 주어지는 기쁨을 맛보아야 지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 기쁨을 맛본 이들에게서 우리는 천진함을 봅니다. 그들의 얼굴은 맑고 눈빛은 순후합니다. 그들은 무거운 현실에 짓눌리기는커녕 명랑함으로 주변에 드리운 우울과 어둠을 몰아냅니다.

우리가 정녕 순수하고 신령한 젖을 그리워하는 사람이라면 자꾸만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여쭙고, 주님의 말씀으로 우리 속을 채워야 합니다. 주님이 사람들을 대하던 것처럼 우리도 이웃들을 대해야 합니다. 그것은 자기 증여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말을 잘 압니다. 자기도 상처를 입었지만 다른 상처 입은 동료를 치료하기 위해 자기 몸에 감겼던 붕대를 푸는 존재가 바로 상처 입은 치유자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선물로 내줄 수 있는 것은 우리 삶에 고통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물질적으로 여유가 있어서도, 시간이 넉넉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이 우리를 통해 이웃들에게 흘러가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순수하고 신령한 젖을 먹은 사람은 비애감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순수한 기쁨을 느낍니다. 그 기쁨은 자기가 남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는 확신에서 옵니다.

• 자비를 입은 사람답게
예수님의 길은 사실 모든 사람에게 달가운 길은 아닙니다. 그 길은 좁은 문을 통과해야 하는 길이고, 자기 욕망을 거스르는 길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 해도 흔들림조차 없이 그 길을 걷지는 못합니다. 가끔은 회의에 빠지기도 하고, 욕망이 이끄는 대로 살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모른 척하며 달콤한 유혹에 넘어갈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가끔은 방향을 잃고 비틀거리거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다시 일어나 그리스도라는 푯대를 바라보며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그릇된 욕망은 이런 과정을 반복하며 순화됩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가리켜 ‘사람에게는 버림을 받으셨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받은 살아 있는 귀한 돌‘(벧전 2:4)이라고 말합니다. 누군가에게 버림을 받는 것처럼 쓸쓸한 일이 또 있을까요? 우리는 버림을 받을까 두려워 세상과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며 살지만, 주님은 버림받음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이 버린 돌을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의 모퉁잇돌로 삼으셨습니다. 이 표현 속에서 저는 베드로의 유머를 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어부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별칭을 부여하셨습니다.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그 별칭에 ‘살아 있는‘과 ‘귀한’이라는 형용사를 붙여 주님께 돌려드리고 있습니다.

며칠 전, 후암동 쪽으로 산책을 하던 중에 쪽방촌 사역을 하는 한 목사님을 우연히 만났습니다. 그가 잡아 이끄는 대로 그 자그마한 교회에 들러 잠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노숙인들을 위한 사역 이야기, 생필품이 부족한 이들이 언제라도 S.O.S를 칠 수 있도록 마련된 희망 우체통 이야기, 노숙인들의 자립과 재활을 위해 마련한 공방에서 만드는 ‘희망의 등‘ 이야기는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우리 시대의 갈릴리에서 아주 열정적으로 일하고 계셨습니다. 예배실 앞에 걸린 십자가도 노숙생활에서 벗어나 목공 기술을 배운 분이 만든 첫 작품이었습니다. 헤어질 무렵 목사님은 피아노 위에 놓여 있던 십자가를 제게 선물로 주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거절했지만 막무가내로 권하는 바람에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십자가는 원줄기에서 두 갈래로 나란히 뻗어 나온 나뭇가지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세로축으로 삼고, 각각의 가지에 가로대를 덧대 만든 것이었습니다. 두 개의 십자가가 나란히 있는 셈입니다. 그 중 하나는 가로대가 아주 낮은 곳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그것을 베드로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만든 것이라 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고 합니다. 나란히 서 있는 십자가에 그는 ‘동행’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십자가가 아름다울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에는 그리스도의 피가 배어 있습니다. 샬롬의 세상, 하나님의 꿈이 이루어진 세상을 열기 위해 분투하던 분의 절절한 신음소리가 배어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은 꺼칠꺼칠한 산 돌입니다. 많은 이들이 그 돌에 걸려 넘어집니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불편해합니다. 십자가가 구원의 상징일 때는 좋지만, 그게 우리 삶의 방식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면 힘들어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산 돌이신 주님에게서 꺼칠꺼칠한 것을 제거하고 매끈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복음의 변질입니다. 변질된 복음은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이끌지 못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주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고 거룩한 민족이고,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우리는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빛에 속한 사람입니다. 힘들더라도 주님의 아름다우심을 세상에 드러내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이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생명의 향기입니다. 세상이 어둡다고 투덜거리기보다는 차라리 좋은 세상 만들기 위해 아주 작은 실천이라도 시작하는 용기를 내야 합니다. 새해가 우리에게 잊을 수 없는 영적 진보의 시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2년 01월 02일 10시 20분 0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