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44. 가던 길을 멈추고 살펴보라
설교자 김기석
본문 렘 6:16-21
설교일시 2021-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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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던 길을 멈추고 살펴보라
렘 6:16-21
(2021/10/31, 창조절 제9주, 종교개혁기념주일)

["나 주가 말한다. 나는 너희에게 일렀다. 가던 길을 멈추어서 살펴보고, 옛길이 어딘지, 가장 좋은 길이 어딘지 물어 보고, 그 길로 가라고 하였다.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평안히 쉴 곳을 찾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도 너희는 여전히 그 길로는 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나는 또 너희를 지키려고 파수꾼들을 세워 놓고, 나팔 소리가 나거든 귀담아 들으라고 가르쳐 주었으나, 너희는 귀담아 듣지 않겠다고 하였다." "뭇 민족아, 들어라. 온 회중아, 똑똑히 알아 두어라. 내 백성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보아라. 땅아, 너도 들어라. 내가 지금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린다. 그들이 이처럼 사악한 생각을 하였으니, 이것은 그들이 받아 마땅한 벌이다. 그들이 나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으며, 나의 율법도 무시하였기 때문이다." "스바에서 들여 오는 향과 먼 땅에서 가져 오는 향료가,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너희가 바치는 온갖 번제물도 싫고, 온갖 희생제물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 주가 말한다. 내가 이 백성 앞에 걸림돌들을 숨겨 놓아서, 모두 돌에 걸려 넘어지게 하겠다. 아버지와 아들이 다 함께 넘어지고, 이웃과 그 친구가 다 함께 멸망할 것이다."]

• 마지못해 나선 반역자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10월의 마지막 날이고, 위드 코로나라고 명명되는 단계적 완화조치 바로 전날이기도 합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기념일이기도 합니다. 벌써 504년이 되었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곳곳에서 벌어졌고, 열정에 넘치는 한국교인들은 루터와 관련된 도시들Lutherstadt로 달려가 그날을 기리던 것이 엊그제 같습니다. 그때로부터 벌써 4년이 흘렀습니다. 홍해가 갈라지듯 어떤 단절적인 변화를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개혁 열풍은 후텁지근한 바람에 지나지 않았고 한국 교회의 나쁜 관행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무서운 말씀이 떠오릅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마침내 홍수가 나서,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눅 17:27). 새로움 혹은 개혁은 언제나 저항에 직면하게 마련입니다. 그건 아픔을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새는 알을 깨는 아픔을 겪어야 하늘을 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온통 떠남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은 늘 낯선 세계 속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애굽에서 살던 히브리인들 또한 그러했습니다. 가나안에 이르기 위해 광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 단조롭고 불편하고 막막하고 두려운 장소에서 그들은 “이집트 땅 거기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배불리 음식을 먹던 그 때”(출 16:3)에 죽었더라면 더 좋았을 거라고 투덜거렸습니다. 어떤 순간 열정에 불타올라 변화를 시도했다가도 이내 환멸에 빠져버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변화는 한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끈질기게 관행과 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은 힘겹고 지루합니다. 그것을 견딜 힘이 없을 때 사람들은 이내 권태에 빠집니다. 변화가 혁명보다 어렵다고 말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부르셨을 때 사람들은 다 주저했습니다. 모세도 그렇고 기드온도 그렇고 예레미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두려운 일입니다. 자기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넘겨 드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디베랴 바닷가에서 베드로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이 특별한 부르심 앞에 선 이들의 운명을 잘 보여줍니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가고 싶은 곳을 다녔으나, 네가 늙어서는 남들이 네 팔을 벌릴 것이고, 너를 묶어서 네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너를 끌고 갈 것이다”(요 21:18).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다가 겪은 온갖 시련을 떠올리며 하나님께 원망의 말을 던집니다.

“주님, 주님께서 나를 속이셨으므로, 내가 주님께 속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보다 더 강하셔서 나를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들이 날마다 나를 조롱합니다.”(렘 20:7)

오죽하면 이런 탄식을 하겠습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부담이 되는 말씀’(렘 23:33)이라고 말합니다. 자기들을 불편하게 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속으로 구부러진 존재인 우리는 욕망을 따라 살고 싶어하지만 하나님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늘 이웃들을 배려하며 살라 하십니다. 사람들이 듣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듣기 싫어하는 말을 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마지못해 그 일을 받아들였습니다. ‘마지못해 소명을 받아들인 예언자 reluctant prophet’라는 말은 불경한듯하지만 정직한 말입니다.

• 다시 생각하기
타락한 중세 가톨릭교회의 실상을 폭로했던 마르틴 루터를 보고 사람들은 ‘주님의 포도밭을 허무는 멧돼지’라고 비난했습니다. 루터가 분란을 일으켜 사회통합을 깨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보름스에서 열린 제국 의회에 소환되었고, 그곳에서 지금까지의 발언과 신학적 입장을 철회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거절할 경우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고민에 빠진 루터는 며칠간의 말미를 달라고 했습니다. 전전반측輾轉反側하며 번민하던 그는 마침내 의회 앞에 나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취소할 수 없고 하지도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어긋난 행동을 한다는 것은 옳지 않을 뿐 아니라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 제가 확고부동하게 서 있습니다. 저는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이 몸을 도우소서. 아멘.”

이 말을 함으로 루터는 생과 사의 경계를 넘어섰습니다. 그는 더 이상 자기 행동이 안전한지, 그것이 이익이 되는지를 물으며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매인 사람이 되어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류가 없는 사람이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도 사는 동안 수많은 오류를 범하며 살았습니다. 어떤 사람도 모든 시대에 통용될 수 있는 영원의 철학을 가지고 살 수 없습니다. 자기도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계몽된 사람의 특색입니다. 롤런드 베인턴은 미국에서 공산주의를 색출하는 맥카시 선풍이 불던 시기에 <마르틴 루터>라는 기념비적인 책을 썼습니다. 맥카시 선풍은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근본주의적 신념을 바탕으로 하여 나타난 현상입니다. 롤런드는 그 책에서 마르틴 루터가 그의 마음을 끈 것이 두 가지라고 말합니다. 하나는 루터가 이성과 양심의 이름으로 교회와 국가에 도전한 일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가 자신의 입장을 밝힌 다음에도 그것을 얼마든지 다시 생각해 보려 했다는 점을 들고 있습니다. 결단을 요하는 순간에는 단호한 입장을 취하면서도 그 문제를 전적으로 재검토해서 자신이 납득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롤런드 베인턴, <마르틴 루터>, 이종태 옮김, 생명의 말씀사, p.10). 이것이 성숙한 사람의 태도가 아닐까요? 과도한 자기 확신에 사로잡힌 사람은 참 위험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제동장치가 작동하지 않는 기차와 같습니다.

• 멈추어 서야 할 때
하나님의 마음에서 멀어진 채 자기 좋을 대로 살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 주가 말한다. 나는 너희에게 일렀다. 가던 길을 멈추어서 살펴보고, 옛길이 어딘지, 가장 좋은 길이 어딘지 물어 보고, 그 길로 가라고 하였다”(렘 6:16a). 멈출 줄 모르는 것이 삶의 병통입니다. 멈추는 순간 누군가 나를 추월하여 갈지 모른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우리는 지쳤으면서도 내처 달려갑니다. 육상 경기라면 그게 맞을지 몰라도 삶의 여정에 관련된 문제라면 상황이 다릅니다. 히브리의 지혜자인 코헬렛은 “빠르다고 해서 달리기에서 이기는 것은 아니며, 용사라고 해서 전쟁에서 이기는 것도 아니더라”(전 9:11a)고 말했습니다.

빠르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지향을 잃어버리면 빠름은 오히려 독이 됩니다. 높은 산에 올라가 본 적이 있는 이들은 다 압니다. 멀리서 바라보면 오르려는 산봉우리가 뚜렷하게 보이지만, 계곡에 들어서면 정상이 시야에서 사라지곤 합니다. 낮은 봉우리가 시선을 차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가끔은 멈춰 서서 방향을 가늠해야 합니다. 지도와 나침반이 아주 유용합니다. 인생의 과정 또한 똑같습니다. 가던 길을 멈추어서 잘 살펴보고, 가장 좋은 길이 어딘지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을 여쭈어보는 반복적 과정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이 가리키시는 방향을 내다보면서도 그 길을 걸으려 하지 않습니다. 다른 길이 그 길보다 더 매력적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파수꾼을 세워 경고의 나팔을 울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소리조차 무시했습니다. 그 소리를 귀담아 들으라 이르셨지만 ‘귀담아 듣지 않겠다’고 작정한 것입니다. 그 소리를 무시한 것은 자기 욕망을 거스르는 소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들이 드러내는 삶의 모습을 예레미야는 적나라하게 폭로합니다.

“힘 있는 자든 힘 없는 자든, 모두가 자기 잇속만을 채우며, 사기를 쳐서 재산을 모았다. 예언자와 제사장까지도 모두 한결같이 백성을 속였다. 백성이 상처를 입어 앓고 있을 때에, ‘괜찮다! 괜찮다!’ 하고 말하지만, 괜찮기는 어디가 괜찮으냐?”(렘 6:13-14)

하나님의 말씀도 귀담아 듣지 않고 율법도 무시하는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재앙입니다. 하나님은 선민이라는 자부심을 품고 살면서도 한사코 하나님의 뜻을 밀쳐내는 이들을 벌하십니다. 하나님은 스바에서 들여 오는 향이나 먼 땅에서 가져 오는 향료에 마음을 빼앗기기 않으십니다. 사람들이 바치는 번제물이나 온갖 희생 제물을 싫어하십니다. 저는 말라기를 통해 주시는 말씀을 두려움으로 떠올리곤 합니다. “너희 가운데서라도 누가 성전 문을 닫아 걸어서, 너희들이 내 제단에 헛된 불을 피우지 못하게 하면 좋겠다! 나는 너희들이 싫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너희가 바치는 제물도 이제 나는 받지 않겠다”(말 1:10). 종교가 타락할 때 악취가 납니다. 코로나19 이후 시대의 교회에 대한 논의가 활발합니다. 교회를 회복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근본적 사실을 잊지 않는 게 더 중요합니다. 코로나19는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밝히신 멈춤 신호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비탈길을 내리달리는 돼지떼처럼 몰락을 향해 질주하는 인간 문명에 대한 멈춤 신호인 동시에 십자가 정신을 잃어버린 채 자본주의 세상에 동화되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교회에 대한 멈춤 신호 말입니다. 지금은 정말 질주를 멈추고 깊이 성찰하고, 가장 좋은 길이 어딘지를 여쭤보고 단호하게 그 길을 택해야 할 때입니다. 이 기회마저 놓친다면 하나님께서 촛대를 영원히 옮기실지도(계 2:5b) 모르겠습니다.

• 예수의 새로움
종교개혁주일을 맞으면서 저는 예수님이야말로 진정한 개혁자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주님은 경직된 율법주의가 사람들의 삶을 옭죄고 있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접속된 채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거룩함이라는 척도를 가지고 사람들을 가르고 차별하는 종교인들의 위선을 꾸짖으셨고, 자비의 눈으로 이웃을 바라보셨습니다. 옳고 그름의 척도를 가지고 사람들을 평가하는 대신, 사람들이 겪고 있는 아픔 속으로 풍덩 뛰어드셨고, 그들이 생명의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도우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아낌, 존중, 돌봄, 사랑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이 마음이 우리 행동과 말 속에서 묻어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에 잇댄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마음이 없다면 교회 직분이 무엇이든, 교회에 다닌 세월이 얼마이든 우리는 그리스도와 무관한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깊어짐이란 옛 사람이 죽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제도로서의 종교를 개혁하는 일은 물론 중요하지만 우리들 각자의 지향과 마음이 바뀌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가리켜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르는 제사장으로서, 우리 죄를 사하기 위해 단 한 번의 영원히 유효한 제사를 드리셨다고 말합니다(히 10:12). 주님은 자신을 제물로 바친 제사장이십니다. 다른 이들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셨다는 말입니다. 누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그런 사랑 덕분에 구원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예수를 믿는 이들에게서 그런 삶이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전하면서도 스스로 권력에 도취된 이들이 많습니다. 많은 사람이 추종하고, 언제든 필요한 돈을 쓸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이들은 자기를 과대평가하기 쉽습니다. 대접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자기가 기대한 대접을 받지 못하면 화를 내는 이들을 종종 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랍비, 지도자, 아버지’라는 호칭을 듣지 말라고(마 23:8-10) 이르셨습니다.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의 시선에 자주 노출되는 사람일수록 자기 본분을 잊지 않기 위해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주님은 당신을 붙잡아 왕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을 피해 한적한 곳으로 가곤 하셨습니다. 대중들의 칭찬이 때로는 독이 되기도 하는 법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마르틴 루터는 필요할 때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결단하고 또 과감하게 행동했지만 늘 돌이켜 생각해 보곤 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오류에 빠지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늘 조심해야 합니다. 겸손하게 주님의 뜻을 여쭈어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장벽 철폐자로 사셨습니다. 사람들을 가르는 담을 무너뜨려 이전에는 만날 수 없던 사람들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담을 쌓아 올리고, 담 저편의 사람들을 혐오하면서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기만일 뿐입니다. 한국교회에 희망이 있냐고 묻는 이들이 많습니다. 희망은 발이 없어서 누군가가 어깨로 메고 와야 올 수 있습니다. 희망은 예수의 마음으로 사람과 세상을 대하는 이들을 통해 이 세상에 유입됩니다. 미국의 어느 교회 앞에 적힌 글을 보았습니다. “교회가 된다는 것; 가난한 사람 돌보기, 다양성 받아들이기, 인종주의에 저항, 기후 위기와 맞서 싸우기, 자주 용서하기, 하나님 사랑, 무력한 이들 속에 힘을 불어넣기, 자원 나누기, 이 생을 즐기기”. 이 목표가 우리의 목표가 될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1년 10월 31일 12시 00분 59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