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 감화의 그림자
설교자 김기석
본문 행 5:12-16
설교일시 2022-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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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화의 그림자
행 5:12-16
(2021/01/09, 주현절 후 제1주)

[사도들의 손을 거쳐서 많은 표징과 놀라운 일이 백성 가운데서 일어났다. 그들은 모두 한 마음이 되어서, 솔로몬 행각에 모이곤 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누구 하나, 감히 그들의 모임에 끼여들지 못하였다. 그러나 백성은 그들을 칭찬하였다. 믿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나면서, 주님께로 나아오니, 남녀 신도들이 큰 무리를 이루게 되었다. 심지어는 병든 사람들을 거리로 메고 나가서, 침상이나 깔자리에 눕혀 놓고, 베드로가 지나갈 때에, 그 그림자라도 그들 가운데 누구에게 덮이기를 바랐다. 또 예루살렘 근방의 여러 동네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병든 사람들과 악한 귀신에게 시달리는 사람들을 데리고 모여들었는데, 그들은 모두 고침을 받았다.]

• 증인으로 산다는 것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매해 1월 6일은 주현절입니다. 성탄절로부터 열 이틀째 되는 날입니다. 주현절은 주님이 세상 앞에 당신의 거룩한 모습을 드러내신 것을 기념하는 날로 사순절이 시작되는 성회 수요일까지 이어집니다. 서방교회에서는 이 절기를 동방박사가 예수님을 찾아온 날로 지키고, 동방교회에서는 주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 받으신 것을 기념합니다.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께 드린 황금과 유향과 몰약은 각각 그리스도의 왕 되심과 구원의 은혜 그리고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상징합니다. 주님이 세례를 받고 뭍으로 올라오실 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막 1:11) ‘좋아한다’라고 번역된 ‘유도케오’(eudokeo)는 ‘크게 만족한다‘(well pleased)는 뜻입니다. 주님의 삶이 혹은 마음 씀이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의 지혜자는 “믿음직한 심부름꾼은 그를 보낸 주인에게는 무더운 추수 때의 시원한 냉수와 같아서,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다“(잠 25:13)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삶은 이 말씀에 꼭 부합합니다. 이것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요구되는 삶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들의 손을 거쳐서 많은 표징과 놀라운 일이 백성 가운데서 일어났다“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사도들은 더 이상 주님이 골고다 언덕을 오르실 때 두려움에 사로잡혀 마치 양떼가 흩어지듯 달아났던 그 사람들이 아닙니다. 부활의 아침이 밝아왔을 때에도 골방문을 걸어 잠근 채 어쩔 줄 몰라 하던 그 사람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광장에 나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기 시작했고, 유대인들이 십자가로 내몰았던 그 분을 하나님께서 죽음의 고난에서 풀어서 살리셨다고 선언했습니다(행 2:24). 그들은 놀라운 일도 행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의 아름다운 문 곁에서 구걸하던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에게 “금과 은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행 3:6)라고 말함으로 그를 고쳐주었습니다. 예수는 십자가 처형과 더불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사도들의 증언과 삶을 통해 오히려 더욱 생생하게 되살아났습니다.

누가는 사도들을 통하여 나타난 사건을 ‘표징과 놀라운 일‘이라고 말합니다. 표징을 뜻하는 ‘세마이온(semeion)은 뭔가를 ’가리켜 보이는 표‘를 뜻하는 말입니다. 놀라운 일을 뜻하는 테라스(teras) 어떤 징후나 조짐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들을 통하여 나타난 기적들은 모두 뭔가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옛말을 빌려 말하자면 예수님이 달이라면 기적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보라는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강력한 힘이 믿는 이들 사이에서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이 내리시면 너희가 능력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그 능력이 그들을 감싸고 있었습니다. 그 능력 안에서 그들은 한 마음이었습니다. 사도들의 증언을 들은 이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솔로몬의 행각에 모이곤 하였습니다. 마치 자석에 끌리는 쇠붙이처럼 그들은 모였습니다.

• 백성들의 칭찬
그러나 그 모임에 감히 끼어들 생각을 하지 못하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이들은 누굴까요? 성전 권위자들의 미움을 사기 싫은 사람들일 겁니다. 사도들은 공의회에 의해 불온한 사람들로 이미 낙인 찍힌 바 있습니다. 공의회는 사도들이 백성들을 가르치는 것과 예수의 부활을 선전하는 것에 격분해서 그들을 잡아 옥에 가두고 심문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절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명령했습니다(행 4:18).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멈출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가슴에 불이 붙은 사람들입니다. 예수의 이름이 그들을 춤추게 했습니다. 시드니 카터의 시에 아론 코플랜드가 곡을 붙인 ‘춤의 왕‘을 들어보셨는지요? 시인은 태초부터 있었던 생명의 일렁임, 예수 안에서 약동했던 그 힘을 ‘춤’이라는 은유를 통해 드러내려 합니다. “이 세상이 창조되던 그 아침에 나는 아버지와 함께 춤을 추었다“라고 시작되는 노래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갈릴리 활동, 그에 따른 박해와 십자가, 그리고 땅속에 묻히심까지 이어집니다. 그 모든 과정 속에서 생명의 춤은 지속됩니다. 마지막 절이 참 절절합니다.

“어리석게도 그들 좋아 날뛰지만
나는 생명이다 결코 죽지 않는다
네가 내 안에 살면 나도 네 안에서
영원히 함께 살련다
춤춰라 어디서든지 힘차게 멋있게 춤춰라
나는 춤의 왕, 너 어디 있든지
나는 춤 속에 너 인도하련다.“

우리는 그 생명의 춤을 함께 추자고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영이 우리 속에 있으면 춤추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생명의 춤을 추는 사람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새로운 세계,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고 있음을 직감했습니다. 이기심과 탐욕이 지배하던 세상,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세상에서, 나누고, 섬기고, 아껴주고, 함께 생을 경축하는 이들이 등장한 것입니다. 12절부터 14절 사이에 생명의 일렁임을 나타내는 표현이 연이어 등장합니다. ‘한 마음이 되다‘, ‘백성들이 그들을 칭찬하였다‘, ‘믿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났다‘가 그것입니다.

오늘의 교회에 꼭 필요한 징표들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아닌 사람들의 이해관계나 특정한 사람의 카리스마가 지배하는 교회는 결코 ‘한 마음‘이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요 13:35)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의 교회가 추문거리로 전락한 것은 한 마음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고, 새로운 세상의 비전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지난 한 해 동안 개신교인들 40만 명이 교회를 떠났다고 합니다. 이런 이탈 현상은 가속화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예수의 춤, 생명의 춤이 아니라 욕망의 춤을 추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근본을 다시 세워야 할 때입니다.

• 흰 그림자의 길
표징과 놀라운 일은 사도들의 적극적 행위를 통해서만 나타난 게 아닙니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다른 이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쳤고, 진리의 아름다움을 드러냈습니다. 사람들은 병든 사람들을 거리로 메고 나가서, 침상이나 깔자리에 눕혀 놓고, 베드로가 지나갈 때에 그 그림자라도 그들의 가운데 누구에게 덮이기를 바랐습니다. 마치 혈루증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술에만 손을 대도 나으리라고 믿었던 것과 같습니다. 예루살렘 근방의 여러 동네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병든 사람들과 악한 귀신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데리고 모여들었고, 그들은 모두 고침을 받았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요 14:12) 하신 주님의 말씀이 현실로 나타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단절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의 가슴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 있었습니다. 주님을 배신했다는 쓰린 기억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주님이 부탁하셨지만 그들은 깊은 잠에 빠져 들었었고, 성전 경비병들에게 붙들려 끌려가실 때에도 달아나기에 급급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누구에게나 자기 인생에서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 기억들은 어두운 그림자가 되어 우리를 괴롭힙니다. 잊을 만하면 나타나 우리 발목을 잡곤 합니다. 세상에 그림자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외면한다고 하여 사라지지도 않고, 다른 일에 몰두한다고 하여 그림자가 옅어지지도 않습니다. 창조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 그림자를 어떠한 형태로든 극복해야 합니다.

성 코르비니안(Corbinian) 전설이 떠오릅니다. 주후 670년 경, 프랑스의 샤트르에서 태어난 그는 독일의 바이에른 주에 베네딕도회 수도원을 설립한 사람입니다. 젊은 시절 그는 나귀 한 마리에 짐을 싣고 베드로의 무덤이 있는 로마를 향해 순례를 떠났습니다. 어느 날 알프스 산자락에 천막을 치고 야영하고 있었는데, 곰 한 마리가 다가와 그의 나귀를 죽였습니다. 나귀의 울부짖음을 듣고 잠에서 깨어난 코르비니안은 천막 밖으로 나와 그 참혹한 현장을 보았습니다. 그는 즉시 목에 걸고 있던 십자가를 벗어 손에 들고 곰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말했습니다. “너는 내 나귀를 죽였다. 내가 네게 명령하노니 이제부터는 네가 내 짐을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그러자 곰은 코르비니안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요하네스 부어스, <하느님의 선율을 노래하라>, 윤선아 옮김, 분도출판사, p.135-7).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전설이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것은 다양한 해석 가능성에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전설에 등장하는 곰은 우리 내부에 있는 거친 공격성, 제어할 수 없는 야성, 혹은 그림자를 가리키는 게 아닐까요? 우리 삶을 가로막고, 우리가 다시 일어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지 못하도록 하는 어두운 힘 말입니다. 부끄러움, 죄책감, 자기 비하, 열등감, 원망, 시기심 등이 그것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그림자로부터 달아날 수도 없고, 쫓아낼 수는 없습니다. 그림자는 곧 다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림자는 마주 보며 변화시켜야 합니다. 코르비니안이 십자가를 손에 들고 곰에게 명령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은총에 의지하여 그림자의 지배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주님은 용서하는 사랑과 무한한 신뢰를 통해 베드로의 어두운 그림자를 환한 그림자로 바꿔주셨습니다. 주님은 어떤 책망의 말도 없이 디베랴 바닷가에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신 후에 ‘내 양 떼를 먹여라‘ 이르셨습니다. ‘환한 그림자‘는 매우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모든 그림자가 환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은총으로 치유된 그림자는 환합니다. 이때부터 그의 삶은 달라집니다. 아픔을 겪어본 사람이라야 지금 아픔을 겪는 이를 위로할 수 있습니다. 부끄러움과 수치심에 몸부림쳐 본 사람만이 지금 같은 상황 속에 있는 이를 붙들어 줄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의 가없는 사랑을 이런 말로 나타낸 바 있습니다.

“그는 자기도 연약함에 휘말려 있으므로, 그릇된 길을 가는 무지한 사람들을 너그러이 대하실 수 있습니다.“(히 5:2)

이 사랑을 경험했기에 베드로와 사도들은 고통 받는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어두운 그림자가 감화의 그림자가 되어 사람들을 치유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이러합니다.

• 수난 속으로
환한 그림자의 길이 밝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사도들과 신도들을 통해 나타난 새로운 세계를 곱게 보지 못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사는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현상 질서를 뒤흔드는 이들을 싫어합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사도들에게 쏠리고, 그들이 한사코 잊고 싶은 이름인 ‘예수’의 이름이 자꾸만 호명되는 것을 그들은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 이름은 자기들의 위선과 협잡과 폭력성을 상기시키는 이름이었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과 사두개파 사람들은 시기심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을 다시 잡아다가 옥에 가뒀습니다. 다음 날 그들은 공의회를 소집한 후에 사도들을 데려다가 그 앞에 세웠습니다. 대제사장이 그들을 심문했습니다.

“우리가 그대들에게 그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엄중히 명령하였소. 그런데도 그대들은 그대들의 가르침을 온 예루살렘에 퍼뜨렸소. 그대들은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씌우려 하고 있소.“(행 5:28)

그들의 ‘엄중한 명령‘은 작동되지 않았습니다. 일찍이 예수님은 제자들이 겪게 될 고난을 예고하시면서 “사람들이 너희를 관가에 넘겨줄 때에, 어떻게 말할까, 또는 무엇을 말할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너희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그 때에 지시를 받을 것“(마 10:19)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눅이 들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베드로와 사도들은 당당하게 말합니다.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행 5:29)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기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 말은 공의회에 던져진 폭탄이었습니다. 그 말 때문에 그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결국 가말리엘의 중재로 사도들은 매를 맞고 풀려났습니다. 그런데도 사도들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것을 기뻐했습니다(행 5:41)

예수의 이름이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로 인해 모욕당하는 시대입니다.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고 했던 신동엽 시인의 외침처럼 예수 정신 아닌 것을 향해 ‘껍데기는 가라‘고 외쳐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사는 모습이 누군가에게 아름다운 삶의 이정표가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으로 나타나기를 빕니다. 주님과 동행할 때 이런 꿈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어두운 그림자를 환한 그림자로 바꿔주시는 주님의 은혜가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2년 01월 09일 12시 15분 46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