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46. 지금 우리가 선 자리
설교자 김기석
본문 잠14:21-24
설교일시 2020-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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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가 선 자리
잠14:21-24
(2020/11/15, 창조절 제11주)

[이웃을 멸시하는 사람은 죄를 짓는 사람이지만, 가난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이다. 악을 꾀하는 사람은 길을 잘못 가는 것이나, 선을 계획하는 사람은 인자와 진리를 얻는다. 모든 수고에는 이득이 있는 법이지만, 말이 많으면 가난해질 뿐이다. 지혜는 지혜 있는 사람의 면류관이지만 어리석음은 미련한 사람의 화환이다.]

∙하늘보다 더 높은 곳
자비로우신 주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스산한 늦가을 바람이 우리 삶을 자꾸 돌아보게 만듭니다. 금주에는 모든 사람의 관심을 끌만한 큰 일이 벌어지지 않아 다행입니다. 잠시 동안만이라도 나의 입장, 생각, 주장을 내려놓고 침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부질없는 말들이 우리 삶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 몸을 다스릴 수 있는 온전한 사람”(약3:2)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아주 작은 불이 큰 숲을 태우듯이 혀는 온 몸을 더럽히고 인생의 수레바퀴에 불을 지른다고 말합니다. 말은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타락한 말이 횡행할 때 세상은 혼돈으로 변합니다. 비난, 조롱, 악다구니가 사람들을 갈라놓고, 말의 이면에 있는 마음을 헤아리려고 노력하기보다 말꼬투리를 잡아 상대방을 넘어뜨리려는 이들이 지혜자 행세를 하기도 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요1:1)는 말씀이 새롭게 다가오는 요즘입니다.

여러 가지 일들이 있지만 최근에 제게 들려온 안타까운 소식 중 하나는 영연방 최고 랍비였던 조나단 색스(Jonathan Sacks, 1948-2020)의 사망 소식이었습니다. 저는 그를 <차이의 존중>, <사회의 재창조>라는 번역서를 통해 만났고, 이후에 아마존을 통해 그의 책을 대부분 구입하여 읽었습니다. 최근 10년 사이에 그는 제 생각에 많은 영감을 준 저자였던 셈입니다.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면서 <분열된 세상을 치유하려면>이라는 제목의 책을 뒤적이다가 그가 들려주는 아름다운 이야기와 만났습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이면 네미로프(Nemirov)의 랍비가 사라지곤 했습니다. 읍내에 있는 회당이나 학교에도 없었고, 문이 늘 열려 있는 그의 집에도 없었습니다. 어느 날 리투아니아 출신 학자 한 사람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랍비가 모습을 감췄다는 말을 듣고 당황한 그가 랍비의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분은 어디 계신가요?“ 그러면 사람들이 대답했습니다.
“하늘이 아니면 어디겠어요?“
마을 사람들은 평화와 음식과 건강이 필요했습니다. 랍비는 거룩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늘에서 마을 사람들을 위해 탄원하고 있을 거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의 그런 깊은 신뢰에 감명을 받은 리투아니아 사람은 그 사라짐의 비밀을 밝혀보리라 결심했습니다. 목요일 밤에 그는 랍비의 집에 몰래 숨어들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해가 떠오르기도 전에 그는 랍비가 조용히 탄식하며 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랍비는 잠시 후 벽장으로 가서 낡은 옷꾸러미를 꺼내 몸에 걸쳤습니다. 그것은 성직자의 옷이 아니라 농부의 옷이었습니다. 랍비는 서랍에서 도끼를 꺼내들더니 밖으로 나갔습니다. 리투아니아 사람은 몰래 그의 뒤를 밟았습니다. 랍비는 마을을 지나 숲에 들어갔습니다. 랍비는 굵은 나무 한 그루를 찍어 넘어뜨린 후 그것을 패 장작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장작을 어깨에 짊어지고 마을로 돌아가 어둑한 뒷길에 있는 허름한 집으로 가더니 문을 두드렸습니다. 가난하고 병든 늙은 여인이 문을 열었습니다.
“누구시죠?“
“저는 바실리라는 사람입니다. 나무를 좀 팔고 싶어서요. 헐값에 드리겠습니다.“
“사고 싶지만 돈이 없어요.“
“외상으로 드릴게요.“
“어떻게 갚으라고요?“
“나는 아주머니를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으시지요? 그분께서 제가 보상받을 방법을 찾으실 겁니다.“
“하지만 나는 병들어서 불을 피울 수가 없답니다.“
“제가 불을 피워 드리지요.“
랍비는 아침 기도문을 읊조리며 불을 피워 드린 후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리투아니아 출신의 학자는 이 모든 것을 본 후 마을에 머물렀고, 랍비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 날 이후 그는 마을 사람들이 방문객들에게 랍비가 하늘에 올라갔다고 말하면 더 이상 웃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은 더 높은 곳에 계실 겁니다”(Rabbi Jonathan Sacks, To Heal a Fractured World, Schocken, 2005, p.30-31)

∙보이지 않는 인간
저는 이 아름다운 이야기 속에 거룩함의 본질과 신앙의 신비가 깃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곤경에 처한 이들을 위해 나무를 베고 불을 피우는 일이야말로 거룩한 삶이라는 것이 이 이야기가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세상에는 일상의 모든 일들을 통해 하나님의 빛을 드러내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기 위한 종교적 실천은 매우 중요합니다. 종교적 의례는 정성스럽게 수행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관련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과 거룩한 삶은 비근한 일상 속에서 배어 나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세계에 살고 있음을 알고, 이웃들이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시는 존재임을 알 때 우리 삶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타자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에 머물지 않고 그들의 다름을 존중할 수 있을 때 평화가 시작됩니다.

“이웃을 멸시하는 사람은 죄를 짓는 사람이지만, 가난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이다.“(잠14:21)

‘멸시蔑視한다’는 것은 낮추어보거나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입니다. 미국 작가인 랠프 엘리슨은 <보이지 않는 인간>이라는 책을 통해 20세기 초중반에 극심한 차별에 시달리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삶을 다뤘습니다. 그 첫 문장을 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보이지 않는 인간이다. 아니, 그렇지만 에드거 앨런 포를 사로잡은 유령이나 할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심령체 같은 존재라는 말은 아니다. 나는 살과 뼈가 있고, 섬유질과 체액으로 이루어진, 실체를 지닌 인간이다. 게다가 어쩌면 정신까지도 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보이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이 나를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랠프 엘리슨, <보이지 않는 인간 1>, 조영환 옮김, 민음사, p.11)

남을 멸시하는 이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자각하지 못할 때가 많지만 멸시를 당해 본 사람은 그 상처에서 쉽게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못한 이들에게 모멸감을 안겨줌으로 자기 힘을 과시하고 싶어합니다. 21절은 비교적 점잖게 말하고 있지만 31절은 이것을 조금 더 심각하게 재서술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이지만, 궁핍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공경하는 것이다.“(잠14:31)

두려운 진실입니다. 우리는 형편이 어려운 사람을 보면 양가감정에 시달립니다. 도와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와 그러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갈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불편한 선택을 피하기 위해 어려운 처지에 빠진 이들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곤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치 없는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은 마치 높으신 분의 행차를 준비하면서 행여 그들의 마음이 상할세라 ‘빈민가’를 가림막으로 가려놓던 옛 관료들의 행태를 떠올리게 합니다. 분진을 막기 위해 썼던 마스크를 벗자 온통 분진 가루로 뒤덮인 노동자의 사진을 보셨습니까? 비용을 절감한다며 노동자들을 위험 속으로 몰아넣는 일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입니다.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 사람의 영혼이 머물고 있는 자리가 보입니다.

∙선과 악의 갈림길
21절이 내면의 태도를 가리킨다면 22절은 우리가 드러내는 적극적인 행동과 그 결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악을 꾀하는 사람은 길을 잘못 가는 것이나, 선을 계획하는 사람은 인자와 진리를 얻는다”(잠14:22)

‘꾀하다’라는 뜻의 카래시(charash)는 ‘밭을 갈다‘, ‘긁다’, ‘새기다’라는 뜻입니다. ‘악‘(라아ra‘)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형상인 우리를 지배하지는 못합니다. 먼저 우리 마음에 틈을 만들고, 거기에 불안과 두려움과 미움의 씨를 뿌립니다. 그 씨가 자라 형태를 갖추면 악은 확고하게 우리 마음을 차지합니다. 악에게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동생 아벨에 대한 원한감정에 사로잡힌 가인에게 하나님은 “네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으니,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창4:7)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올바르지 못한 일은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입니다. 그를 멸시하고, 비존재로 만들려는 유혹입니다. 악을 꾀한다는 말은 결국 죄의 유혹에 굴복하여 이웃을 해치려는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그 마음의 싹을 자꾸 도려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일하셔야 합니다. 부끄럽고 더러운 우리 마음을 자꾸 하나님 앞에 내놓고 치유 받아야 할 까닭이 거기에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권고한 까닭은 그렇게 하지 않고는 우리 마음이 악으로 기울기 쉽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라면 늘 ‘선‘ 곧 토우브(towb, 아름다움, 좋음)를 계획해야 합니다. 선은 아름다움이고 자유로움이고 즐거움입니다. 선은 우리 자신을 다른 이들에게 기꺼이 선물로 내주려 할 때 비로소 현실이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수모를 안겨주려는 이들이 아무리 많아도 그들 속에서 오히려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려는 마음을 품는 사람이 선한 사람입니다. 저는 제자들의 소명 이야기에서 늘 감동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주님의 눈입니다. 예수님은 시대의 어둠 속에서 울분을 품고 살던 갈릴리 어부 시몬에게서 ‘반석’ 곧 베드로를 보아내셨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냐고 말하던 나다나엘에게서 거짓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의 원형을 보셨습니다. 선을 계획한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선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있습니다. 인자(hesed)와 진리(‘emeth)가 그것입니다. 헤세드는 아시다시피 언약에 바탕을 둔 사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불성실할 때가 많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한결같으십니다. 그 사랑의 흐름을 타고 사는 사람은 공허함이나 무의미성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진리는 ‘확고함’, ‘믿음직함’, ‘안정감’입니다. 선을 도모하는 사람은 자기 이익에 따라 처신하지 않기에 스스로 확고하고 어지간한 바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는 확고히 선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삶의 해독제
히브리의 지혜자는 “모든 수고에는 이득이 있는 법이지만 말이 많으면 가난해질 뿐”이라고 말합니다. 수고受苦는 쓰라림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수고’는 몸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몸을 써서 하는 일에는 남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실질적 이득일 수도 있지만, 삶의 보람과 기쁨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머리를 써서 하는 일도 이득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여기서는 말을 앞세우는 삶의 무익함을 강조하기 위해 이런 표현을 쓴 것으로 보입니다.

어딜 가나 수고하는 이들은 말이 적고, 말이 많은 이들은 수고를 꺼리는 경우가 제법 많습니다. 좋은 말은 물론 중요합니다. 우리가 주고받는 말이 사회의 분위기와 지향을 만드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웃의 짐을 함께 나눠지려는 사랑의 연대입니다. 우리 속에 깃든 이기심의 독은 ‘귀찮다‘는 생각과 ‘힘들다‘는 생각의 인력에서 벗어나 주변화된 이웃들을 향해 나아갈 때 해독되기 시작합니다. 쉽지는 않습니다.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사랑의 수고를 많이 하는 이들도 가끔 지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누군가를 원망하기 쉽습니다. 그럴 때는 멈춰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만큼 일하느냐가 아니라 어느 정도의 사랑을 가지고 일하느냐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할당량을 채우는 것처럼 일을 하다보면 우리 속에 기쁨과 감사가 고갈되기 쉽습니다. 미국의 가톨릭 노동자 운동을 이끌었던 도로시 데이도 아무리 분주하더라도 쉼의 시간을 갖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른 이들에게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는 마른 샘이 되지 않으려면 나 역시 이처럼 달디단 샘물을 마셔야 한다.“(도로시 데이, <고백>, 김동완 옮김, 복있는사람, 461쪽)

도로시 데이든 네미로프의 랍비든 그들의 삶은 정의를 추구하면서도 자비를 잃지 않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선 자리가 하나님을 모신 자리입니다. 믿음의 길 위에 선 우리가 그런 경험들을 함께 나눌 때 삶은 더욱 풍성해질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그런 섬김의 이야기들을 만들어갈 때 우리 공동체는 든든하게 설 것입니다. 주님이 이끄시는 곳에 우리의 발걸음도 머물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0년 11월 15일 12시 09분 29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