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46. 물고기 배 속에서
설교자 김기석
본문 욘 2:1-10
설교일시 2022-11-14
오디오파일 s20211114.mp3 [48823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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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 배 속에서
욘 2:1-10
(2021/11/14, 창조절 제11주)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주 하나님께 기도드리며 아뢰었다. "내가 고통스러울 때 주님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님께서 내게 응답하셨습니다. 내가 스올 한가운데서 살려 달라고 외쳤더니, 주님께서 나의 호소를 들어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바다 한가운데, 깊음 속으로 던지셨으므로, 큰 물결이 나를 에워싸고, 주님의 파도와 큰 물결이 내 위에 넘쳤습니다. 내가 주님께 아뢰기를 '주님의 눈 앞에서 쫓겨났어도, 내가 반드시 주님 계신 성전을 다시 바라보겠습니다' 하였습니다. 물이 나를 두르기를 영혼까지 하였으며, 깊음이 나를 에워쌌고, 바다풀이 내 머리를 휘감았습니다. 나는 땅 속 멧부리까지 내려갔습니다. 땅이 빗장을 질러 나를 영영 가두어 놓으려 했습니다만, 주 나의 하나님, 주님께서 그 구덩이 속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셨습니다. 내 목숨이 힘없이 꺼져 갈 때에, 내가 주님을 기억하였더니, 나의 기도가 주님께 이르렀으며, 주님 계신 성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헛된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저버립니다. 그러나 나는 감사의 노래를 부르며, 주님께 희생제물을 바치겠습니다. 서원한 것은 무엇이든지 지키겠습니다. 구원은 오직 주님에게서만 옵니다." 주님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니, 물고기가 요나를 뭍에다가 뱉어 냈다.]

• 한 걸음씩 앞으로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우리 마음의 비밀을 아시는 주님께서 예배에 동참한 모든 이들의 상처를 치유하시고, 지친 이들의 마음에 하늘의 숨을 불어넣어주시기를 빕니다. 지금 우리는 아주 조심스럽게 일상의 회복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 우리 교회가 수용할 수 있는 최대치의 성도들이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감동적인 순간이었습니다.

문득 빅터 프랭클이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에서 들려준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나치의 수용소에 갇혔던 사람들은 느닷없이 찾아온 그 해방을 실감하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주저하던 죄수들이 수용소 밖으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감시병들의 고함소리도, 발길질도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수용소 밖으로 쭉 뻗어있는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습니다. 기운이 없어 절뚝거리긴 했지만 주저앉을 수는 없었습니. 그는 ‘자유’라는 말을 되뇌어 보았습니다. 지난 수년간 꿈속에서도 잊을 수 없었던 그 한 마디였지만 현실감 있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빅터 프랭클은 홀로 꽃이 만발한 꽃밭을 지나 시골의 들판을 가로지르며 걷고 있었습니다. 종달새가 하늘로 날아올랐습니다. 주위 수 마일 내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하늘을 우러러보았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무릎을 털썩 꿇었습니다. 그의 입에서 이런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저는 저의 비좁은 감방에서 주님을 불렀나이다. 그리고 주님은 공간의 자유 속에서 저에게 응답을 하셨나이다.” 빅터 프랭클은 그날 얼마나 오랜 시간을 거기서 무릎을 꿇고 있었는지 기억할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 시간부터 자기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나는 다시 인간이 될 때까지 한 걸음 또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김충선 역, 청솔출판사, p.117-8) 저는 이 대목을 떠올릴 때마다 감동합니다. 한 걸음씩만 앞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조금 더 평화롭고 생명이 존중되는 세상을 향해. 한달음에 목표에 도달할 수는 없더라도 조금씩 인내하며 나아가면 됩니다.

• 절망의 심연에서
요나 이야기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좋아하는 이야기입니다. 짧은 책이지만 그 속에는 온갖 드라마적 요소가 다 담겨 있습니다. 요나의 성격도 확실합니다. 요나는 “너는 어서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 성읍에 대고 외쳐라. 그들의 죄악이 내 앞에까지 이르렀다“(욘1:2)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자마자 스페인으로 도망가려고, 욥바로 내려갔습니다. 성경은 다만 그의 행동의 동기를 ‘주님의 낯을 피하여‘라는 말로 갈무리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선악과를 따먹고 나무 뒤에 숨었던 아담의 행동을 표현할 때도 등장합니다. 주님의 낯을 피한 삶의 결과는 하강 곧 낮아짐입니다. 요나의 행적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욥바로 내려가고, 배 밑창으로 내려가고, 바다 속에 던져지고, 급기야는 물고기 배 속에 삼켜집니다. 그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고 했지만 하나님을 피할 장소는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시편 139편 시인은 주님의 영을 피해서 달아날 곳이 없다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하늘로 올라가더라도 주님께서는 거기에 계시고, 스올에다 자리를 펴더라도 주님은 거기에도 계십니다. 내가 저 동녘 너머로 날아가거나, 바다 끝 서쪽으로 가서 거기에 머무를지라도, 거기에서도 주님의 손이 나를 인도하여 주시고, 주님의 오른손이 나를 힘있게 붙들어 주십니다.“(시139:8-10)

어느 냉소주의자는 지옥은 한 순간도 자기를 잊을 수 없는 곳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지옥은 하나님의 부재 경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멀어지려 해도 떨쳐버릴 수 없는 분이십니다. 요나가 아무리 낮아져도 하나님의 은총의 손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큰 물고기 한 마리를 마련하여 두셨다가, 그를 삼키게 하셨습니다. 지중해에 사람을 쉽게 삼킬 수 있는 그런 물고기가 있는지를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일입니다. ‘물고기 배 속‘이라는 말은 많은 이들의 문학적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암담하고 절망스런 상태를 나타내기에 그보다 좋은 은유가 없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후텁지근하고, 캄캄하고, 악취가 진동하고, 뭔가 왈칵왈칵 넘어오는 데 도무지 피할 곳은 없는 곳이 바로 물고기 배 속입니다. 요나가 처한 상황이 그러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를 더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사실 커다란 물고기는 앗시리아 사람들이 섬기던 다곤 신을 암시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다곤은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서 섬김을 받던 어업의 신입니다. 물고기 배 속에 갇힌 요나의 상황은 어쩌면 앗시리아의 억압을 받던 이스라엘의 상황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요나는 물고기 배 속에서 사흘 밤낮을 갇혀 지냈습니다. 사람이 물고기 배 속에서 사흘을 버틸 수 있는지 따지는 것도 무의미한 일입니다. 사흘은 수메르 신화에서 지하 세계인 스올에서 산 자의 땅으로 귀환하는 시간을 가리킨다는 말입니다. 요나서는 수메르 신화를 차용하여 더 놀라운 메시지를 전하려 합니다.

성경에서 사흘은 변화의 시간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기 위해 모리아 산까지 걸어간 시간이고(창 22:4), 요셉이 식량을 사려고 애굽에 내려온 형들에게 간첩죄를 씌워 감옥에 가둔 시간이고(창 42:17), 출애굽 당시에 이집트 온 땅이 어둠에 갇혔던 시간이고(출 10:22), 희생제물의 남은 고기를 처리해야 하는 시간이고(레 7:17), 십자가 처형을 당하신 주님이 부활하시기까지 걸린 시간이기도 합니다.

• 낮춰주시는 은혜
물고기 배 속에 갇힌 요나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그는 하나님께 기도를 바칩니다. 2절부터 9절에 이르는 이 기도는 출애굽기 15장에 나오는 감사 기도와 매우 유사합니다. 홍해를 건넌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은 바로의 병거와 그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고,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요나서 2장이 이 책의 종교적 가치를 강조하기 위해 삽입한 시편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요나는 물고기 배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올립니다. 사람은 절박할 때 기도합니다.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무사하기를 기도하고,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땅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조차 기도로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아벨의 피가 흐른 땅의 외침을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요나는 삶의 가능성이 다 끊어진 것 같은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어쩌면 인간의 한계상황은 구원의 입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계상황이란 유한함에 대한 자각, 무력감, 공허, 질병, 죽음, 죄책 등 우리가 아무 것도 해볼 것이 없는 상황을 이르는 말입니다.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인간은 한계상황에 직면할 때 비로소 본래적 실존으로의 비약이 일어난다고 말했습니다. 쉬운 말로 하자면 그 동안 집착하고 소중하게 여기던 것들로부터 놓여나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한계상황은 돈, 출세, 명예, 권력 따위에 집착하던 삶에서 벗어나 사랑, 우정, 나눔, 돌봄, 아낌, 섬김의 삶을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요나는 물고기 배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내가 고통스러울 때, 주님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님께서 내게 응답하셨습니다. 내가 스올 한가운데서 살려 달라고 외쳤더니, 주님께서 나의 호소를 들어주셨습니다.“(2:2)

그는 이미 기도의 응답을 받은 자로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요나는 자기가 겪은 모든 일이 하나님의 낯의 피하여 달아난 삶의 결과임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바다풀이 머리를 휘감고, 깊음이 에워싸고, 영혼까지 물에 잠긴 것 같고, 마치 땅이 빗장을 질러 자기를 가둔 것 같았지만, 이제는 하나님께서 자기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오만에 빠져 있을 때, 그 고질병으로부터 벗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 우리를 깊은 바다 가운데로 던지기도 하십니다. 고통의 심연 속에서 자기의 실상을 보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낮아지기 어려운 존재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강생의 신비를 전해줍니다. 우리는 자기를 비워 종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낮아질 생각이 없습니다. 사소한 일에도 화를 내고, 작은 손해를 참지 못하고, 차별을 받는다고 속상해 합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가장 사랑하는 이들을 낮춰주십니다. 낮춰진다는 것은 쓰라린 일이고 회피하고 싶은 일입니다. 그러나 낮은 자리에 설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구원의 문은 몸을 낮추지 않으면 찾기 어렵습니다. 좁은 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더 넓은 세계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이런 경험을 평화노래꾼인 홍순관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낙타를 따라 바늘구멍으로 들어가 봅니다.
따라 들어가 보니 그렇게 넓을 수가 없습니다.
들어가고도 남음이 있어 춤을 추고도 넉넉합니다.“
(홍순관, <네가 걸으면 하나님도 걸어>, 살림, p.118)

• 본분에 대한 자각
가장 낮은 자리, 절망의 심연에서 요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합니다. “주님의 눈 앞에서 쫓겨났어도, 내가 반드시 주님 계신 성전을 다시 바라보겠습니다“(4). 이 구절은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를 떠올리게 합니다. 솔로몬은 그의 백성들이 처한 삶의 자리에서 성전을 기억하며 기도할 때 응답해달라고 청합니다.

“또 그들이 사로잡혀 간 원수의 땅에서라도,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주님께 회개하고, 주님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주신 땅과 주님께서 선택하신 이 도성과 내가 주님의 이름을 기리려고 지은 이 성전을 바라보면서 기도하거든, 주님께서는, 주님께서 계시는 곳인 하늘에서, 그들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그들의 사정을 살펴 보아 주십시오.“(왕상 8:48-49)

성전을 바라본다는 것은 참회한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던 자기 마음을 제자리로 돌려놓는다는 뜻입니다. “내 목숨이 힘없이 꺼져 갈 때에, 내가 주님을 기억하였더니, 나의 기도가 주님께 이르렀으며, 주님 계신 성전에까지 이르렀습니다“(2:7).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회복되는 순간, 절망의 어둠은 희망의 빛으로 바뀝니다. 목숨은 ‘네페쉬nephesh’의 번역어인데, 정말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숨 쉬는 존재, 영혼, 감정과 열정의 자리 등을 나타낼 때 두루 쓰입니다. 요나는 자기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은 물론이고 살 희망조차 잃어버려 의욕도 다 사라진 상태 속에서 비로소 하나님을 기억하였다고 말합니다. 절망의 자리가 희망의 문이라는 말이 과언이 아닙니다.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은 우리 아픔을 함께 아파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요나는 고백합니다. “구원은 오직 주님에게서만 옵니다“(2:9b).

이 고백에 이르기까지 요나는 땅 속 멧부리까지 내려가야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빗장을 지른 땅 속에 갇힌 채 힘없이 꺼져 들어가는 상황에 직면해서야 비로소 은혜의 신비 앞에 섰습니다. 그 덕분에 그는 헛된 우상의 길에서 확고하게 벗어나, 베풀어 주신 은혜를 찬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물고기에게 명하시어 그를 뭍에다가 뱉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또 다시 파송하십니다. “너는 어서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이제 내가 너에게 한 말을 그 성읍에 외쳐라“(3:2).

3장의 요나는 1장의 요나와는 다른 사람입니다. 절망의 심연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어리석음은 한 번에 벗겨지지 않습니다. 요나는 주님의 명령대로 니느웨에 가서 “사십 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고 외칩니다. 그러나 그 외침에는 니느웨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여전히 그는 편협한 민족주의적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요나서는 니느웨 사람들과 임금 그리고 짐승까지도 굵은 베옷을 입고 참회하고, 나쁜 길에서 돌이키고, 폭력을 그쳤기에 심판을 면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한 민족의 이런 총체적 변화가 과연 가능한 것일까요?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과정을 통해 요나의 편협한 생각을 고치고 계셨습니다. 요나는 원수의 나라가 망하기를 바랐지만 하나님은 그들까지도 아끼시는 분임을 일깨워주셨습니다. 요나서가 의문문으로 끝난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4:11) 하나님의 이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편협함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큰 마음에 접속되는 과정입니다. 코로나19로 우리들은 그동안 쌓아올린 문명이 물고기 배 속에 갇힌 것과 같은 충격을 경험했습니다. 이제는 새로워져야 할 때입니다. 어리석음, 편협함, 이기주의의 옛 생활에서 벗어나 생명 중심의 삶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러한 소명에 삶으로 응답할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 본문에서는 ‘물고기 뱃속‘이라고 표기되어 있지만, ‘뱃속’은 마음을 속되게 이르는 말입니다. ‘뱃속을 들여다보다‘, ‘뱃속을 채우다‘라는 용례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배의 안쪽 부분‘을 이르는 경우에는 ‘배 속‘으로 쓰는 것이 옳습니다.

* 다곤 신

등 록 날 짜 2021년 11월 14일 10시 39분 36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