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41. 그들은 나를 이겨내지 못했다
설교자 김기석
본문 시 129:1-8
설교일시 2021-10-10
오디오파일 s20211010.mp3 [41975 KBytes]
목록

그들은 나를 이겨내지 못했다
시 129:1-8
(2021/10/10, 창조절 제6주)

[이스라엘아, 이렇게 고백하여라. "내가 어릴 때부터, 나의 원수들이 여러 번 나를 잔인하게 박해했다. 비록 내가 어릴 때부터, 내 원수들이 여러 번 나를 잔인하게 박해했으나, 그들은 나를 이겨 내지를 못했다. 밭을 가는 사람이 밭을 갈아엎듯 그들이 나의 등을 갈아서, 거기에다가 고랑을 길게 냈으나, 의로우신 주님께서 악인의 사슬을 끊으시고, 나를 풀어 주셨다." 시온을 미워하는 사람은 그 어느 누구나, 수치를 당하고 물러가고 만다. 그들은 지붕 위의 풀같이 되어, 자라기도 전에 말라 버리고 만다. 베는 사람의 품에도 차지 않고, 묶는 사람의 품에도 차지 않아 지나가는 사람 가운데 어느 누구도 "주님께서 너희에게 복을 베푸시기를 빈다" 하지 아니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축복한다" 하지도 아니할 것이다.]

• 고난의 역사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우리 마음 속을 다 살피시는 주님께서 삶의 활력을 잃은 이들에게는 생기를, 어둠 속에 갇힌 이들에게는 빛을, 연약한 이들에게는 살아갈 용기를 불어 넣어주시기를 청합니다. 또한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하실 일을 일러주시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갈 힘도 부어주시기를 빕니다. 오늘의 본문인 시편 129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라는 제사가 붙은 여러 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시간 경험은 3대 순례 절기인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예루살렘 순례를 통해 그들은 자기들의 신앙을 재확인했고, 언약 공동체 속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체득했습니다. 삶은 우여곡절의 연속입니다. 개인의 삶도 그러하지만 더 큰 시간 속에서 바라보면 한 민족의 역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시편은 그런 경험을 반영합니다.

시편 129편은 “내가 어릴 때부터, 나의 원수들이 여러 번 나를 잔인하게 박해했다”는 탄식으로 시작됩니다. 여기서 ‘나’는 시인 자신을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순례 공동체인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시인은 민족의 운명을 마치 개인이 겪은 일처럼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파란만장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입니다. 앞서 말한 그 짤막한 문장 속에는 이스라엘이 겪어온 굴곡진 역사가 온축되어 있습니다. 저는 가끔 성경을 매끈한 텍스트가 아니라 주름이 많은 텍스트라고 말합니다. 말한 것보다 말하지 않은 것이 더 많다는 의미에서 그러합니다. 성경을 읽는 이들은 ‘말하지 않은 것’까지 들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1절에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천대 받았던 기억, 광야에서 겪었던 시련과 유목민들의 억압, 살아남기 위해 다양한 민족들과 싸워야 했던 가나안 정착 시기, 애굽, 앗시리아, 바벨로니아, 페르시아, 그리스로 이어지는 제국의 틈바구니에서 찢기고 상처받은 기억들이 다 담겨 있습니다. 그런 역사적 시련을 통과해야 했던 개인의 삶 또한 평탄할 수 없었을 겁니다. 순례자들은 민족의 기억과 개인의 기억이 떼려야 뗄 수 없게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하며 걷고 또 걸었을 것입니다.

시련을 겪을 때 사람들은 일단 시련의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고대합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길어질 때면 그 시련과 고난의 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의미가 있다면 시련 또한 견딜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함석헌 선생님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한국이 짊어져야 했던 고난의 짐은 저 자신의 죄 때문만이 아니라 세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불의를 약한 어깨 위에 지고 가는 것이 우리 사명이요 이상이라는 것입니다. 제2이사야는 세상의 모든 아픔과 죄를 대신 짊어진 고난 받는 종에 대해 말한 바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아픔을 온몸으로 부둥켜안고, 그것을 창조적으로 변형시키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이들의 소명입니다. 아픔을 겪었기에, 시련을 겪는 이들을 이해하고 또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면, 우리는 감히 그 아픔을 ‘복된 아픔’이라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조개가 몸 안에 들어온 모래를 뱉어내려고 애쓰며 겪는 아픔이 영롱한 진주로 변하는 것처럼, 삶의 상처를 품격으로 바꾸는 것, 바로 그것이 신앙인의 과제입니다.

• 영원의 빛 속에서 오늘을 보다
세상의 온갖 모순과 아픔을 겪어야 했지만 이스라엘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비록 내가 어릴 때부터, 내 원수들이 여러 번 나를 잔인하게 박해했으나, 그들은 나를 이겨 내지를 못했다”(2). 얼마나 놀라운 고백입니까? 감히 허릅숭이들은 할 수 없는 말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애상도 없습니다. ‘그들은 나를 이겨 내지를 못했다’는 말은 자기가 늘 승리자가 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거듭되는 시련 앞에서도 절망에 몸을 맡기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럴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가장 높은 곳에 계시면서도 땅에서 벌어지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신 하나님, 땅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를 기도로 들으시는 하나님, 약한 자들의 살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역사 속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변화 속에 있습니다. 시간은 모든 것을 다 바꿔놓습니다. 시간은 뜨거웠던 사랑의 감정도 재처럼 식게 만들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도 측은하게 여기게 만들기도 합니다. 로마 황제이면서 스토아 철학자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권력의 정점에 있으면서도 삶이 천년만년 지속되지 않을 것임을 늘 의식하고 살았습니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시간은 점이고 실체는 유동(流動)하는 것이며, 지각은 혼탁하고 육체 의 구성은 부패하며, 영혼은 회오리바람이고 운명은 예측하기 어려우며, 명성은 불확실한 것이다. 그리고 한마디로 요약해서 말한다면, 육체에 속하는 것은 모두 흐르는 물과 같고, 영혼에 속하는 것은 꿈이요 연기이며 삶은 전쟁이고 나그네의 일시적 체류이며, 후세의 명성은 망각이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황문수 역, 사단법인 올제, p.37)

이렇게 보면 삶이 참 허무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모든 것이 변하는 현실 속에서 살면서도 변하지 않는 세계를 바라보며 삽니다. 인간의 죄성으로 인해 세상이 점점 혼탁하게 변해가도 하나님의 공의가 결국은 굳게 서게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렇기에 쉽게 낙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패배해도 하나님은 패배하지 않으심을 믿기에 우리는 가끔 절망스러워 할 때도 있지만 이내 희망을 다시 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16:33b) 이르셨습니다. 힘 있는 자들이 늘 역사의 승리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역사를 영원의 층계를 올라가는 나선운동으로 보며 상황은 달라집니다. 역사 속에 등장했던 모든 제국은 다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그 굴곡진 역사 속에서 숨죽인 채 살던 사람들은 여전히 살아남았습니다.

• 악인의 사슬을 끊으시는 하나님
시인은 “밭을 가는 자들이 밭을 갈아엎듯 그들이 나의 등을 갈아서, 거기에다가 고랑을 길게 냈으나, 의로우신 주님께서 악인의 사슬을 끊으시고, 나를 풀어 주셨다”(3-4)고 고백합니다. 밭을 갈듯 등을 갈았다는 말은 채찍질을 당한 몸을 연상시킵니다. 장 아메리(Jean Amery, 1912-1978)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유대계 시민이었습니다. 나라가 나치스에 합병되자 벨기에로 망명하여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하여 활동하던 중 체포당해 심한 고문을 받았습니다. 그 때의 경험을 기록한 책이 <죄와 속죄의 저편>입니다. 그는 어떤 도움도 바랄 수 없고, 정당방위의 가능성도 없이 무차별적인 폭력에 노출되었던 순간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고문에 시달렸던 사람은 이 세상을 더 이상 고향처럼 느낄 수 없다. 절멸의 수치심은 사라지지 않는다.”(장 아메리, <죄와 속죄의 저편>, 안미현 옮김, 도서출판 길, p.91) 저는 책에서 만난 이 구절을 잊을 수 없습니다. 모멸감과 수치심은 세상의 어떤 지우개로도 지울 수 없는 상처입니다. 농부가 밭을 간 것처럼 몸에 모진 채찍질 자국이 난 사람들은 세상을 아름답게 보기 어렵습니다.

여러 해 전, 독일 베를린에 갔을 때 ‘유대인 박물관’을 보고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박물관 내부에 전시된 것들도 충격적이었지만, 대니얼 리버스킨트(Daniel Libeskind)가 설계한 건물의 외양 또한 놀라웠습니다. 이 건물은 위에서 보면 지그재그 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유대인의 상징인 ‘다윗의 별’을 변형시킨 것이라고 합니다. 회색빛 건물의 외관은 꽤 충격적입니다. 일반적으로 창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 창문이 없습니다. 대신 좁고 긴 띠 모양의 창문이 드문드문 사선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 창문이 제게는 채찍 자국처럼 보였습니다. 그 건물은 ‘다시는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거나 학대하지 말라’는 메시지로 들렸습니다.

순례자들은 자기들이 겪어온 시련의 역사를 밭을 가는 사람이 밭을 갈아엎듯 자기네 등을 갈아서 고랑을 깊게 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절망과 모멸감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모욕당하고 천대받는 이들 편에 서시는 하나님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의로우신 주님께서 악인의 사슬을 끊으시고, 나를 풀어 주셨다.”(4) 짧은 구절이지만 이 고백은 엄청난 파워를 보여줍니다. 악인의 사슬은 끊어지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은 압제 당하는 자들을 해방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이 마셔야 했던 분노의 잔을 적들에게 돌리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이제 내가 그 잔을 너를 괴롭힌 자들의 손에 쥐어 주겠다. 그들은, 바로 너에게 ‘엎드려라, 우리가 딛고 건너가겠다’ 하고 말한 자들이다. 그래서 너는 그들더러 밟고 지나가라고 땅바닥에 엎드려서 길을 만들고, 허리를 펴고 엎드려서 그들이 너의 등을 밟고 다니게 하였다.”(사51:23)

• 악인들의 운명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하지 않는 사람들, 힘에 도취하여 자기가 마치 신이라도 된 것처럼 처신하는 이들은 하나님을 적으로 삼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학대하고 미워하는 자들의 운명을 ‘지붕 위의 풀’에 빗대고 있습니다. 지붕 위의 풀은 자라기도 전에 말라 버리게 마련입니다. 지금 조금 높은 자리에 있다고 으스대지만 그들의 운명은 정해졌습니다. 지붕 위의 풀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베는 사람의 품에도 차지 않고, 묶는 사람의 품에도 차지 않기 때문입니다.

‘품에 차지 않는다’는 말은 참 무서운 말입니다. 다니엘서에 나오는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바벨론 왕 벨사살은 자기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화려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귀한 손님 천 명이 초대되었습니다. 술 기운이 거나해지자 그는 아버지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약탈해 온 금그릇과 은그릇을 가져 오게 하였습니다. 그 그릇에 술을 따라 마시며 그들은 자기들이 섬기는 우상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때 갑자기 사람의 손과 같은 것이 나타나 촛대 앞에 있는 왕궁 석고 벽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왕은 얼굴빛이 창백해졌고, 공포에 사로잡혀서 떨었습니다. 바벨론의 지혜자라는 사람들이 다 나서 그 뜻을 해독하고자 했지만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다니엘을 떠올립니다. 그 자리에 부름 받은 다니엘은 그 글씨를 읽고 해독해주었습니다. ‘메네 메네 데겔’과 ‘바르신’이었습니다. 함축적이긴 하지만 풀어 설명하면,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그의 나라의 시대를 계산하셔서 그것이 끝나게 하셨다는 뜻이고, ‘데겔’은 저울에 달린 임금의 무게가 부족함이 드러났다는 뜻이고, ‘바르신’은 왕국이 둘로 나뉠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단5:25-28).

왕의 힘과 부유함을 과시하기 위해 마련된 흥겨운 잔칫자리가 심판의 선고를 듣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무게가 부족함’, 그게 벨사살에게 내려진 판단이었습니다. 품에 차지 않음과 거의 같은 뜻일 겁니다. 벨사살은 ‘벨 신이 왕을 지킨다’는 뜻이지만, 벨은 그런 능력이 없었습니다. 타자를 수단으로 삼고, 무시하고, 학대하며 호가호위狐假虎威 하는 사람들의 운명은 다 동일합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의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압니다.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칠 때 그 무너짐이 엄청난 법입니다. 악인들이 불행을 당할 때 지나가는 사람들조차 그들을 위해 하나님의 자비를 빌지 않습니다.

수백 억의 돈이 어두운 곳에서 오고갔다는 소식을 들으며 많은 이들이 허탈해 합니다. 현실은 성실하게 일하면서 근검절약하며 살아가는 이들을 조롱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거나한 술자리가 숙취로 끝나는 것처럼, 불의한 이들의 잔치는 부끄러움으로 귀결되게 마련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흥청거리는 것처럼 보여도 함께 비틀거리지 마십시오. 지붕 위의 풀과 같은 그들의 운명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라는 푯대를 바라보며 걷는 사람들입니다. 악인들이 우리를 이겨내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들이 우리 영혼을 뒤흔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바알이나 아스다롯을 따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많은 이들이 걷는 넓은 길에서 벗어나 좁은 길을 걷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성공입니다. 깊어가는 가을날 과일의 맛이 들어가는 것처럼 우리 믿음도 한결 성숙해지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1년 10월 10일 10시 18분 39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