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40.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설교자 김기석
본문 롬 8:1-9
설교일시 2021-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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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롬 8:1-9
(2021/10/03, 창조절 제5주, 세계성찬주일)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당신을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육신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미약해져서 해낼 수 없었던 그 일을 하나님께서 해결하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아들을 죄된 육신을 지닌 모습으로 보내셔서, 죄를 없애시려고 그 육신에다 죄의 선고를 내리셨습니다. 그것은,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가,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이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육신에 속한 것을 생각하나,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신에 속한 생각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속한 생각은 생명과 평화입니다. 육신에 속한 생각은 하나님께 품는 적대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으며, 또 복종할 수도 없습니다. 육신에 매인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여러분은 육신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 자기 불화 속에 있는 인간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요즘 많이 허탈하시지요? 매스컴을 통해 전해지고 있는 부동산 개발 비리 사건을 보며 많은 이들이 공분을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들이 어떻게 막대한 수입을 얻는지를 바라보며 국민들은 그저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습니다. 몇 십 만원이 없어 난감해 하고 있는 이들이 많은 터에 수십 억, 수백 억 원을 아주 손쉽게 주머니에 넣는 이들을 보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속속들이 썩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주전 8세기의 예언자 미가와 아모스의 말이 우렁우렁 들려옵니다.

“악한 궁리나 하는 자들, 잠자리에 누워서도 음모를 꾸미는 자들은 망한다! 그들은 권력을 쥐었다고 해서, 날이 새자마자 음모대로 해치우고 마는 자들이다. 탐나는 밭을 빼앗고, 탐나는 집을 제 것으로 만든다. 집 임자를 속여서 집을 빼앗고, 주인에게 딸린 사람들과 유산으로 받은 밭을 제 것으로 만든다.”(미 2:1-2)
“나 주가 선고한다. 이스라엘이 지은 서너 가지 죄를,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 그들이 돈을 받고 의로운 사람을 팔고, 신 한 켤레 값에 빈민을 팔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힘없는 사람들의 머리를 흙먼지 속에 처넣어서 짓밟고, 힘 약한 사람들의 길을 굽게 하였다.”(암 2:6-7a)

성실하게 자기 일을 수행하면서 근근이 사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이 악한 일을 보며 허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악인들에게 내리는 재앙을 보고 있습니다. 그들의 행위는 가려질 수 없습니다. 백일하에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인간의 눈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까지 속일 수는 없습니다. 악한 행실에는 보응이 따른다는 말은 진실입니다. 어둠 가운데서 자행되던 일들이 이제 백일하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빛은 어둠을 어둠으로 드러냅니다. 마틴 루터 킹 Jr. 목사는 “도덕적 우주의 현은 길지만 그것은 정의의 방향으로 구불어져 있다”고 말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을지 몰라도 악을 징계하고 선을 북돋는 창조적인 힘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힘을 의지하여 살아야 합니다.

어느 때부터인지 ‘대박’이라는 말이 사람들 사이에 유행하고 있습니다. ‘놀랍다’는 뜻의 감탄사로 사용되는 경우도 많지만, 뭔가 예기치 않은 횡재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대박을 꿈꾸는 이들은 소소한 현실에 만족하기 어렵습니다. 자신의 결핍에만 마음을 쏟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질투와 선망 사이에서 바장이든지, 누군가에 대한 원망 혹은 분노의 감정을 품고 삽니다. 대박을 꿈꾸는 이들에게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은 헛소리처럼 들릴 겁니다. 먹고 사는 문제에만 집중하다 보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나‘라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은 떠오르지 않습니다. 사람다운 사람 만나기 어려운 것은 그 때문입니다.

우리 삶을 돌아봅니다. 우리는 ‘되고 싶은 나’와 ‘현실의 나’의 분열 속에서 살아갑니다. 마음으로는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유쾌한 사람이 되고, 통 크게 나누며 살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삶은 점점 여유가 없어지고, 염려와 근심이 확고하게 우리 의식을 사로잡습니다. 연대의 기쁨을 나누어야 할 이웃들은 경쟁자처럼 여겨집니다. 이러한 자기 분열 속에 있는 사람은 안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지만 그것을 실행하지는 않는다고 아프게 고백했던 바울의 말은 참 정직합니다. 그는 자기 속에서 또 다른 법, 죄의 법이 자기를 확고하게 사로잡고 있다고 말합니다. 인격의 일부가 되어 스스로 떨쳐버리기 어려운 그 죄성을 자각했기에 그는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롬 7:24)라고 탄식합니다. 이렇게 자기의 무능을 솔직하게 인정했기에 그는 은총의 문턱에 당도했던 것입니다.

• 은혜 아니면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된다는 것이 바울의 깨달음입니다(롬 5:20). 우리는 죄를 떨쳐버릴 힘이 없지만 하나님의 숨이 우리 속에 머물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를 사로잡는 순간 상황은 달라집니다. 바울은 예수 안에 있는 이들은 정죄를 받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정죄란 유죄선고를 말합니다.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과 분리된 존재가 아닙니다.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우리를 해방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죄와 사망의 법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매력을 잃는다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나는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빌 3:7)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기 때문에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긴다고도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값진 진주를 구하는 상인이 그것을 발견하면,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산다(마 13:45-46)고 말씀하신 것도 같은 경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일러 ‘성령으로 마음에 받는 할례’(롬 2:29)라고 말합니다. 성령은 우리의 내적인 기질을 변화시킵니다.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 죄가 용서되었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우리를 감싸고 있음을 확신할 때, 다른 삶이 시작됩니다. 악한 말과 행실은 벗어던지고 정욕에 이끌리는 삶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이런 변화를 적절하게 설명할 말이 마땅치 않습니다만 성령은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살던 우리가 하나님을 마주보고 살 수 있도록 해주신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등 돌림에서 마주 봄으로의 변화, 이것은 아주 근본적인 변화입니다. 등 돌림은 관계의 파탄을 상징합니다. 마주 봄은 사랑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은혜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어둠에 속한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빛에 속한 사람입니다. 이전에는 죄의 종이었으나 이제는 의의 종입니다. 이전에는 훼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이제는 믿음과 사랑을 누리는 자입니다(딤전 1:13-14).

“육신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미약해져서 해낼 수 없었던 그 일을 하나님께서 해결하셨습니다”(롬 8:3a). 여기서 육신을 뜻하는 헬라어 ‘sarkos’는 단순한 살덩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중심성에 사로잡혀 사는 인간 전체의 연약함을 일컫는 말입니다. 몸을 가진 존재는 언제든 자유롭기 어렵습니다. 각종 욕구와 아픔에 시달리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적절하게 충족되지 않을 때 비애감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그것을 다 누리고 사는 이들에 대한 적대감도 품게 됩니다. 옛날 고행자들이 몸을 스스로 괴롭게 했던 것은 그 몸의 욕구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습니다. 그러나 몸의 욕구를 부정하거나 다스릴 수 있다고 하여 영적인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의 고행을 특권으로 삼아 다른 이들을 무시하거나 정죄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진정한 신앙은 육신을 부정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육신의 욕구를 영의 지배하에 두는 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같은 몸을 가지고 계셨지만 죄 혹은 욕망의 포로로 살지는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은 우리 또한 죄의 법에서 벗어나 기꺼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성화된 삶이야말로 우리가 주님의 은혜 안에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입니다.

• 우리 마음의 주인은 누구?
지금 우리 마음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우리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그것이 우리의 신입니다. 바울은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과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을 구분합니다. 육신에 속한 생각은 하나님께 품는 적대감입니다. 생각이라 번역된 헬라어 프로네마(phronema)는 마음의 지향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마음에도 길이 있습니다. 마치 물이 늘 흐르던 길로 흐르는 것과 같습니다. 육신에 속한 생각의 길은 늘 자기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길입니다. 성경은 그런 마음을 하나님께 품는 적대감이라 말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로 내려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야기를 기억하시지요?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그 강도 만난 사람을 피하여 달아난 것은 ‘이 사람을 도와주다가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좀 달랐습니다. ‘이 사람을 도와주지 않으면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겠다.’ 이 생각의 방향이 행동의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성령에 속한 생각은 ‘생명과 평화’입니다. 생명을 뜻하는 ‘조에(zoe)’는 모든 생명 속에 깃든 활력을 뜻하는 말이지만 성경에서는 하나님께 속한 존재의 충만함을 일컫는 말로 사용됩니다. 성령은 우리 속에 생기 충만함을 제공합니다. 예레미야는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을 일러 “그는 물가에 심은 나무와 같아서 뿌리를 개울가로 뻗으니, 잎이 언제나 푸르므로, 무더위가 닥쳐와도 걱정이 없고, 가뭄이 심해도, 걱정이 없다. 그 나무는 언제나 열매를 맺는다”(렘 17:8)고 말했습니다. 성령은 마르지 않는 샘이 되어 우리가 고갈되지 않도록 해줍니다. 그가 맺는 또 다른 열매는 평화(eirene)입니다. 육신에 속한 생각은 불화와 갈등을 낳지만, 성령에 속한 생각은 평화를 낳게 마련입니다.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나로 인해 주변에 생명과 평화의 기운이 스며들고 있다면, 그로 인해 하나님이 영광이 드러날 것입니다.

• 그리스도인의 인식 근거
이제 마지막 구절에 이르렀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롬 8:9b). 눈치채셨겠지만 바울은 여기서 성령이라는 말 대신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로마서에서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과 혼재되어 사용됩니다. 삼위일체의 신비 속에서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말이 우리에게는 훨씬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과 접속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자기 뜻을 관철시키려 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온 몸과 마음을 다 바칩니다. 또한 주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세상의 아픔과 곤고함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 귀신 들린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의 아픔을 마치 당신의 아픔인양 받아들이셨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모든 아픔과 연약함을 당신에게로 가져와 대신 앓으셨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사 53:4a). 사람들이 고난 받는 종의 노래를 그리스도의 수난과 연결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런 그리스도의 영 혹은 마음이 없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평생 교회를 다녔다고 하여 기독교인이 된 것은 아닙니다. 그 마음 하나 얻지 못하면 우리는 가련한 사람이 됩니다. 세상이 점점 혼탁해지고 있습니다. 가난하고 주변화된 사람들의 살 권리가 점점 박탈되고 있습니다. 온 세상이 앓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세상의 고통을 치유하는 치유자로 부름받았습니다. 잊혀진 사람들에게 눈길을 주고, 자기 권리를 빼앗긴 이들의 입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세계 성찬 주일 예배를 드리는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의 영이 부어지기를 빕니다. 우리를 통해 생명과 평화가 이 땅에 유입되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1년 10월 03일 10시 18분 5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