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36. 두려움을 떨치고 일어나
설교자 김기석
본문 수 1:1-9
설교일시 2018/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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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1:1-9
(2018/09/09, 창조절 2주)

[주님의 종 모세가 죽은 뒤에, 주님께서 모세를 보좌하던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스라엘 자손 곧 모든 백성과 함께 일어나 요단 강을 건너서, 내가 그들에게 주는 땅으로 가거라. 내가 모세에게 말한 대로, 너희 발바닥이 닿는 곳은 어디든지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광야에서부터 레바논까지, 큰 강인 유프라테스 강에서부터 헷 사람의 땅을 지나 서쪽이 지중해까지, 모두 너희 영토가 될 것이다. 네가 사는 날 동안 아무도 너의 앞길을 가로막지 못할 것이다. 내가 모세와 함께 하였던 것과 같이 너와 함께 하며,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겠다. 굳세고 용감하여라. 내가 이 백성의 조상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을, 이 백성에게 유산으로 물려줄 사람이 바로 너다. 오직 너는 크게 용기를 내어, 내가 이 백성의 조상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을, 이 백성에게 유산으로 물려줄 사람이 바로 너다. 오직 너는 크게 용기를 내어, 나의 종 모세가 너에게 지시한 모든 율법을 다 지키고,오른쪽으로나 왼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하여라. 그러면 네가 어디를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 이 율법책의 말씀을 늘 읽고 밤낮으로 그것을 공부하여, 이 율법책에 씌어진 대로, 모든 것을 성심껏 실천하여라. 그리하면 네가 가는 길이 순조로울 것이며, 네가 성공할 것이다. 내가 너에게 굳세고 용감하라고 명하지 않았느냐! 너는 두려워하거나 낙담하지 말아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의 주, 나 하나님이 함께 있겠다.”]

∙도전 정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또한 태풍과 지진 피해를 입은 일본의 형제자매들에게 임하시기를 빕니다. 어제부터 백로 절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무더위와 폭우를 견디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교우들 가운데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만난 이들이 있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저는 지난 두 주 동안 미국에서 집회를 인도했습니다. 14번의 설교를 했습니다. 다소 고단한 일정이었지만 감사함으로 감당했습니다. 세상 어디에나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이들이 있고, 진리에 대한 목마름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말씀 전하는 자로서의 소명을 새롭게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이번 여정 가운데 제게 크게 들어온 단어는 ‘도전’입니다. 샌프란시스코에 머물 때는 아침 기온이 약 12도 정도였습니다. 바닷바람 때문이었을 겁니다. 점퍼를 걸치고도 다소 춥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놀랍게도 그 기온에 바다 수영을 즐기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젊은 사람만이 아니라 백발의 노인도 있었습니다. 추위를 안 느낄 수는 없을 텐데 그들은 왜 차가운 물속에 뛰어들었을까요? 도전 정신 때문이었을 겁니다. 샌프란시스코 집회를 마치고 휴스턴으로 내려가는 길에 오랫동안 가보고 싶었던 ‘죽음의 계곡 death valley’를 통과했습니다. 몇 시간을 가도 황량한 풍경뿐이었습니다. 해발 마이너스 80미터 지점인 Badwater Basin에서 기온은 43도까지 올라갔습니다. 햇빛은 작열하고, 지열은 뜨거웠습니다. 그늘 한 점 없는 소금 호수를 한 시간 정도 걷는 동안 목은 말랐고, 어질어질했습니다. 동시에 신비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곳을 벗어나도 황량한 풍경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겨우 한 시간 정도만 걸어도 지칠 수밖에 없는 그곳을 커다란 배낭을 메고 며칠을 걷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사서 고생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극지를 탐험하는 탐험가들이 있음을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이들이 그런 트레일을 걷는다는 것은 모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의 존재는 도시적 안일에 빠져 살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만들었습니다. 무사 안일에 맞서 자기 몸과 마음을 극한의 상황 속에 몰아넣는다는 것은 어리석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일체의 애상이나 자기 연민을 떨쳐버리고 자기 존재를 확장하기 위한 여정에 나섰던 것입니다.

가끔 위험한 산을 오르거나 극지를 탐험하는 이들을 보면서 왜 그렇게 위험한 짓을 하느냐고 나무라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인류 문화의 위대한 진보는 자기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위험 속으로 들어간 이들을 통해 구현되었습니다. 위대한 정신 또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복의 매개로 삼기 위해 제일 먼저 요구한 것은 익숙한 세계에서 벗어나라는 것이었습니다. 출애굽 사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출애굽 공동체는 오직 하나님의 약속에만 의지한 채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마실 물도, 먹을 음식도 확보되지 않았지만 그들은 자유를 향한 거대한 여정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시련이 지속되자 어떤 이들은 애굽의 끓는 가마솥을 그리워하기도 했습니다. 애굽에서의 삶이 그렇게 풍요로웠을리 없지만 고통스러운 현실이 과거의 기억을 미화했던 것입니다. 이전에 군대에서 어느 병사가 관물대에 써붙여 놓았던 말이 떠오릅니다. ‘군인의 길=비포장도로’. 해학과 비애가 동시에 담겨 있습니다.

자유 혹은 평화에 이르는 길은 잘 닦인 포장도로가 아닙니다. 거칠고 황량할 뿐 아니라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마땅히 가야 할 길입니다. 민주주의의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질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헌신과 희생을 통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겁 많은 자의 용기
출애굽 공동체는 40년 동안 척박한 광야 생활을 지속했습니다. 1세대들은 거의 다 죽었고, 가나안 땅 진입은 광야에서 태어난 새로운 세대들에게 주어진 책무였습니다.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세상을 떠난 후 출애굽 공동체를 이끈 이는 여호수아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백성을 이끌고 요단 강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는 모세를 가까이에서 모셨던 사람이고 지혜와 용기가 출중한 사람이었지만, 그 많은 백성을 인도해야 한다는 과제 앞에서 전율했습니다. 어떤 일에 최종적인 책임을 진다는 것은 참 두려운 일입니다. 주저하는 그에게 하나님은 그들의 발바닥이 닿는 곳은 어디나 주시겠다고 확언하십니다.

“네가 사는 날 동안 아무도 너의 앞길을 가로막지 못할 것이다. 내가 모세와 함께 하였던 것과 같이 너와 함께 하며,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겠다. 굳세고 용감하여라.“(5-6a)

하나님은 어떤 일을 맡기실 때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함께 주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사람은 주저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세도 처음 소명을 받았을 때 자기는 그 일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예레미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내가 너를 모태에서 짓기도 전에 너를 선택하고,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너를 거룩하게 구별해서, 뭇 민족에게 보낼 예언자로 세웠다”고 하시자, 그는 즉시 “아닙니다, 주 나의 하나님, 저는 말을 잘 할 줄 모릅니다. 저는 아직 너무나 어립니다”(렘1:5-6)라고 말합니다. 어쩌면 이게 마땅한 반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에는 내가 아니면 누가 그 일을 하겠느냐고 나서는 이들도 있습니다. 높은 자리를 좋아하는 목사들을 볼 때마다 그 무모한 열정에 놀라곤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부름을 받는다는 것은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주저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늘 그의 곁에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여호수아의 경우에는 이 약속이 세 가지로 변주되어 나타납니다. ‘함께 하겠다’, ‘떠나지 않겠다’, ‘버리지 않겠다’. 이 강력한 약속 끝에 주님은 ‘굳세고 용감하라’고 명하십니다. 믿음의 사람은 자기 능력을 믿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삽니다. 나는 무능해도 하나님은 능하십니다. 주저하던 여호수아도 몸을 일으켜 세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자꾸 안일한 마음과 작별해야 합니다. 우리 속에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두려움을 넘어서야 합니다.

나치가 유럽을 온통 전쟁의 광기로 몰아가고 있을 때 뮌헨 대학교 학생이던 잉게 숄과 소피 숄 남매는 백장미단을 조직해서 히틀러의 죄악상을 폭로하고 잠들어 있는 사람들이 양심을 깨우다가 결국은 붙잡혀 다른 동료들과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책 제목은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die Weise Rose)입니다. 그들은 두려움이 없어서가 아니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불의를 폭로하는 일에 나섰습니다. 양심이 비겁한 침묵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이렇게 위험을 무릅씀으로 세상을 정화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동화작가인 권정생 선생은 “혁명가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잘못되고 공정치 못한 일이라면 희생을 해서라도 바로 고쳐나가는 사람이 바로 혁명가”라고 말했습니다. 성공회 대학교의 김동춘 교수는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어차피 바뀌지 않을 거니 가만히 있어라‘라는 악마의 속삭임을 물리친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김동춘, <‘겁 많은 자의 용기‘를 넘어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개인의 안일한 행복을 위해 하나님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우리 자신을 주님께 바치는 일입니다. 그것은 평안한 길이 아니라 가시밭길입니다. 하지만 잊지 마십시오. 그 좁은 길을 걸어야 마침내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꼭 붙들 때 우리는 세상 풍조에 휘둘리지 않는 든든한 중심을 얻게 될 것입니다. ‘굳세고 용감하여라’. 여호수아에게 주셨던 이 말씀이 지금 우리에게 천둥처럼 다가옵니다.

∙뿌리 박기
하지만 이런 염려, 저런 걱정에 시달리느라 멍이 든 우리 마음은 작은 시련 앞에서도 비명을 지르고, 작은 바람 앞에서도 이리저리 흔들립니다. 기도를 해보려 하지만 덧없는 생각들이 떠올라 마음을 분산시킵니다. 하나님은 저 멀리 계신 것 같습니다. 가까이 있는 이들이 위안이 되기는커녕 둔중한 무게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선하게 살려는 의지는 약해지고, 소명조차 흐릿해집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그런 분심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일러주셨습니다. “이 율법책의 말씀을 늘 읽고 밤낮으로 그것을 공부하여, 이 율법책에 씌어진 대로, 모든 것을 성심껏 실천하여라.“(8a) 백성을 이끄는 일만으로도 24시간이 부족할 지경인데,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말씀을 읽고 공부하라니요. 도무지 가능한 일처럼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깊은 산중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자꾸 지도와 나침반을 이용해야 하는 것처럼, 인생의 길 위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꾸준히 공부하고, 또 배우고 익힌 대로 사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시련의 시간, 권태로운 시간, 회의의 시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 속으로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거품이 이는 얕은 물가를 벗어나 깊은 바닷속으로 자맥질해 들어갈 때 고요함을 느끼는 것처럼, 하나님의 마음과 깊이 접속해야 마음이 고요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일상을 더 철저하고 진득하게 살아내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 읽기와 묵상을 통해 자주 하나님께 길을 여쭈어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길을 잃지 않게 됩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말씀을 읽지만, 어느 순간 말씀이 우리를 읽기 시작합니다. 말씀은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마치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린 나무처럼 어지간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을 공부하고, 묵상하고, 성심껏 실천하라고 하신 것은 그렇게 해야 비로소 그가 독립적인 영혼으로 우뚝 설 수 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우리를 더 큰 존재로 빚어줍니다. 신앙생활의 보람은 자기를 넘어서는 데 있습니다. 자기 연민이나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꾸 우리를 누군가에게 선물로 주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성육신적 삶입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여전히 자아의 한계에 갇혀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거룩한 삶은 간 곳 없고, 욕망의 인력에 속절없이 끌려가는 이들 말입니다.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담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수난의 어두운 그림자가 닥쳐올 때 주님은 세상에 남겨질 제자들을 이렇게 격려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16:33b)

우리에게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 있습니까? 특정한 사람들에게 수치심을 안겨주고 약자들을 수단으로 삼는 문화에 맞서는 일은 언제나 어려운 도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일을 위해 부름 받았습니다. 세상에서 악이 승리하기 위한 조건 가운데 하나는 선한 사람들의 침묵입니다. 성령 충만했던 사도들은 박해와 위협에 굴하지 않고 담대하게 주 예수를 전했습니다. 우리가 교회로 부름을 받은 까닭은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 주기 위해서입니다.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압송된 바울이 초조함과 두려움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아피온 광장과 트레스 마을까지 그를 만나기 위해 찾아온 신자들 때문이었습니다. “혼자 싸우면 지지만, 둘이 힘을 합하면 적에게 맞설 수 있다.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전4:12). 우리는 서로에게 힘을 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도전 정신‘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외적 조건에 도전하는 것도 위대한 일이지만, 자기 속에 있는 두려움과 맞서는 것도 위대합니다. 욕망의 문법에 따라 살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비행기 안에서 설교 준비를 마치고 저는 휴스턴에서 잠시 방문했던 로스코 채플(Rothko Chapel)에 관한 책을 읽었습니다. 평화를 위해 봉헌된 그 채플의 설립자인 도미니크 드 메닐(Dominique de Menil)의 딸이 어머니를 추억하며 전하는 이야기가 경이로웠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이틀 전 도미니크는 딸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창조하기를 기다린단다.”(Dominique de Menil, , Rothko Chapel Book, 2010, p.8)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했지만 딸은 곧 그것이 우리가 삶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야 한다는 말임을 알아차렸습니다. 이게 어쩌면 우리에게 부과된 평생의 과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허물 많고, 유약한 우리들이지만 우리는 주님의 빛을 받아 거룩한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삶을 향해 나아갈 용기를 내십시오. 담대하십시오. 올 가을, 우리 삶을 통해 하나님의 꿈이 이루어지고,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현존이 뚜렷이 드러날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8년 09월 09일 03시 41분 06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