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34. 강을 건너는 사람들
설교자 신진식
본문 수 4:1-7, 19-24
설교일시 2018/08/26
오디오파일 s20180826.mp3 [7708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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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의 은총
성령강림 후 14번째 주일을 맞고 있습니다. 성령강림절은 교회력에서 가장 긴 절기입니다. 전통적으로 오순절로 시작해서 대림절 직전까지 28주를 보내는 절기입니다. 너무 길어서일까요? 오늘날 교회에서는 이 긴 절기를 반으로 나누어, 하반부를 창조절로 지키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성령강림절기의 마지막 주일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기독교는 신앙의 체험을 시간에 녹여 절기로 만들었습니다. 신앙의 지혜입니다. 막상 절기를 지킬 때는 깨닫지 못하지만, 삶의 어느 순간 우리는 그 지혜를 깨닫습니다. 우리가 절기를 지킨 것이 아니라, 절기가 우리를 지켰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럼에도 일상은 일상이어서, 특별히 낮과 밤 구별 없이 더웠던 올 여름은 폭염과 열대야가 모든 것을 무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성령강림의 은총을 바라며 묵상했던 복음서의 풍경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받으셨던 세례의 풍경입니다. 예수의 삶의 자리를 덮고 있던 하늘이 열리고 예수 위에 비둘기처럼 내려오던 성령, “너는 내 사랑하는 자녀요, 내가 너를 기뻐한다.” 그 열린 하늘에서 들려오는 사랑의 음성.

그 풍경을 눈으로 감상하고 싶어 검색을 하다가 독일의 판화가인 오토 딕스(Otto Dix, 1891-1969)의 “예수의 세례”를 만났습니다. 그 작품은 다른 이들의 작품과는 달리 이 복음서의 풍경을 다소 거칠게 표현했습니다. 철학자 서경식 선생은 오토 딕스의 거친 화풍의 작품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인류가 스스로 만들어낸 지옥의 모습 속에서, 추한 진실을 직시하면서 ‘추함’이 ‘아름다움’으로 승화되는 예술적 순간”을 담고 있다. 오토 딕스의 “예수의 세례”를 바라보면서 오늘의 현실에서 우리에게 주는 성령강림의 의미가 한층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 주님의 언약궤
히브리 성경에도 하나님 백성의 삶의 자리에 강림하시는 주님의 은총을 상징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언약궤입니다. 언약궤는 토라(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와 역사서(여호수아기, 사무엘기, 열왕기)를 잇는 중요한 연결고리입니다.

히브리 성경의 첫 번째 정경(正經)인 토라가 태평성대가 아닌 제국의 포로기 때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은 곱씹을수록 큰 울림을 줍니다. 애초에 하나님의 말씀은 삶의 풍요와 여유 속에서 습관처럼 일상의 사유를 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정답이 아니라, ‘정복당한 자들’, ‘삶의 뿌리가 뽑힌 자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언약궤는 토라의 출애굽기에 처음 등장합니다.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 제국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 산에서 주님과 언약을 맺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제사장의 나라, 거룩한 민족”으로 삼겠다는 언약입니다. 그 언약을 맺은 후에 주님은 언약궤를 만들라고 명령하십니다.

“아카시아 나무로, 길이가 두 자반, 너비가 한 자 반, 높이가 한 자 반 나가는 궤를 만들어라.”(출25:10)

“내가 너에게 줄 증거판을 그 궤 속에 넣어 두어라”(출25:16)

“내가 거기에서 너를 만나겠다. 내가 속죄판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할 모든 말을 너에게 일러주겠다.”(출25:22)

높고 높은 곳에서 내려와, 언약의 증거판을 담은 이 보잘 것 없는 나무 궤에서 자신의 백성과 함께하겠다는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하나님이겠습니까? 토라의 처음을 여는 창세기는 그 하나님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첫째 날에 혼돈한 땅, 공허한 땅, 어둠이 깊음 위에 있는 땅에서 빛을 처음 만드시고,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처음 복을 베푸시며 말씀하셨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창1:28). 여성신학자 백소영은 이 창세기의 텍스트(창1:28)를 히브리 원어의 풍부한 뜻을 살려 윤리적 선언으로 해석했습니다. “살아라! 그리고 살려라!” 그렇습니다. 삶,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지은 사람에게 주신 처음 복이자 거룩한 첫 명령입니다.

‘정복당한 자들’, ‘삶의 뿌리가 뽑힌 자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처음 복과 거룩한 첫 명령은 얼마나 눈물겨운 것입니까? 인간의 탐욕이 만든 힘의 세계, 물질만능의 세계,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스스로를 가난한 자의 하나님,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 나그네를 돌보시는 하나님으로 계시(啓示)하시는 그 하나님은 얼마나 애처롭습니까? 그러나 이 눈물겨움과 애처로움, 그 연약함 가운데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능력을 봅니다. 언약궤는 “제국의 그림자 속에서” 하나님의 연약한 빛, 그 “미광(微光, lucciole)”의 능력을 체험한 하나님 백성들의 신앙고백이요 신앙의 상징입니다.

∎ 당연한 세계에 갇힌 사람들
약속의 땅에서 펼쳐지는 이스라엘의 역사서는 이 언약궤를 앞세우고 시작됩니다. 그러나 사사시대와 왕정시대를 거치면서 이스라엘 땅에서 언약궤의 의미가 퇴색되고 마침내 사라져 없어지는 역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역사서는 포로기 백성의 뼈아픈 후회의 기록이자,참 된 신앙이 무엇인지를 전하는 당부의 서사입니다.

그 가운데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사사시대가 끝나가고 왕정시대가 자리 잡는 역사의 길목에서 우여곡절 끝에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언약궤의 길을 살펴봐야겠습니다. 그 길 가운데 언약궤와 마주한 사람들의 모습을 또한 눈여겨봐야겠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 사무엘이 어렸을 적 언약궤는 실로의 성소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 엘리는 늙어 노쇠했고, 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악행만을 일삼았습니다. 어린 소년 사무엘만이 언약궤 곁을 지켰을 뿐입니다. 어느 날, 이스라엘은 에벤에셀에서 블레셋과 치열한 전투를 합니다. 그리고 크게 패하게 됩니다. 다급해진 이스라엘 장로들은 다음과 같이 의견을 모읍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가 블레셋 사람에게 지도록 하신 까닭이 무엇이냐? 실로에 가서 주님의 언약궤를 우리에게로 모셔다가 우리 한가운데에 있게 하여,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구하여 주시도록 하자!” (삼상 4:3)
그러나 엘리의 두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가 언약궤를 메고 전쟁터 안으로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대패합니다. 하나님의 궤는 빼앗기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합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언약궤를 단지 부적(符籍)처럼 이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
이후 주님의 궤는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아스돗에 있는 다곤 신전에 보관됩니다. 그러나 아스돗 사람들은 주님의 언약궤를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들이 섬기는 다곤 신상이 주님의 궤 앞에 엎어져 나뒹굴어지고, 아스돗 사람들은 악성 종양의 재앙으로 고통당합니다. 그러자 블레셋 통치자들은 주님의 궤를 가드로 옮깁니다. 가드 사람들에게도 주님의 재앙이 내립니다. 그들은 다시 하나님의 궤를 에그론으로 보냅니다. 그러나 에그론 사람들도 하나님의 궤를 감당하지 못하고 이스라엘의 궤를 다른 곳으로 옮겨 달라고 울부짖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의 제사장과 점쟁이들을 소집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예를 지키라고 충고합니다. 그들은 새로 수레를 만들어 아직 멍에를 메어 본 일이 없는 어미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그 수레에 메우고 그 송아지들을 떼어서 집으로 돌려보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궤를 속건제물과 함께 수레에 싣습니다. 그리고 그 암소들에게 언약궤를 맡겨버립니다.

“그 암소들은 벳세메스 쪽으로 가는 길로 곧장 걸어갔다. 그 소들은 큰길에서 오른쪽으로나 왼쪽으로 벗어나지 않고, 울음소리를 내면서 똑바로 길만 따라서 갔고, 그 뒤로 블레셋 통치자들이 벳세메스의 경계까지 따라서 갔다.”(삼상6:12)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의 무게를 감히 감당하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벳세메스 사람들
벳세메스 사람들은 자신들의 땅에 언약궤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기뻐합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의 밭에 있던 큰 바위에서 속죄제를 함께 드립니다. 그러나 그 때 벳세메스 사람들은 무슨 연고인지 주님의 궤 속을 들여다보고 맙니다. 그리고 곧장 저주를 받습니다. 사무엘상은 주님께서 그 백성 가운데 오만 칠십 명을 그날에 치셨다고 말합니다. 벳세메스 사람들은 기럇여아림 주민들에게 전령을 보내어 주님의 궤를 가져가라고 합니다.

벳세메스 사람들은 언약궤를 호기심으로 바라본 사람들이었습니다.

웃사와 미갈
결국 주님의 궤는 기럇여아림의 아비나답의 집에 보관되고 사람들은 아비나답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히 구별해 세워서, 주님의 궤를 지키게 합니다. 그리고 20년이 지납니다. 그 사이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사울을 왕으로 세우고 다시 다윗을 왕으로 세웁니다. 다윗이 왕이 되고 처음 한 일은 기럇여아림 아비나답의 집에 있는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시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궤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어올 때처럼, 새 수레에 실려서 아비나답의 두 아들, 웃사와 아히요의 인도에 따라 예루살렘을 향해 나갑니다. 그러나 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렀을 때에, 소들이 뛰어서 궤가 떨어지려고 하자 웃사가 손을 내밀어 하나님의 궤를 꼭 붙들었는데, 주 하나님이 웃사에게 진노하셔서 웃사는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고 맙니다.

다윗 일행은 잠시 멈칫 하지만, 언약궤를 보관한 가드 사람 오벳에돔의 집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것을 확인하고, 숙고 끝에 하나님의 궤를 다시 옮기기 시작합니다.

“다윗은 주님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옮겼을 때에, 행렬을 멈추게 하고, 소와 살진 양을 제물로 잡아서 바쳤다.” (삼하 6:13)

주님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 밖을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주님의 궤 앞에서 뛰면서 춤을 추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그를 업신여깁니다. 이런 일 때문에 사울의 딸 미갈은 죽는 날까지 자식을 낳지 못하는 저주를 받습니다.

웃사와 미갈은 인습의 억울한 희생자입니다. 웃사는 자신의 집안에 들어온 언약궤를 단지 집안의 소중한 유산으로 여긴 것 같습니다. 웃사는 언약궤는 어떤 신앙의 상징이며 자신의 조상들은 어떻게 언약궤를 모셨는지를 몰랐던 것 같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방식대로 언약궤를 수레에 싣고 이동했으며, 만져서는 안 될 언약궤를 만지고 맙니다.
미갈의 아버지 사울 왕은 그의 통치 내내 언약궤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그의 딸 미갈도 언약궤의 의미를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 강을 건너는 사람들
홉니와 비느하스, 블레셋 사람들, 벳세메스 사람들 그리고 웃사와 미갈. 주님의 언약궤 앞에서 비극을 맞이한 이들이 어떻게 보이십니까? 답답해 보이십니까? 한심해 보이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제국의 그림자 속에서” 깨달은 언약궤의 의미를 잘 모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평범한 “세상 사람들(das Man, 世人)”입니다. 이들은 모두 우리처럼 안온한 자신의 일상을 바라며 그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지금 자신의 세계는 “당연한 세계”입니다. 언약궤는 그들의 질서에 어긋나고, 그들의 삶의 공식에 맞지 않는 것일 뿐입니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던 사무엘기의 언약궤 이야기는 지금 이곳을 당연한 세계로 여기며 사는 인간 군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듯 지금 여기가 전부라고 말하는 인간의 본성을 자기기만이라고 말하며, 이것이 제국의 뿌리 깊은 속살이라고 말합니다. 역사서는 제국의 적나라한 모습을 역사서의 말미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빌로니아 군대가 시드기야 왕을 체포해서, 리블라에 있는 바빌로니아 왕에게로 끌고 가니, 그가 시드기야를 심문하고,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그의 아들들을 처형하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뺀 다음에, 쇠사슬로 묶어서 바빌론으로 끌고 갔다.” (왕하 25:6-7)

제국은 지금 여기, “당연한 세계” 너머를 바라보는 자들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제국은 그들의 자녀를 죽여 미래를 소멸시키고, 그들의 눈을 뽑아 상상력을 고갈시키고, 쇠사슬로 묶어 다시 당연한 세계의 질서로 끌고 옵니다. 성경은 이들을 우상숭배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언약궤를 자기 삶의 중심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란 어떤 사람들이겠습니까?
우리는 언약궤를 앞세워 요단 강을 건넌 여호수아의 당부에 귀를 기울여야겠습니다.

“당신들 자손이 훗날 그 아버지들에게 이 돌들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거든, 당신들은 자손에게 이렇게 알려 주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이 이 요단 강을 마른 땅으로 건넜다. 우리가 홍해를 다 건널 때까지, 주 우리의 하나님이 우리 앞에서 그것을 마르게 하신 것과 같이, 우리가 요단 강을 다 건널 때까지, 주 우리의 하나님이 요단 강 물을 마르게 하셨다. 그렇게 하신 것은, 땅의 모든 백성이 주님의 능력이 얼마나 강하신가를 알도록 하고, 우리가 영원토록 주 우리의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수4:21-24)

언약궤를 자기 삶의 중심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란 누구입니까?
그들은 강을 건너는 사람들입니다.
강을 건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그것은 지금 여기, “당연한 세계”를 넘어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손에 이끌리어, 누군가에 등에 업히어, 건넜던 자신의 홍해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손을 잡고, 누군가를 등에 업고, 그 생명의 온기와 약동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약궤의 은총 가운데 내게 주어진 역사의 강, 내가 속한 시대의 강, 그리고 운명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강을 건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곳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지금 여기의 당연한 세계입니까? 아니면 그 너머의 약속의 땅입니까? 성령강림절기의 마지막 주일, 우리는 언약궤의 의미를 다시한번 되새겨야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의 삶이란 그 강을 건너는 삶임을 깨달아야겠습니다. 약속의 땅을 바라보며 그 강을 건너는 우리의 발걸음마다 언약궤의 은총이 함께 하길 기원합니다.


거둠의 기도
사랑의 하나님. 주님의 은혜 가운데 건넜던 그 홍해를 기억하시고, 우리가 건너야 할 그 강을 건너는 그리스도인 되게 해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8년 08월 28일 09시 40분 17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