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48. 진실한 기다림
설교자 이범석
본문 마 24.:36-44
설교일시 2019-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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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한 기다림
마 24.:36-44
(2019/12/01, 대림절 1주)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각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이 인자가 올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홍수 이전 시대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며 지냈다.  홍수가 나서 그들을 모두 휩쓸어 가기까지, 그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였다. 인자가 올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을 터이나,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맷돌을 갈고 있을 터이나,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너희는 너희 주님께서 어느 날에 오실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집주인이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알고 있으면, 그는 깨어 있어서, 도둑이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는 시각에 인자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 따뜻한 성탄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어느덧 12월의 첫 주일입니다. 대림절 첫째 주일로, 교회의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마치 묵은 달력은 떼어 정리해 버리고, 빳빳한 새 달력을 벽에 거는 듯한 느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새 출발과 새 기대가 샘솟는 날입니다. 예배당 내부에도 성탄 장식들이 눈에 환하게 보입니다. 예배부원분들께서 멋지게 성탄 장식을 해주셨습니다. 날도 쌀쌀한데 애쓰고 수고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덕분에 우리의 마음이 성탄의 따뜻한 빛으로 채워졌습니다.
예전에만 해도, 12월이 되면 사방에서 크리스마스 캐롤 소리가 들리고, 뭔가 들뜨고 유쾌한 분위기였습니다. 게다가 교회는 성탄 준비로 토요일 오후부터 주일 내내 시끌벅적했지요. 아이들은 두 눈을 반짝이며, 산타 클로스 할아버지와, 부모님과, 심지어 교회에서도 받을 선물에, 신나고 기대되는 때였습니다. 동시에 부모님들과 선생님들은, 말 안 들으면 산타 할아버지한테 선물 못 받게 된다고, 귀여운 협박을 해서 아이들의 마음을 졸이는 때이기도 했지요. 저 역시 드디어 산타 할아버지의 정체를 알아냈다고 잘난 척 뽐내며 신나 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물론 그 다음 해부터 선물 개수가 줄어들어서 괜히 말했다고 후회하기도 했구요.
이렇게 모두 기다리고 설렜던 12월이 요즘은 맹숭맹숭합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연말연시의 바쁜 생활은 마찬가지일 텐데, 우리 마음이 메마르고 좁아졌음을 느낍니다. 아름다운 내일을 기다리고 기대하며, 마르다가 값비싼 향유를 붓고 헌신했듯이, 조금 과하게 느껴질 정도로 서로 베풀고 나누며 기쁨과 정을 표현하는 모습은 다소 흐려졌습니다. 한 해 동안의 성과만을 평가하고 비교하며, 칼 같이 냉정하게 비판하고 더 몰아세우는 각박한 세태에, 우리의 영혼까지 빼앗긴 것은 아닌가 슬픈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 그 날과 그 시각은 아무도 모른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과 제자들은 유월절 축제를 앞두고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는 종교 장사치들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들은 성전 제사장 계급과 결탁하여 터무니없는 비율로 강제 환전을 하게 하고, 제물을 교환 및 판매하는 무리들이었습니다. 거기에서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 바리새파 사람들의 잘못된 행태를 꾸짖는 여러 말씀과 비유를 들려 주시고, 성전 밖으로 나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이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거처가 있는 올리브 산으로 자리를 옮깁니다. 제자들은 성전이 무너지리라는 말씀이 내내 마음에 걸렸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성전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요, 살아계신 야웨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이요, 그곳에서 제사하는 모든 이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지키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거기가 무너지면, 그건 세상이 끝난다는 뜻과 매한가지입니다. 이 엄중한 메시지 앞에서 그들이 가장 심각하게 궁금한 건, 그 정확한 때와 징조였습니다. 그 때와 징조를 알아야 대비할 테니까요. 그들은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이런 일들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마24:3)

예수님의 대답은 간결합니다. “그 날과 그 시각은 아무도 모른다.”(마24:36) 제자들은 당황했을 겁니다. 아니 그렇게 분명하게 종말의 징조를 말씀하시고도, 그 때를 모른다고 하시면, 어쩌라는 겁니까. 너무 막연합니다. 마감 날이 언제인지 정확히 알아야, 역순으로 계산해서, 계획표라도 세우지 않겠습니까. 하나씩 작게라도 대비를 해놓지 않겠습니까. 이런 제자들의 마음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예수님은 자신도 모르니, 그 날과 그 시각이 언제인지에 대한 관심을 끌 것을 요청하십니다. 역사의 종말과 심판,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완성의 날이 올 것은 확실하지만, 그 시각은 하나님만 아시고, 그 외 그 누구도 알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 때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는 시각”(24:44)이라고 언급하심으로써, 예수님을 믿고 제자가 되었으니, 마음 푹 놓고 그 때를 맞이할 수는 결코 없음을 일깨워 주십니다.

* ‘기다림’이란 행위
그 때를 알지 못하고 마냥 기다린다고 생각하면, 그 시간의 무게에 짓눌릴 것만 같습니다. 기다림이란 것이 고통스럽게 견뎌야하는 인고의 세월이 되는 건 한순간입니다. 그 마음의 밑바닥에 ‘오지 않을지도 몰라’라는 초조한 어둠이 짙어지면 짙어질수록, 그 시간이 쓸모없이 낭비되는 것 같다는 생각에 지배당하기 때문입니다.

아이유와 김이나 씨가 작사한 “이름에게”란 곡이 있습니다. 마치 이미 한참 멀어져 버린 나의 내면을 향한 나 스스로의 위로와 다짐과 같은 노래입니다. 가사 일부는 이렇습니다. “끝없이 길었던 / 짙고 어두운 밤 사이로 / 조용히 사라진 / 네 소원을 알아 / 오래 기다릴게 / 반드시 너를 찾을게 / 보이지 않도록 멀어도 / 가자 이 새벽이 끝나는 곳으로”
어둔 밤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끝없이 길기만 합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도, 어둔 밤은 반드시 지나고야 말테고, 희뿌연 새벽도 끝나기 마련입니다. 광명한 아침이 온다는 것을 믿고, 기다린 사람은 몸가짐을 추스르며 끝까지 버틸 수 있습니다. ‘기다림’을 이렇게 볼 때, 그것은 그 자체로 새 희망이요, 하늘에서 주시는 복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조상들 중에는 막연한 기다림의 시간을 보냈던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노아는, 방주를 만들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인고의 긴 밤을 보냈습니다. 아브람은, 자녀와 땅의 약속을 믿고 아비의 집을 떠났으나, 결실 없는 오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께로부터 귀향과 보호의 약속을 듣고 걸음을 옮겼으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며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 모두 막연한 기다림의 시간을 뚫고 기다림을 신앙의 복된 승리로 이뤄냈습니다.

시간이 걸려도 ‘올 것이 확실해’라는 믿음이 있으면, 기다림의 시간은 전혀 다른 태도로 채워집니다. 기다림은 한숨과 포기의 시간이 아니라, 질문과 각성의 시간이 됩니다. 한 마디로, ‘깨어 있는’ 시간이 되는 것이지요. 깨어 있다면, 질문과 통찰, 그리고 깨달음에 잇댄 행동이 발생합니다. 그러니 기다린다는 것 자체가 하염없이 무의미하게 흘러 버리고 소멸되는 먼지 가루들이 아닙니다. 목적지를 향해 달려 가는 길에 어쩔 수 없이 들러 아까운 시간을 보내야만 하는 중간 정착역도 아닙니다. ‘기다림’을 깨어 있는 각성의 시간으로 만들 때, 그 자체가 ‘기다리는 대상’만큼 중요한 삶의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 ‘기다림’이 주는 성찰과 행동
예수님은 밭에 있는 사람들과 맷돌 갈고 있는 사람들 이야기를 덧붙여 들려 주십니다. 같은 일상의 삶을 살고 있었는데, 하나는 데려 가시고, 하나는 버려두시겠다고 하십니다.(마24:40~41) 둘 사이의 차이는 뭘까요? 예수님은 ‘깨어있음’을 강조하심으로써, 그 차이를 드러내십니다. 알지 못하는 날을 기다리며, 깨어 준비하는 자가 되라고 당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요청하시는 기다리는 자의 삶의 태도는 깨어남입니다. 마냥 게으르게 보내며 허망하게 시간을 보내거나, 지나치게 긴장하며 부들부들 떨며 시간을 보낼 필요는 없습니다. 기다림의 태도에는 완급 조절 따위는 없습니다. 깨어 일어나, 우직하게 성심껏 기다림을 살아가는 겁니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면, 처음에는 기다리는 이유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리고 점차 기다리는 나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나아가 나와 너와의 관계를 성찰하게 되고, 계속 더 기다려야 하는 이유와 기다리는 동안 할 일들을 궁리하게 됩니다. 바로 거기에서 ‘기다림’의 의미가 발생합니다.
예전에 휴대전화기가 없던 시절에는, 약속 장소에서 막막하게 기다려야 하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만날 시간과 장소는 분명히 약속했지만, 상대방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 이유를 알 길 없으니, 그냥 기다려야 합니다. 저도 2시간 정도까지 친구를 기다려 본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보면, 기다리는 시간 동안 이런 저런 궁리를 합니다. 그 중 하나가, 다음번에 상대방이 또 지각을 하더라도 참아줄 최대 시간을 결정하는 겁니다. 관계의 밀도에 따라, 10분도 참아줄 수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1시간 이상도 참아줄 수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다린다는 삶의 행위를 통해,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성찰을 하게 됩니다. 우선, 기다리는 나는 누구인가? 라고 자문합니다. 긴 시간을 들여, 나의 내면 깊이 침잠하여 관조할 기회를 얻는 것입니다. 내가 왜 기다리고 있지? 기다리며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있지?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고갱의 표현 그대로,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 와 같은 질문을 하게 됩니다. 긴 시간의 기다림이 주는 첫 번째 선물은, 나의 존재를 반성하고 깊이 숙고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기다림은, 기다림의 대상을 숙고하게 합니다. 재림하여 오실 주님으로부터, 내가 기다리고 나를 기다리는 여러 이웃들에게 이르기까지, 수많은 관계들을 성찰합니다. 그리고 그 소중한 관계를 굳건하게 만들어 줄 사려 깊은 말과 행동을 찾게 합니다. 참된 성찰은 행동의 변화를 일으키기 마련입니다. 이런 식으로 진실한 기다림은 나와 너, 나와 이웃, 나와 우주 만물, 나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의 질을 풍성하게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이렇게 기다림이 그 자체로 나에게 중요해질 때, 우리는 어둔 밤의 시간을 버틸 힘도 얻게 되고, 내면도 깊어지고, 이웃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 더 가까이 다가 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 기다림은 공허한 시간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다림은 닫힌 문을 두드리는 삶의 방식이요, 척박한 땅에 씨앗을 심고 물을 주는 삶의 방식이요, 깨진 그릇 같은 관계를 하나씩 조각 맞추는 삶의 방식입니다.

우리를 찾아오실 주님을 바라며, 기다림이라는 행위를 지속하는 동안, 우리는, 어둠의 행실은 버리고 (롬13:11~13), 다른 사람들을 한 번 더 용서하고 (마18:21~35),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주님께 하듯 사랑하며 (마25:35~40), 우리 삶을 진실한 기다림으로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대림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누구를 간절히 기다리고 계십니까? 어떤 아름다운 사건을 기다리고 계십니까? 진심으로 기다릴 수 있음이 복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다시 내려오실 줄 믿고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2000년 전 이미 오셨던 예수님의 삶과 말씀을 기억하며, 언젠가 다시 오셔서 역사의 심판과 완성을 이루실 분을 대림절 네 주간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립시다. 그 마지막 때가 언제 닥쳐오든,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멋진 ‘기다림’의 삶을 살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9년 12월 01일 11시 40분 0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