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26. 신앙 여정
설교자 이재훈
본문 갈 5:1,13-25
설교일시 2019/06/30
오디오파일 s20190630.mp3 [24171 KBytes]
목록

신앙 여정
갈 5:1, 13-25
(2019/06/30, 성령강림 후 제3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신 한 마디 말씀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고 하면, 피차 멸망하고 말 터이니, 조심하십시오. 내가 또 말합니다. 여러분은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시는 대로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체의 욕망을 채우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이 바라시는 것은 육체를 거스릅니다. 이 둘이 서로 적대관계에 있으므로,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면, 율법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의 행실은 환히 드러난 것들입니다. 곧 음행과 더러움과 방탕과 우상숭배와 마술과 원수맺음과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분쟁과 분열과 파당과 질투와 술취함과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놀음과, 그와 같은 것들입니다. 내가 전에도 여러분에게 경고하였지만, 이제 또다시 경고합니다. 이런 짓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막을 법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은 정욕과 욕망과 함께 자기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삶을 얻었으니, 우리는 성령이 인도해 주심을 따라 살아갑시다.]

∙새로운 경험, 다양한 느낌
주님의 평화가 이곳에 계신 모든 분들과 함께하시길 빕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가끔, 아무도 없는 이 예배당에 앉아 아무런 말도 없이 잠시 머물다 가거나 또는 이리저리 배회하다 내려갈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그 시간은 오롯이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참 좋은 시간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와는 정반대의 경험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성도님들 한 분당 두 개의 눈동자를 갖고 있다고 본다면, 지금 이곳에 계신 분로부터 받는 이 ‘수백 개의 시선‘은, 어느 때보다 저를 더 ‘부자연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충만한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이 기분은, 말로 설명하기 힘든 부분인 것 같습니다. 매번 이런 자리에 서시는 분들이, 갑작스레 참 대단하게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같은 예배당‘ 혹은 ‘같은 장소‘라고 해도 ‘어떤 상황에 놓였느냐’에 따라 또는 ‘무엇을 느꼈느냐’에 따라 그 장소가 전혀 다른 장소로 탈바꿈하는 걸 경험하게 됩니다. ‘신앙의 신비’도 바로 이와 같은 것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낯선 것을 보아내고, 또 내가 다 안다고 확신하던 사람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고, 또 힘겨운 세상을 살아내느라 상처투성이인 스스로가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임을 다시 깨닫게 되는 것! 바로 이러한 ‘전복적 시각‘을 갖는 것이 ‘신앙의 신비’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신앙‘은 이처럼 “익숙한 것을 낯선 눈”으로 보려는 노력을 통해, 더 깊어지고 단단해질 것입니다.

∙줄탁동시(啐啄同時)’의 사건
오늘 말씀에서도, 유대 사람들이 뭔가 ‘이전과는 다른 것‘, ‘이전 삶과는 다른 방식의 삶‘이 자신들 앞에 찾아왔음을 깨닫게 됩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지역에 흩어져 있는 여러 교회에 서신을 보냅니다. 그 서신의 묶음이 바로 <갈라디아서>입니다. 이 <갈라디아서>는 서로 대립 되는 개념을 반복해서 보여주는데, ‘율법과 믿음’, ‘율법과 성령’을 대조하며, 뭔가 유대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이 도래했음을 알려줍니다.

사실 ‘율법’은 유대 민족의 역사와 그 맥락을 함께 합니다. ‘율법’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어주는 언약으로, 언어화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 오랜 전통이 신약에 오자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를 이룬 바울은 율법의 시선으로 보았을 땐 보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물론 바울의 이러한 발견은, 두 가지가 동시에 이뤄졌기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먼저 한 가지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열정적으로 살았기’ 때문이고, 다른 한 가지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은총’ 때문이었습니다. ‘삶에 대한 열정’과 ‘하늘의 은총’이 만나는 바로 이 ‘줄탁동시(啐啄同時)’의 사건이, 바울의 존재를 새롭게 했습니다.

∙율법 아닌, 뉴(New)법 전하는 바울
혹시 여기 계신 분들은 ‘새로운 것’을 잘 받아들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최근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야기 하나를 듣게 됐는데요. 그것은, 사람은 ‘지루함’을 견디기 매우 어려워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차라리 ‘슬픔과 고통’은 견딜 수 있을지 몰라도, ‘의미 없는 시간과 지루함’은 정말 견디기 어려운 요소임이 분명합니다. 물론 우리는 삶에 ‘흥분과 설렘’만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지만, 서서히 잠식하듯 들이닥친 이 ‘지루함’을 돌파하기 위해, 사람들은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 나서곤 합니다.

전에 목사님께서 설교 중에,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냄비처럼 쉽게 달아오르기보다, 무쇠솥처럼 은근하고 지속적인 열을 품을 필요가 있다고 하신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물론 지금과 같은 맥락에서 하신 말씀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사람이란 ‘새로움’과 ‘익숙함’ 사이에서 숱한 고민을 하는 그런 존재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때론 ‘새로움’은 우리에게 성숙의 기회를 마련해주기도 합니다. 왜냐면, 새롭고 낯선 것을 수용하려면, 어느 정도의 ‘수고로움’은 반드시 동반되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율법을 따르는 이들에게 아주 낯설고 새로운 법 즉, ‘율법’이 아닌 ‘뉴(New)법’을 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강렬한 만남을 통해 변화된 바울은, 여러 <서신서>에 자신이 변화된 증거를 나타내는데, 특히 <갈라디아서>를 통해서는 ‘율법과 믿음’의 대조를 통해 그 증거를 드러냅니다.

∙율법은 개인 교사 역할 담당
그는 먼저 <갈라디아서> 3장 2절을 통해, 당신들이 ‘성령’을 받은 이유가 당신들이 그동안 지켜왔던 그 ‘율법’을 따랐기 때문인지, 아니면 ‘믿음의 소식’인 ‘복음’을 들었기 때문인지를 묻습니다. 뿐만 아니라, 3장 5절에서 한 번 더 이 이야기를 반복하는데, 바울은, 하나님께서 당신들에게 ‘기적’을 보이신 이유가, 당신들이 열심히 ‘율법’을 따랐기 때문인지, 아니면 당신들이 들은 ‘복음’ 때문인지를 재차 묻습니다.

물론 바울은 이 ‘율법’이라고 하는 것을 무조건적으로 폐기하진 않습니다. 그는 3장 21절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과 반대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중개자가 준 율법이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이었다면, 의롭게 됨은 분명히 율법에서 생겼을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의 가치를 ‘아는 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사람이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율법이 필요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면, ‘율법’이란 옳고 그름을 깨닫게 하는 ‘교사(25절)’의 역할을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개인 교사’라는 표현은 <갈라디아서 3장 25절>에 나오는데, 여러분께서도 잘 아시듯이 ‘교사’란 ‘배우고자 하는 자’에게 ‘가르침을 주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여러분께 좀 흥미로운 질문 하나를 드려볼까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배움’이라는 것이 ‘가르침’을 통해 전해질 수 있다고 생각되십니까? 물론 여기서 말하는 ‘가르침’이란, 어떤 ‘이론’이나 ‘정보’ 등을 말하는 건 아닙니다. ‘삶의 진리’나 ‘신앙의 비결’과 같이 어떤 ‘깨달음’에 관한 것을 말합니다.

∙가르쳐질 수 없는 배움
저는 몇 해 전부터 꾸준히 참석하고 있는 독서모임이 있습니다. 서로 나이와 직업을 묻지 않는 아주 흥미로운 모임인데, 최근 그 모임에서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었습니다. 물론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헤르만 헤세는 ‘사람의 성장’에 관한 ‘성찰’과 ‘인간 내면’에 공존하는 ‘선악의 양면성’을 선보인 작가입니다.

<싯다르타>라는 불교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드려 죄송합니다만, 여기서 종교는 하나의 상징일 뿐,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자기실현 이야기’로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많은 소설이 그렇듯이, <싯다르타>도 아주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납니다. 그는 가족을 포함해 다른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원천이 되지만, 정작 자기 자신에게는 기쁨을 주지 못한 채, 내면의 불만을 쌓아갑니다. 그래서 그는 성경의 아브라함과 같이, 집을 떠나 길을 나섭니다. 여기서 ‘집’이라고 함은, ‘나’에게 덧입혀져 있는 것으로, ‘자신의 본질‘과는 큰 관련이 없는 것들을 나타냅니다.

이 소설은 소설 속 주인공이 어떻게 ‘삶의 가치‘를 깨달아 가는지를 보여주는데, 주인공 <싯다르타>는 너무 일찍이 진리라는 것을 받아들였고, 자기 몸에 맞지 않던 그 진리를 진짜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반드시 ‘떠남의 과정’이 필요함을 느낍니다. 그 과정에서 ‘진리를 깨달은 스승‘을 만나기도 하지만, 그가 전하는 가르침 또한 자신에게 기쁨이 되지 못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배움’이라고 하는 것은 누군가의 ‘가르침’을 통해 전해질 수 없음을 몸소 깨닫게 됩니다. 그리하여 <싯다르타>는 다양한 세속의 과정을 거치고, 또 숱한 절망의 순간을 맛본 후에야 ‘진리의 한 단면‘을 만나게 됩니다.

∙사랑을 택해야 하는 이유
제가 잠시 이렇게 곁길로 빠진 이유는, 바로 이것을 생각해보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우릴 향해, ‘율법‘이 아닌 ‘믿음‘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바울이 전한 이 말을 어떻게 ‘나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또 가르침을 통해서는 배울 수 없는 것들을 어떻게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지를 고민해 봐야합니다.

사실 다른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뭔가 ‘다른 지표’, ‘다른 방향성’이 필요합니다. 그 결정적 해답이 <갈라디아서 5장 6절> 나옵니다. 바울은 ‘율법’의 증거인 ‘할례’에 대해 이야기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를 받거나 안 받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 사랑을 통하여 일하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이 한 마디를 하기 위해, 여기까지 달려왔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율법’을 버리고, ‘사랑’을 의지해야만 하는 이유는 ‘율법’은 ‘내 기쁨의 원천’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율법’은 강제적인 성격을 띠기 때문에, 겉으론 의로운 사람처럼 비춰질 순 있어도, 내면은 공허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는 ‘지속성‘의 문제와도 연관되기 때문에, 바울은 결국 ‘사랑’밖에 택할 게 없음을, 오직 ‘사랑’만이 이 모든 일을 가능케 함을 이야기합니다.

∙사랑을 경험한 자
우리는 과연 이 ‘사랑‘을 빼놓고 <기독교 신앙>에 관해 말할 수 있을까요? <로마서 13장>을 보면, “사랑은 곧 율법의 완성”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오늘 <갈라디아서>의 말씀과 그 맥락을 같이 합니다. 그리고 <요한일서 4장>을 보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율법’으로 시작된 구약의 역사가, 신약에 와서는 ‘사랑’으로 나아갑니다.

<침묵>과 <깊은강>이라는 책으로 유명한 일본인 작가 ‘엔도 슈사쿠’는, 그의 인터뷰집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 예수를 배반한 제자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엔도’는 그때 그 상황에 있던, 제자들의 마음을 상상해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하신 ‘마지막 말씀’, ‘최후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와 마가복음>에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만 쓰여 있지만, <누가복음>에는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라는 말까지 쓰여 있습니다. 이 말 속에는 당신을 체포한 자들 외에, 당신을 배신한 자들까지 용서해 달라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엔도’는 ‘예수의 마지막 모습’을 목격한 제자들의 마음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아마 제자들은 예수께서 당신을 버린 자들을 원망하거나, 아니면 하나님께 자기를 배신한 자들을 벌하여 달라 했을 거라 여겼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하나님 앞에, 자신들을 벌할 것을 청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을 용서해 달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엔도 슈사쿠’는 이 상황을 목격한 제자들이 굉장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때의 경험이 ‘최초의 충격’이 되었고, 제자들은 ‘대체 예수는 어떤 사람인가?’하고 다시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엔도 슈사쿠, <나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성바오로, p.99)

예수께서 가르치던 것이 결국 ‘사랑’이었음을 ‘죽음의 자리‘를 통해 보여주셨고, 이를 뒤늦게 알게 된 제자들은 커다란 충격에 빠졌던 것입니다. ‘사랑’에 대한 말할 수 없는 ‘경험‘과 가슴에 새겨진 뜨거운 ‘의문점’ 하나가, ‘제자들의 인생‘을 변화시키게 됩니다.

∙연인 간의 사랑
사실 ‘강렬한 사랑의 차원‘에서 본다면, 사랑에 빠진 ‘연인 사이’에서의 사랑도 결코 빼놓을 수 없습니다. 저는,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사랑하게 만드는 이 ‘연인 간의 사랑‘ 속에도, ‘인간을 향한 신의 사랑’의 한 단면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보는 세상은, 모든 것이 새롭고 모든 것이 아름답습니다. 어제 나설 때 보았던 우리 집 대문이 어제와 똑같은 대문일 수 없고, 또 등하교 하거나, 출퇴근 하던 그 길이 이전과 같지 않음을 경험합니다. 한순간, 모든 것이 ‘생동감‘ 있게 변해버립니다. 그들은 자신의 ‘의지‘ 너머에서 오는 ‘마음‘과 ‘감정‘들로 당혹스러워 하지만, 그것이 그리 기분 나쁘지 않습니다.

그렇게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사랑받았던 경험들’은 강력할 뿐만 아니라, 오래 지속이 됩니다. 그래서 미국의 ‘피터 크리프트(Peter Kreeft)’ 교수는 ‘사랑’은 사랑하는 누군가를 각별한 사람으로 여긴다는 점에서, 항상 편파적일 수밖에 없는데,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 또한 마찬가지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류의 표본’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깊이 매혹된 연인처럼 우리에게 관심을 갖고 또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 (피터 크리프트, <당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사랑의 황홀감과 장애물: 연인
그런데 우리는 ‘사랑의 어려움’ 또한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달콤한 밀월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반드시 ‘불협화음의 시간’을 겪게 됩니다.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그의 책 <사랑 예찬>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는 ‘사랑’이란 “어떤 형태의 진리가 구축되는 하나의 경험”이라는 말을 했는데, 좀 난해한 듯하지만, 그의 말을 더 들어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사랑이) 시작되는 그 순간의 황홀감은 분명 존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지속되는, 하나의 구축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끈덕지게 이어지는 일종의 모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모험적인 측면은 사랑에 필요한 것이겠지만, 한편, 그렇다고 해서 사랑이 끈덕짐을 덜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최초의 장애물, 최초의 심각한 대립, 최초의 권태와 마주하여 사랑을 포기해버리는 것은 사랑에 대한 커다란 왜곡일 뿐입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공간’과 ‘세계’와 ‘시간’이 사랑에 부과하는 장애물들을 지속적으로, 간혹 매몰차게 극복해나가는 그런 사랑일 것입니다.” (알랭 바디우, <사랑 예찬>, 길, p.43)

물론 바디우는 이 원리를 ‘사랑‘뿐만 아니라, ‘혁명의 과정‘이나 어떤 ‘변혁 과정‘의 원리로도 사용하고 있지만,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며 ‘사랑‘이 이처럼 전투적인 것일 수 있구나,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됐습니다. (알랭 바디우, 위의 책, p.90)

∙사랑의 황홀감과 장애물: 하나님
그런데 이러한 ‘사랑의 과정‘은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는 방식‘과도 매우 유사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삶의 의지’를 북돋게 하기도 하지만, 그분을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에 침묵하시는 ‘하나님의 그 침묵’ 때문에 우리는 몹시 당황하기도 했습니다. 16세기 영성가인 ‘십자가의 성 요한’도 신앙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는 ‘영혼의 어두운 밤’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건, 바로 이런 과정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이란 이처럼, ‘사랑’에 담긴 ‘차가움과 뜨거움’의 의미를 받아들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따르겠다는 처절한 ‘자기 고백’인 것입니다.

∙육체의 행실과 성령의 열매
본문으로 다시 오기까지 먼 길을 돌아왔습니다.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 1절에서,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 시켜 주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이 부분은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통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일관된 주장입니다. 그는 이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케 하는 구실로 삼지 말라고 했습니다.

저는 마지막으로 여러분께 당돌한 질문 하나를 드려볼까 합니다. ‘육체의 욕망’은 과연 나쁜 것입니까? 그리고 ‘성령의 열매’는 왜 좋은 것입니까? 물론 우리는 이런저런 이유를 댈 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이 아니니까’ 또는 ‘성경에 그렇게 쓰여 있으니까’ 등등 여러 이유를 댈 순 있지만, 정말 내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진정성’ 있는 답변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기대가 무너진 자리에 핀 꽃
물론 우리는 충분히 ‘육체의 행실’보다 ‘성령의 열매’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육체의 행실’보다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것이 왜 더 소중한지를 깨닫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회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저는 이 ‘우회하는 과정’을 ‘사랑의 경험‘ 또는 ‘사랑에 대한 이해’를 통해 가능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사랑에 대한 경험‘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하나님 말씀‘의 테두리만 만질 뿐, ‘말씀의 알맹이‘는 건들기 어려울 것입니다.

바울이 ‘율법’이 아닌 ‘사랑’을 강조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좋은 건지 ‘누군가‘ 말해줄 순 있지만, 진짜 ‘가치 있다고 하는 것‘이 내 것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사랑’에 관해 논했던 그 과정을 겪어야만 합니다. 한 번도 쌓았던 것이 무너져본 적이 없는 사람은, 아직 신앙의 깊은 차원을 모르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처절한 결과물
<박노해 시인>은 사람이 달라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 개의 문을 통과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고통’이라는 문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이라는 문입니다. 또 브라질의 작가 <파울로 코엘료>도 인간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랑’과 ‘절망’ 이 두 가지라고 했습니다.

제가 오늘 설교의 제목을 <신앙 여정>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여정’이라는 말에 담긴 다양한 의미 때문입니다. 물론 ‘여정’이라는 말의 한자어를 조금씩 바꿔가며 알게 된 의미였는데, 이 ‘단어’에 담긴 의미들이 꼭 ‘신앙의 과정’과 닮아보였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고독의 시간‘과 또 뭔가 ‘정체되어 있는 것 같은 지루한 시간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기운을 차려 힘차게 걸어가는 시간‘들이 반복하여 나타나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런 시간들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고, ‘의무감‘이 아닌, ‘충만함‘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 사랑‘에 대한 ‘이해‘와 ‘경험’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랑 방식‘이든 좋습니다. 어떤 사랑이든 깊이 밑바닥을 파다보면,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랑이든 시도하기 좋은 계절입니다. ‘자녀를 향한 사랑‘이나 ‘부모님을 향한 사랑‘ 아니면 ‘이웃 간의 사랑‘이나 ‘연인 간의 사랑‘ 또는 ‘자기 자신과의 사랑‘ 등 어떤 사랑이든 그 사랑 안에 깊이 침잠해보시기 바랍니다. 거룩한 영이신 ‘성령‘께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나아가게 우리를 도울 것입니다. 이 사랑으로 나아가는 <신앙의 여정>에 적극 동참하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9년 06월 30일 11시 03분 19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