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39. 이와 같은 때에
설교자 김기석
본문 약5:13~20
설교일시 2018/09/30
오디오파일 s20180930-1.mp3 [14129 KBytes]
목록

이와 같은 때에
약5:13-20
(2018/09/30, 창조절 제5주)

[여러분 가운데 고난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찬송하십시오. 여러분 가운데 병든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장로들을 부르십시오. 그리고 그 장로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고, 그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십시오. 믿음으로 간절히 드리는 기도는 병든 사람을 낫게 할 것이니, 주님께서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은 것이 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낫게 될 것입니다. 의인이 간절히 비는 기도는 큰 효력을 냅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같은 본성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비가 오지 않도록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니, 삼 년 육 개월 동안이나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으며, 다시 기도하지, 하늘이 비를 내리고 땅은 그 열매를 맺었습니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서 진리를 떠나 그릇된 길을 가는 사람이 있을 때에, 누구든지 그를 돌아서게 하는 사람은 이 사실을 알아두십시오. 죄인을 그릇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사람은 그 죄인의 영혼을 죽음에서 구할 것이고, 또 많은 죄를 덮어줄 것입니다.]

∙부끄러운 현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가로운 평화를 갈구하지만 우리 사회는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늘 역동적입니다. 지금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신뢰의 토대가 무너져 진짜와 가짜가 뒤섞이고 있는 현실 아닐까요? 가짜 뉴스가 무분별하게 만들어지고 무차별적으로 유포되고 있습니다. 가짜 뉴스를 만들고 그것을 유포함으로 혐오와 적대관계를 확산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며칠 전(9월 27일자) 한겨레신문은 가짜 뉴스의 진원지 가운데 하나로 에스더 기도운동본부라는 선교 단체를 지목했습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기도한다는 그들이 한국 사회의 분열을 조장하는 가짜 뉴스의 숙주 혹은 매개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 큰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특정한 사람들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거나, 거짓을 지어내는 종교는 참 종교일 수 없습니다. 자기 잣대를 가지고 다른 이들을 함부로 재단하거나, 자기들의 그릇된 신념을 관철시키기 위해 거짓말을 유포하는 이들이 어떻게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열심은 좋은 것이지만 그것이 바른 지식과 결합하지 않으면 파괴적인 결과를 내게 마련입니다. 바울도 유대인들의 그릇된 열심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증언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열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열성은 올바른 지식에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고, 자기 자신들의 의를 세우려고 힘을 씀으로써, 하나님의 의에는 복종하지 않게 되었습니다.”(롬10:2-3)

이번 주중에 미국의 클레어몬트 피처 칼리지 사회학과 교수인 필 주커만의 책 <종교 없는 삶>이란 책을 읽었습니다. 책의 부제는 ‘불안으로부터 나는 자유로워졌다’입니다. 본래 제목은 <세속적인 삶을 살다Living the Secular Life>이고 부제가 ‘옛 물음에 대한 새로운 대답New Answers to Old Questions’인데 출판사가 임의로 제목과 부제를 바꾸었습니다. ‘불안으로부터 나는 자유로워졌다’라는 문장이 참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마치 종교가 사람들의 불안을 조장하는 것처럼 전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무종교인’이 증가한 현상에 주목하면서 그 원인을 몇 가지 지적하고 있습니다. 첫째, 기독교와 보수적인 정치권 사이의 노골적인 합작입니다. 종교를 가질까 말까 망설이던 사람들이 그런 행태를 보며 주저 없이 종교로부터 멀어졌다는 것입니다. 둘째, 가톨릭 사제들의 소아성애 스캔들이 불러일으킨 정신적 환멸과 반작용의 결과입니다. 셋째, 여성 임금 노동력의 현저한 증가가 가져온 결과입니다. 분주해진 여성들은 옛날처럼 교회 일에 열정적으로 참여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넷째, 미국 문화에서 동성애를 더욱 많이 인정하게 된 현실과도 관련됩니다. 보편적 인권 의식이 높아가는 상황에서 교회는 퇴행적 집단처럼 인식된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인터넷의 보급입니다. 인터넷을 통해 사람들은 종교 전통에 대한 비판이나 노골적인 공격에 노출될 뿐 아니라, 자신의 종교에 대해 남몰래 의심을 품고 있던 사람들을 비슷한 사람들과 즉각 연결시켜줌으로써 기성 종교에서 분리될 용기를 심어준다는 것입니다.(필 주커만, <종교 없는 삶>, 박윤정 옮김, 판미동, 2018년 9월 11일, p.124-130 참조)

저는 필 주커만의 분석에 대체로 동의하지만, 그가 종교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에는 다 동의하지 않습니다. 사회학자인 그는 종교의 현상만 다룰 뿐, 종교의 깊이 즉 역설 속에 있는 진리에는 주목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가 분석한 내용은 침체 상태에 빠진 한국의 기독교의 현실을 비춰주는 거울임은 분명합니다. 이제는 차근차근 신앙적 삶의 기초부터 다시 쌓아야 할 때입니다.

∙인생의 사계
삶은 언제나 고단하지만 우리가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은 생각할수록 놀랍습니다. 히브리의 한 시인은 “내가 이렇게 빚어진 것이 오묘하고 주님께서 하신 일이 놀라워, 이 모든 일로 내가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내 영혼은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압니다”(시139:14)라고 노래했습니다. 개역한글판 성경은 이 구절을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어려운 말이긴 하지만 ‘神妙莫測’이라는 단어가 우리 심정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신비롭고 기묘해서 헤아릴 수 없다는 뜻이니 말입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어떨지 몰라도 우리는 하나의 신비입니다. 그렇기에 주어진 인생을 잘 살아내야 합니다.

태어남, 성장, 쇠퇴, 죽음은 인생의 사계절이라 할 만합니다. 전도서 기자는 “하나님은 모든 것이 제때에 알맞게 일어나도록 만드셨다”(전3:11a)고 말했습니다. 성공과 실패, 자부심과 부끄러움, 희망과 절망, 어느 것 하나 우리 인생 아닌 것이 없습니다. 세계적인 아이돌 그룹인 방탄소년단BTS의 리더인 RM 김남준은 며칠 전 유엔아동기금 캠페인 행사에서 자기가 걸어온 나날을 돌아보며 이제는 자신을 온 힘을 다해 끌어안고 조금씩 사랑해보려 한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제 실수 했더라도 어제의 나도 나이고, 오늘의 부족하고 실수하는 나도 나입니다. 내일의 좀 더 현명해 질 수 있는 나도 나일 것입니다. 이런 내 실수와 잘못들 모두 나이며, 내 삶의 별자리의 가장 밝은 별무리입니다. 저는 오늘의 나이든, 어제의 나이든, 앞으로 되고 싶은 나이든, 제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스물 네 살 청년의 말 속에 깊은 삶의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남과 비교하며 열등감에 사로잡혀 살기보다는 조촐할망정 자기 삶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잘 사는 길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일러줍니다.

야고보는 지금 고난을 받는 사람은 기도하라고 권고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고난은 살면서 겪는 이런저런 인생의 시련이라기보다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겪어야 하는 고통을 가리킵니다. 고난 속에서 기도해야 하는 까닭은 그런 상황이 해결되기를 바라서이기도 하지만, 그 상황이 우리에게 주어진 뜻을 깨닫고,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계기로 삼기 위함입니다. 기도는 이런저런 충격으로 조각난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는 일인 동시에, 그 상처를 영광의 흔적으로 바꾸는 일입니다.

지금 즐거운 사람은 찬송을 주께 바쳐야 합니다. 찬송은 특히 시편 찬양(psalleto)을 뜻합니다. 시편 찬양은 공동체의 노래입니다. 믿음 안에서 얻는 즐거움은 홀로 누릴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 더불어 누릴 때 더욱 깊어지는 법입니다. 물론 찬송은 즐거울 때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곤고할 때도,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도 믿음의 사람들은 찬송을 불렀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옥중에서 찬송을 바쳤습니다.

야고보는 지금 병든 사람들은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라고 권고합니다. 초대받은 장로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고, 그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병든 사람‘은 그릇된 삶을 지속함으로 인해 몸과 영혼이 병든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십시오”라는 권고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죄’라고 번역된 하마르티아hamartia는 과녘을 빗나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부적절한 삶은 자기 자신도 망가뜨리지만, 그가 속한 공동체도 망가뜨리는 법입니다. 공동체 앞에 입힌 잘못을 고백할 때 진정한 치유가 시작됩니다.

∙기도의 능력
세상에 허물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홀로 살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대니얼 디포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의 주인공은 무인도에서 28년을 살았지만 그 무료한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도시에서 살았던 기억을 반추할 수 있었던 덕분이었고, 식인종에게 잡아먹힐 뻔했던 프라이데이라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이의 존재에 빚을 지고 살아갑니다. 남아프리카의 반투어에서 유래한 우분투(ubunntu)라는 단어는 데스몬드 투투 주교를 통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말인데, 이 단어는 한 두 마디 말로 옮기기 어렵습니다. 우분투는 인간이 갖추어야 할 기본 조건으로, 우리가 서로 얽혀 있는 존재라는 사실에 근거한 것입니다. 우분투가 있는 사람은 마음이 열려 있어 기꺼이 남을 도우려 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인정하는 여백이 큽니다.

믿음의 사람들이야말로 우분투를 품고 사는 참 사람입니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고, 다른 이의 허물을 사랑으로 덮어주고, 이웃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짊어지는 것이야말로 신앙적 우분투라 할 수 있습니다. 군목 시절 철책선 부대 예배를 인도하러 갈 때면 늘 동행하던 군종병이 있는데, 그가 즐겨 부르던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다 들어보거나 불러보셨을 것입니다.

“당신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릴 때/주님은 아시네 당신의 약함을/사랑으로 돌봐주시네/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이 곡을 듣는 병사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격오지에서 외로움과 두려움이 사무칠 때 저기 어딘가에서 나를 위해 기도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힘을 얻었습니다. 지금 우리 가운데도 곤고한 시간을 지나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공동체의 책임은 그들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것입니다. 우편비행선 조종사로 일하던 생 텍쥐페리는 사하라 사막에 불시착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막 한 복판에서 구조를 기다리면서 그는 극한의 고독과 절망감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그는 조난당한 것이 자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며 초조함 속에 자기의 무사 귀환을 기다리는 가족들과 동료들도 조난자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그는 살아야 할 용기를 가다듬었습니다. 저만치에 있는 사람들이 생명이 끈이 되어 그를 산 자의 땅으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책임적 존재여야 합니다.

야고보는 의인이 간절히 비는 기도는 큰 효력을 나타낸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의인이란 주님을 신뢰하고 그 뜻을 따르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는 엘리야를 예로 듭니다. 악한 권력자인 아합의 학정에 맞서던 그가 비가 오지 않게 해달라고 하자 삼 년 육 개월이나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시 비를 달라고 기도하자 비가 내렸고 땅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바치는 기도는 어떤 기도입니까? 저는 마음이 스산할 때면 시인 안도현의 ‘새해 아침의 기도’를 읽곤 합니다.

“나 자신과 내 가족의 행복만을 위해 기도하지 말고,
한 번이라도
나 아닌 사람의 행복을 위해 꿇어앉아 기도하게 하소서.
한 사람 한 사람의 기도가 시냇물처럼 모여들어 이 세상 전체가
아름다운 평화의 강이 되어 출렁이게 하소서.

새해에는 뉘우치게 하소서.
남의 허물을 함부로 가리키던 손가락과, 남의 멱살을 무턱대고 잡던 손바닥과,
남의 가슴을 향해 날아가던 불끈 쥔 주먹을 부끄럽게 하소서.
남을 위해 한 번도 기분 좋게 열려본 적이 없는 지갑과,
끼니 때마다 흘러 넘쳐 버리던 밥이며 국물을 참으로 부끄럽게 하소서.
무심코 내뱉은 침 한 방울, 말 한 마디가 세상을 얼마나 더럽히는지,
까맣게 몰랐던 것을 부끄럽게 하소서.
그리고 인간과 자연에 대한 모든 무례와 무지와 무관심을 새해에는
부디 뉘우치게 하소서.”

시인의 기도는 실업의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과 노숙자들, 방황하는 젊은이들, 반목을 일삼고 분열을 일삼는 정치인들, 민족의 화해와 상생까지 포괄합니다. 우리가 이런 기도를 지속할 때 기도의 효력이 꼭 나타날 것입니다. 이루어지지 않을 줄로 믿고 기도하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바른 길로 이끄는 사람
야고보는 마지막으로 진리를 떠나 그릇된 길로 가는 사람을 돌아서게 하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진리를 떠나 그릇된 길로 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무지, 방심, 절망, 불확실한 삶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은 사람들, 스스로 사유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악한 종교인들의 먹이가 되기 쉽습니다. 유혹과 죄는 소리 없이 쌓이는 먼지처럼 천천히 그러나 확고하게 우리 영혼을 거미줄처럼 동여맵니다. 세상과 타협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우리 양심은 예민함을 잃어버립니다. 진리에게서 멀어져 그릇된 길로 가면서도 그것을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말씀 앞에 서야 하는 까닭은 양심을 벼리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바를 더욱 굳게 간직하여, 잘못된 길로 빠져드는 일이 없어야 마땅하겠습니다”(히2:1).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네 동생이 어디 있느냐?’ 물으십니다. 동생으로 상징되는 사람들을 돌보고, 그들을 지키는 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다니엘은 “지혜 있는 사람은 하늘의 밝은 빛처럼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길로 인도한 사람은 별처럼 영원히 빛날 것”(단12:3)이라고 말합니다.

미혹하는 영들이 사람들의 영혼을 사로잡아 종으로 삼으려 합니다. 악한 시대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시대를 통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의 말씀에서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독교에 대한 세간의 시선이 싸늘한 이 시대에 누가 뭐래도 예수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바로 우리들이 그 사람입니다. 주님의 손길이 우리를 인도하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8년 09월 30일 09시 54분 0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