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50. 세례자 요한의 증언
설교자 김기석
본문 요1:29-34
설교일시 2017/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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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자 요한의 증언
요1:29-34
(2017/12/17, 대림절 제3주)

[다음 날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한 분이 오실 터인데 그분은 나보다 먼저 계시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입니다'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분을 두고 한 말입니다. 나도 이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이분을 이스라엘에게 알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이 또 증언하여 말하였다. "나는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이 분 위에 머무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도 이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게 하신 분이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성령이 어떤 사람 위에 내려와서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임을 알아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하였습니다."]

• '수기욕守其辱'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대림절 셋째 주일입니다. 어둠이 점점 깊어가는 계절입니다. 바람이 코끝을 매섭게 스치던 어느 날 저녁, 공원을 산책하다가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기대하며 하늘을 바라보았지만, 별은 그저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별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별을 바라보는 우리 시선을 인공의 불빛과 오염물질들이 차단하고 있을 뿐입니다. 문득 동방박사들이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 살았다면 성탄의 별을 발견하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별빛의 인도에 따라 주님 앞에 이르렀던 사람들은 그래도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문명화된 시대에 살면서도 길을 찾지 못하고 가리산지리산 헤매고 있으니 말입니다. 조롱과 냉소와 악다구니가 넘치는 세상에서 근근이 버티며 살다보니 마음이 헛헛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우리 마음은 나날이 옹색해져 주님을 모실 여백이 없습니다. 그럴수록 더욱 고요한 시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타고르의 <기탄잘리>를 읽다가 이 대목에서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당신은 그의 조용한 발자국 소리를 못 들었습니까? 그는 오십니다, 오십니다, 늘 오십니다.
순간마다 해마다, 날마다 밤마다, 그는 오십니다, 오십니다, 늘 오십니다.
숱한 노래를 마음의 숱한 느낌에 따라 불러 왔지만 그 모든 가락이 언제나 부르짖었던 것은 '그는 오십니다, 오십니다, 늘 오십니다.'(후략)"

햇빛 밝은 사월에는 숲속 오솔길로 오시고, 칠월 밤비 오는 날에는 천둥 치는 구름 마차를 타고 오시고, 연이은 슬픔에 겨운 우리 마음에도 가만가만 다가오시고, 기쁨 속에도 찾아오십니다. 주님은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오고 계십니다.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마음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는 것뿐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절에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사람 가운데 하나가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는 척박한 유대 광야에 머물면서 자기를 찾아오는 이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제 욕심에 이끌려 다른 이들의 아픔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살아가는 이들을 준엄하게 꾸짖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욕망에 휘둘리며 사느라 나른해진 영혼들을 후려치는 죽비였고, 주님 오실 길을 닦으라고 외치는 들소리였습니다. 그의 말은 거칠었습니다. 힘 있는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모호하고 애매하게 말할 줄 몰랐습니다. 그렇기에 그 말은 살아 움직였습니다. 사람들 속에서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사람들이 척박한 광야로 나갔던 것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기 위해서도 아니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을 보기 위해서도 아니었습니다(마11:7-9). 예언자를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니, 어쩌면 사람들은 그가 메시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제사장들과 레위 지파 사람들이 사람을 보내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그때 요한은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사람들이 또 다시 "당신은 엘리야요", 그도 아니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었을 때 그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그 예언자'는 구원의 시대에 등장할 메시아와 같은 인물을 일컫는 단어입니다. 요한은 자기는 다만 주님 오실 길을 닦는 사람이라면서, 자기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만한 자격도 없다고 말합니다. 요한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를 높이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런 병통에 물들지 않았습니다.

노자 28장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부귀영화를 모르는 바 아니로되 비천하고 낮은 자리에 처하면 천하의 골짜기를 이룬다"(知其榮 守其辱 爲天下谷, 장일순, 이현주 번역). 세례자 요한이 자기를 낮추었다고 해서 그를 비루한 존재로 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현대인들은 인색함의 병에 걸렸습니다. 기독교 전통이 말하는 인색함이란 물질을 아끼는 것만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인정하기를 싫어하는 것이 가장 큰 인색함입니다. 자기를 높이기 위해 남을 깔아뭉개려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수기욕守其辱', 즉 사람들이 싫어하는 그 낮은 자리에 자발적으로 내려가는 것, 바로 그것이 위대한 영혼들이 보여주는 삶의 방식입니다.

•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요한은 어느 날 예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합니다. "보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그 증언 앞에서 참 복잡한 생각이 듭니다. 주님의 모습이 어떻게 보였길래 요한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어깨가 축 처진 사람을 보면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을 다 짊어진 것 같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런 뜻일까요? '죄를 지고 간다'는 말은 실은 '죄를 제거한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요한이 속해있던 공동체가 예수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가 잘 드러나는 구절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유월절에 희생당하는 어린양에 빗대 이해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유대인들은 유월절이 되면 묵은 누룩을 다 제거하고, 누룩이 들지 않은 빵과 쓴 나물을 먹었고, 어린양을 잡아 피 뿌리는 의식을 행함으로 죽음의 자리에서 그들을 구해주신 하나님의 은총을 기렸습니다.

예수는 죄를 제거하는 분입니다. 어떻게 없애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흔히 예수의 피의 공로로 죄를 사한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이 말을 마치 주술처럼 되뇝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피라는 말은 죄와 슬픔과 유한성에 갇힌 인간에 대한 주님의 가없는 사랑을 나타내는 말로 이해해야 합니다. 저는 세상의 모든 죄가 뱀이 선악과를 권하며 건넸던 말, 즉 '네가 신처럼 되리라'라는 말과 연결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확장의 욕망이야말로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원죄입니다. 결국 그런 욕망 때문에 경쟁에 몰두하고, 약자들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소수자들을 배제하고 혐오합니다. 일단 이런 욕망의 회로에 갇히면 하나님도 이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삶이 지속될 때 외로움이 찾아오고, 타인에 대한 두려움이 점점 커집니다. 인간 존재는 본래 상호 귀속적인 존재로 지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들었다는 의미를 저는 그렇게 이해합니다. '너 없이는 나도 없다', 이것이 성경이 기초하고 있는 인간론입니다. 참된 인간의 길에서 벗어날 때 세상은 적대적인 공간으로 변합니다.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또 더 큰 힘을 추구합니다. 이게 바로 벗어날 수 없는 죄의 회로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회로 속에 갇힌 이들을 구해주십니다.

주님은 불의한 자들은 가차없이 꾸짖으셨지만 연약한 자들은 한없는 사랑으로 보듬어 안으셨습니다. 주님은 자기 앞에 있는 이들을 세상에서 더 없이 소중한 존재로 대하셨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주님은 병든 이들의 몸에 손을 대실 때가 많습니다. 정결법에 위배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슬픔의 몸뚱이에 손을 대심으로 그들의 부정함을 당신에게로 옮기셨습니다. 그래서인가요? 이미 세상을 떠난 채희동 목사는 예수를 걸레질하는 분으로 표현했습니다.

"걸레가 자기 몸을 희생하고 바치고 헌신하여 더러운 곳을 닦아내고 깨끗하게 아름답게 하는 것처럼, 십자가가 의미하는 것 또한 자기 희생, 자기 헌신, 자기 내어놓음, 자기 비움, 자기 나눔이 아닌가."(채희동, <걸레질하시는 예수>, 대한기독교서회, 2004년, p.45)

아까 위대한 영혼들의 특색이 '수기욕守其辱'이라 했지요? 영화로운 자리를 탐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낮추고 또 낮추신 예수님이야말로 수기욕의 화신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사랑과 만난 사람은 자기 속에 있는 쓴 뿌리가 녹아내림을 경험합니다. 강압적 방식으로는 죄를 제거할 수 없습니다. 환부를 도려내는 수술처럼 악을 제거해야 할 때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죄는 녹여야 하고, 사랑으로 닦아야 합니다. 죄에서 해방된 사람이라야 창조적인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듯 곤고한 인생이라 해도 삶을 경축하며, 생명의 신비를 찬탄하며 살 수 있습니다.

• 나보다 앞서신 분
세례자 요한은 예수에게서 이런 따뜻함을 보았습니다. 자기는 꾸짖어 깨우치는 사람이었지만, 예수는 사랑으로 생명을 낳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화도 낼 줄 모르는 무골호인이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은 사람들의 생명을 위축시키는 일체의 권위를 준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성전체제가 착취의 도구로 전락한 것을 보고 채찍을 휘두르기도 하셨고, 폭력을 신처럼 숭상하는 헤롯을 두고는 '여우'라고 욕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불의와 협력하기를 단호히 거절하셨고, 약자들의 편에 서서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모든 말과 행동은 생명을 온전케 하는 일에 바쳐졌습니다. 요한은 자기의 의식과 성정이 미칠 수 없는 깊이를 예수님에게서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한 분이 오실 터인데, 그분은 나보다 먼저 계시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입니다'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분을 두고 한 말입니다."(30)

누가복음의 증언을 근거로 하자면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보다 대략 육 개월 정도 먼저 태어났습니다. 생물학적으로 보자면 요한이 먼저 태어난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요한은 예수가 자기보다 먼저 계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시간의 선후를 일컫는 말이 아닙니다. 저는 이것을 하나님의 마음 혹은 영원에 더 가까이 다가선 사람이라는 말로 받아들입니다. 흔히 메시야 예언으로 소개되고 있는 이사야의 말씀도 같은 사실을 가리킵니다.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태어났다. 우리가 한 아들을 모셨다. 그는 우리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 그의 이름은 '놀라우신 조언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고 불릴 것이다"(사9:6)

영혼에는 시간의 선후가 없습니다. 미가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분이 올 거라면서 "그의 기원은 아득한 옛날, 태초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5:2)고 말한 바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내가 있다"(요8:58)고 하심으로 유다인들의 공분을 산 적이 있습니다. 역사의 지평만 바라보는 이들에게는 시간의 선후가 분명하지만, 하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들에게는 시간의 선후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변화산에 오르신 주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셨다는 말 속에 담긴 뜻도 마찬가지입니다.

• 성령이 그 위에 머무시는 분
세례자 요한은 자기도 그분을 몰랐다고 정직하게 고백합니다. 만일 부활하신 주님이 지금 우리 곁에 다가오시면 우리는 그분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아주 오래 전 저희 신학교 학장님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을 때 밤을 지새우던 교수님 한 분이 "학장님이 떠나시고 나니 비로소 그분이 우리 곁에 머물던 천사임을 알겠다"고 말씀하신 기억이 납니다. 인간의 깨달음은 늘 뒤늦게 찾아옵니다. 세례자 요한의 이 고백이 참 중요합니다. '모름'이 중요하다니 무슨 뜻일까요? 성경의 다음 대목에 그 답이 있습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소개한 것은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주님 위에 머무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성령이 어떤 사람 위에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분이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임을 알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그 위에 '머문다'(meno)는 말은 '거처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성령이 누군가를 거처로 삼는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차린 사람이 된다는 말이 아닐까요? 요한복음에서 성령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시는 분(16:8), 사람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분(16:13)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런 분이셨습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세상에 대한 심판인 동시에 진리에로의 초대였습니다. 주님과 만난 사람들은 모두 새로운 삶의 지평에 눈을 떴습니다. 어거스틴은 어둠에 익숙해진 우리의 눈이 진리를 보게 되는 신비한 은총의 순간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오, 영원한 진리여! 참된 사랑이여! 사랑스러운 영원이여!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시니 당신을 향해 내가 밤낮으로 한숨을 짓습니다. 내가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 당신은 나를 들어 올려 나로 하여금 봐야 할 것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 때까지도 그것을 볼 수 있는 시력이 없었습니다. 당신은 황홀한 강한 빛을 나에게 비추어 내 시력의 약함을 물리치셨습니다."(어거스틴, <고백록>, 선한용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08년, p.228)

성령은 온갖 죄의 비늘에 가려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우리들을 들어 올려 보아야 할 것을 보게 하십니다. 그 성령이 예수님을 거처로 삼으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바로 그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머리 위에 머물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요? 허망한 열정, 절망감, 두려움, 냉소, 경멸 같은 것은 아닌지요? 성령이 우리 머리 위에 임하시기를 빌 뿐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거처로 삼아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소원하게 하시고, 그 일을 실천하며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빕니다. 나른한 평안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주님이 오시는 곳으로 달려나야 할 때입니다. 춥고 낮은 곳에서 신음하는 이들의 마음 자리, 삶의 자리로 나아갈 때 우리 영혼의 어둠도 조금씩 물러갈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세상의 아픔과 더러움을 닦아내는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이 거룩한 소명에 기쁘게 응답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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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날 짜 2018년 09월 18일 09시 46분 48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