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 자기중심성을 여읜 사람
설교자 김재흥
본문 마 6:1~6
설교일시 2024-02-25
오디오파일 s20240225-2.mp3 [20528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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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남에게 보이려고 의로운 일을 사람들 앞에서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그렇게 하듯이, 네 앞에 나팔을 불지 말아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네 상을 이미 다 받았다. 너는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자선 행위를 숨겨두어라. 그리하면, 남모르게 숨어서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아라.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네 상을 이미 다 받았다.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서, 숨어서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리하면 숨어서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 사순절 순례 여정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위에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오늘 감격스러운 첫 예배를 드리는 숨빛청파교회와 은평청파교회의 목사님들과 교우들 위에도 주님의 은혜가 가득 임하길 빕니다. 청파파송교회들과 청파본교회 모두 주님 안에서 날마다 든든히 서가기를 소망합니다. 주중에 큰 눈이 내렸습니다. 여러 곳이 어려움을 겪었는데 특히 강원도의 피해가 큽니다. 주님께서 도우셔서 피해가 빨리 복구되고 속히 일상의 안정을 되찾을 수 있길 빕니다.

사순절이 시작된 지 열흘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벌써 사순절의 1/4이 지나갔습니다. 사순절 순례의 여정을 잘 보내고 계신지요? 사순절은 어디 저 먼 곳에 있는 순례길을 찾아가 걷는 순례가 아닙니다. 우리의 분주하고 복잡한 일상을 순례처럼 살아가야 하는 여정입니다. 그런데 바쁘고 분주함을 핑계로 다른 날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이 시간을 보내고 계신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사순절의 전반부이니 아직 사순절 순례를 제대로 시작하지 않은 분이 계시다면 오늘부터라도 마음을 새롭게 하고 이 복된 순례에 참여하실 수 있길 소망합니다.

사순절은 본래 1세기에는 단 40시간을 지켰다고 합니다. 그러던 것이 3세기에는 6일로 늘어났고,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4세기에는 36일로 늘어났습니다. 샤를마뉴 대제 시절인 731년에는 4일이 더하여져 지금의 40일 전통이 형성되었습니다. 세례 준비자들은 40일간 부분 금식을 행했으며 성경을 공부하고 사도신경과 니케아신조에 기초한 신앙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시대가 지나면서 사순절은 세례 준비자들뿐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이 지켜야 하는 절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중세 유럽에서는 이 기간 동안 금육, 고기 먹는 것을 금지하는 규율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사순절에 들어서기 전에, 고기와 유흥을 즐길 수 있는 축제를 행했는데 그 축제가 사육제, 카니발이었습니다. 현대에 와서는 금육규율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사순절을 예수님의 고난과 생애와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와 금식으로 작게나마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고, 구제를 통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실천하는 기간으로 삼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재의 수요일에서부터 시작했지만, 재의 수요일이 들어가 있는 주일인 산상변화주일부터 시작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산상변화주일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산 위에 올라가셨을 때 그 모습이 환하게 변화하셨음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 이후 제자들과 함께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던 예루살렘으로 나아가셨습니다. 산상변화주일도 ‘변화’를 강조하고 있지만, 사순절 또한 ‘변화’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서에서 ‘40’은 변화의 숫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 노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났습니다. 예수님 또한 40일 광야 시험을 통해 메시야임을 드러내지 않던 존재에서 메시야임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는 존재로 변화되셨습니다. 한 마디로, 사순절은 변화를 위한 순례의 시간입니다. 사순절 순례의 목적지는 기도, 구제, 금식이 아닙니다. 그런 몇몇의 경건행위가 우리 신앙의 목적지일 수는 없습니다. 사순절 순례의 목적지는 ‘예수 닮음’, 우리가 이전보다 예수님을 닮은 존재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 자선과 기도와 금식
사순절에는 기도와 금식과 자선을 강조하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에서 하신 말씀을 기반으로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선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남에게 보이려고 의로운 일을 사람들 앞에서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자선을 행함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람들에게 보이려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자기의 선행을 드러내거나 자랑하는 자는 하나님께 상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자선 행위를 숨기라고, 숨기면 하나님께서 갚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그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기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아라.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그들은 자기네 상을 이미 다 받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기도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신앙을 드러내 보이는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그러기에 기도는 골방에서 드려야 합니다. 아무도 보는 이 없는 공간에서 하나님께 나의 이야기를 진실하게 고할 때 숨어서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시고 응답하시는 겁니다.

금식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금식할 때에, 위선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띠지 말아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남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한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네 상을 이미 받았다.” 금식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자선과 기도보다 훨씬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일까요 사람들은 금식을 한다고 하면 우러러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금식은 하나님께 나의 아픔과 고통의 깊이를 드러내는 것이지 사람에게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금식할 때는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이전보다 더 생기 있게 하고 다녀야 합니다.

- 최고의 것이 부패하면 최악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경건행위에 대한 가르침을 주시면서 ‘위선자들처럼 자선을 베풀지 마라.’ ‘위선자들처럼 기도를 하지 마라.’ ‘위선자들처럼 금식하지 마라’ 말씀하셨습니다. 경건행위를 행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위선자들처럼 하지 않은 것이라는 말씀을 세 번씩이나 강조하셨습니다. 이사야 같은 경우 이사야서 58장에서 올바른 금식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풀어 설명했습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사58:6) 예수님보다 이사야가 경건행위의 의미를 더 잘 풀어 설명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라’는 말씀을 강조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최고의 것이 부패하면 최악의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선, 기도, 금식을 포함한 경건행위들은 모두 이 세상에 하나님을 드러내는 고귀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고귀한 행위들이 사람의 욕망을 위해서 행해진다면 그것들은 최악의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시인 김남주는 <자유>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사람들은 맨날 겉으로는 자유여 형제여 동포여 외쳐대면서도 안으로는 제 잇속만 차리고 있네’ 우리는 겉으로 맨날 자유 민주 국민을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제 잇속만 차리는 이들을 매일 보고 있습니다.

40일 금식기도를 한 분을 본 적이 있습니다. 40일 금식기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분은 자기가 40일 금식기도를 했다는 것을 가는 곳마다 자랑했으며, 자신의 업적으로 내세웠으며, ‘나는 당신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해냈으니 내가 당신들보다 우월하다’는 자세를 보였습니다. 종교적 경건행위보다 존재적 변화가 중요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존재에서 하나님중심적인 존재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자기중심성을 버리지 못한 상태에서 행하는 거룩한 행위들은 위선이 되고 가짜가 되기 십상입니다. 자기중심성을 벗어나 하나님중심성에 이르지 않은 상태에서 행하는 종교행위, 경건행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니, 하지 않음만 못합니다.

- 자기중심성과 하나님중심성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전에 광야에서 40일 동안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곤 악마에게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지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로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네가 나에게 엎드려서 절을 하면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모두 네게 주겠다.” 예수님께서는 그 세 가지 시험 모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겨내셨습니다. 이 광야의 시험 이야기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역시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구나?’ 그거 아닙니다. 예수님이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하나님중심성에 완전히 다다른 분이라는 것과 그런 사람이라야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가져올 수 있다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사도 바울의 변화를 알고 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 예수 믿는 사람을 박해하던 박해자에서 예수를 믿고 전하는 전도자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 안에서 일어난 더 본질적인 변화는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그리스도 중심적인 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빌3:7,8) 바울은 예수를 믿는다 말하면서도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매일 싸움을 반복하던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유대 사람들에게는 유대 사람을 얻으려고 유대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면서도,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을 얻으려고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고전 9:20) 참된 회개는 예수 믿지 않던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의 사람이 그리스도 중심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참된 회개는 교회 다니지 않던 사람이 교회 다니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너를 바꾸려던 사람이 너를 위해 나를 바꾸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성을 여의고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사는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10에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자기의 일을 하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어떤 대단한 말을 해도, 어떤 훌륭한 일을 해도 내 안에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니 그 말과 일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 됩니다. 그러니 자신은 내세울 게 없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를 중심에 놓고 사는 사람은 정반대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고도 자신이 힘들여 해낸 것이라 자랑을 하고, 사람들에게 알아달라고 하며, 매사에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드러내려 애를 씁니다.

- 자기중심성을 여읜 사람
오는 3월 4일은 차혜심 권사님의 6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차혜심 권사님, 우리교회의 관리인 및 주방 담당자로 30여년을 봉사하셨던 권사님이십니다. 키가 150센티미터 남짓한 작은 분이셨습니다. 지금 교회 1층의 세미나실이 본래는 교사실 8평과 관리인 사택 8평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 8평짜리 공간에서 세 식구가 그 오랜 세월을 사셨습니다. 사람들의 출입이 잦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 사생활 보호가 잘 되지 않던 공간이었습니다. 제가 사택으로 살던 곳도 지금 여자화장실과 유치부실로 쓰고 있는 곳이어서 아주 가깝게 지냈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창문 너머로 부침개가 오가던 사이였습니다.

어느 주일 늦은 오후, 밖에 나갔다가 볼일이 있어 다시 교회로 들어왔습니다. 지하실로 내려갔는데 차 권사님의 찬양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권사님이 뭘 하고 계신가 보기 위해 찬양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가보았습니다. 권사님은 혼자 주방청소를 하고 계셨습니다. 권사님은 고무장화를 신으시고 작은 체구 전체를 가리는 방수 앞치마를 입으시고는 호스로 주방 바닥에 물을 뿌리시며 찬양을 부르고 계셨습니다. 그것도 아주 맑고 환한 표정으로, 제가 주방에 들어오는 줄도 모르고. 주일이면 늘 이른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 교인들의 식사 준비와 뒷정리로 예배도 제대로 드리실 수 없었던 권사님, 그 권사님께서 아무도 없는 주일 늦은 오후에 교회 지하에서 혼자만의 예배를 드리셨던 것입니다. 그날 권사님이 부르시던 찬송은 그 어느 예배보다 그 어느 찬양보다 숭고하고 진실되고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차 권사님은 참 험난한 삶을 살아오셨습니다. 언젠가 권사님 살아오신 이야기를 전해듣고 ‘어떻게 그 많은 어려움들을 다 이겨내실 수 있으셨어요?’ 묻는 말에 권사님은, ‘목사님, 저는요 아무것도 제가 한 게 없어요. 그저 다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온 거지요.’라고 밝게 웃으며 답하셨습니다. 권사님의 장례식 날, 예배를 인도하러 갔습니다. 교회는 다니지 않았지만 골목을 사이에 두고 한 동네에서 오래 같이 살았던 아주머니 몇 분도 동행하셨습니다. 그분들에게 차 권사님은 ‘미향이 엄마’였고, 저는 ‘주희 아빠’였습니다. 저는 차 권사님이 키는 작았지만 큰 세계를 드러내 보이며 사셨던 큰 사람이었다고, 참 바르고 선하게 잘 사셨던 분으로 틀림없이 하나님 나라에 가셨을 것이라고, 차 권사님 같은 분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않으면 누가 들어가겠냐고 설교를 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 아주머니들은 말씀하셨습니다. ‘주희 아빠, 주희 아빠 말이 맞아요. 미향이 엄마 참 잘 살다가 가셨어요. 참 좋은 분이셨어요.’

세상을 둘러보면 자기중심성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 반대로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 이는 참 적습니다. 저마다 자기를 중심에 두고 살아가니 이 세상이 점점 사람이 살기 힘든 세상이 되고, 저마다 자기를 중심에 두고 하나님을 믿으니 교회는 점점 빛을 잃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살아갈 때 이 세상은 좀더 살만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믿음 생활할 때 교회는 점점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순절을 통해 예수님의 생애와 고난을 깊이 묵상하며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이 되길 소망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자기중심성을 여의고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을 좀더 사람 살만한 세상으로 만들어가고 이 땅의 교회들을 좀더 참된 교회로 세워갈 수 있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등 록 날 짜 2024년 02월 25일 11시 36분 15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