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47. 그리스도, 우리의 중심
설교자 김기석
본문 눅 23:1-5
설교일시 2021-11-21
오디오파일 s20211121-2.mp3 [48415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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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우리의 중심
눅 23:1-5
(2021/11/21,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

[그들 온 무리가 일어나서, 예수를 빌라도 앞으로 끌고 갔다. 그들이 예수를 고발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우리 민족을 오도하고, 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반대하고, 자칭 그리스도 곧 왕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예수께 물었다.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오?" 예수께서 빌라도에게 대답하셨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고 있소."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는 아무 죄도 없소."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주장하였다. "그 사람은 갈릴리에서 시작해서 여기에 이르기까지, 온 유대를 누비면서 가르치며 백성을 선동하고 있습니다."]

• 예수 우리 왕이여
주님의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성령강림 후 26주이면서 교회력으로 일년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을 우리는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이라 부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왕이심을 되새기는 날입니다. 우리는 몇 해 전까지 예배를 준비하면서 찬송가 38장을 함께 부르곤 했습니다. “예수 우리 왕이여 이곳에 오셔서 우리가 함께 드리는 영광을 받아주소서 우리는 주님의 백성 주님은 우리 왕이라 왕이신 예수님 오셔서 좌정하사 다스리소서”. ‘이곳’, ‘우리’, ‘함께’라는 단어들은 예수 안에서 우리를 하나로 묶는 끈이었습니다. 우리 삶의 목표인 동시에 중심이신 주님을 함께 바라볼 때 심오한 기쁨이 우리 속을 채웠습니다. 주님을 왕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삶의 통제권을 그분께 넘겨드림을 의미합니다. 사막의 성자 샤를 드 푸꼬의 ‘의탁依託의 기도’가 떠오릅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몸을 당신께 맡겨드리오니 당신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저를 어떻게 하시든 감사드릴 뿐, 저는 무엇이나 준비되어 있고 무엇이나 받아들이겠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제 안에서 이루어진다면 이 밖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기도에서 샤를 드 푸코는 자기 몸을 주님 손에 맡기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자기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이 기도 속에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다는 말의 의미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바다에 빗대 말합니다. 바다는 세상의 모든 물을 품어 안습니다. 바다 ‘해海’ 자 속에는 어머니 ‘모母’ 자가 들어 있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다는 모든 물의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는 자식들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모두를 품에 안을 뿐입니다. 바다가 모든 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가장 낮은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질서의 가장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보시는 분이 아니라, 세상의 가장 밑바닥에서 온 세상을 떠받치고 계신 분입니다. ‘존재의 기반’이라는 말입니다.

빌립보서는 예수님의 자기 비움의 신비를 전해줍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빌2:6-7) 구원은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 혹은 낮추심을 통해 세상에 유입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주변화된 사람들, 병들거나 귀신들린 사람들, 죄인으로 낙인 찍힌 사람들의 아픔을 당신의 것으로 부둥켜안으셨습니다. 재독 학자인 한병철 교수는 그의 책 <고통 없는 사회>(이재영 옮김, 김영사)의 맨 앞에 발터 벤야민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인간에게는 몸의 모든 느낌들 가운데 고통만이 배를 타고 운행할 수 있는 강, 인간을 바다로 이끌어주는 마르지 않는 물을 지닌 강과 같다. 인간이 쾌감을 좇으려고 애쓰는 곳 어디서나 쾌감은 막다른 길임이 밝혀진다“

고통이라는 강을 통해서만 드넓은 세계,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마음에 이를 수 있다는 뜻일 겁니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쾌감 혹은 쾌락은 일시적인 즐거움은 줄지 모르지만 결국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된다는 말에 저는 깊이 공감합니다.

• 불편한 사람
세상의 모든 아픔을 부둥켜안으신 예수님이 모든 사람으로부터 사랑받고 받아들여진 것은 아닙니다. 병자들과 귀신들린 사람들,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던 이들은 예수님과 만나 몸과 마음의 치유를 경험하고 거룩한 삶을 회복했지만,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살던 이들은 예수님을 불편하게 여겼습니다. 성전 체제에 기생하면서 온갖 특권을 누리던 이들은 사람들의 시선이 예수님께 쏠리는 것을 불쾌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종교 전문가를 자처하면서 사람들의 스승이요 은인 노릇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사람들은 거룩과 속됨의 기준을 가지고 사람들을 평가하는 그들을 두려워했습니다. 권력은 바로 두려움을 숙주로 삼아 자기 몸집을 키웁니다.

한때 저는 원죄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지나친 자학처럼 보였고, 인간의 자유 의지를 제한하는 말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선을 선택하고 그 선 의지를 구현하며 살 능력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좀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죄의 경향성을 스스로 통제하기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선해 보이는 사람 속에도 악에 이끌릴 때가 있습니다. 상식 혹은 교양을 통해 억눌러두었던 악이 모습을 드러내고 힘을 발휘할 때면 속수무책입니다. 우리는 대부분의 순간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으로 삽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악에게 기회를 주기도 합니다.

이게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날마다 원죄 이야기만 반복하고 있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죄를 극복할 힘은 우리에게 없지만 우리는 주님의 은총에 힘입어 악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주님은 사람들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으셨고 죄인으로 규정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들의 아픔과 상처를 감싸 안으셨습니다. 그 가없는 사랑을 경험한 이들은 누구나 자기들 속에서 선의 의지가 깨어남을 느꼈습니다. 생명은 사랑의 온기 속에서만 싹을 틔우는 법입니다. 나쁜 종교는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공포심을 주입하여 옴짝달싹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참된 종교는 인간의 죄성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에 눈을 뜨도록 만듭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두려움에 기생하여 특권을 누리던 이들에게 예수님은 위험한 인물이었습니다.

칼릴 지브란의 책 <반항하는 정신>에는 ‘이단자 칼릴‘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기독교인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이단적 사상을 가르친 사람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예수 정신으로 살려 한 수도사입니다. 그런데 세속적인 것으로부터 멀어지기는커녕 탐욕에 빠져 있던 수도사들은 그에게 ‘이단자’라는 오명을 안겨주고 쫓아냅니다. 칼릴은 대체 어떤 말을 했길래 쫓겨난 것일까요? 그의 말은 예언자의 말처럼 날카롭습니다.

“못난 백성들의 눈물은 잘난 당신들의 거드름피우는 웃음보다 더 아름답고, 가난한 이웃을 돕는 저들의 소박한 마음씨는 이 수도원 곳곳에 세워지고 걸려 있는 우상들보다 더 거룩하며, 걸인이나 창녀를 측은히 여기고 동정하는 저들의 따뜻한 한 마디 말은 우리가 매일같이 빈 말로 허공에다 뇌이는 긴 기도문보다 더 숭고한 것입니다.“(칼릴 지브란, <반항하는 정신>, 이경하, 옮김, 당그레, p.23-24)

수도사들은 칼릴이 주제넘는 말을 한다며 불같이 화를 냅니다. 대놓고 조롱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결국에는 이단자라는 오명을 씌워 쫓아냅니다. 어쩌면 이것은 칼릴의 이야기인 동시에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의 교회라고 하여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 빌라도 앞에서
주님은 종교 전문가를 자처하는 이들의 모함으로 인해 빌라도의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죄가 있다면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고통 받는 이들의 아픔을 덜어주려 한 죄 밖에 없는 주님이 사람들에게 붙잡혀 이방인 총독에게 끌려간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붙인 죄목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민족을 오도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을 반대했다는 것이고, 셋째는 자칭 왕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혐의와 정치적인 혐의를 교묘하게 섞음으로 진실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재판 이야기를 볼 때마다 소크라테스의 재판이 떠오릅니다. 멜레토스라는 사람이 소크라테스를 고발하며 쓴 내용 가운데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소크라테스는 국가가 인정하는 신들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새롭고 기묘한 신령 따위를 들여오는 죄를 저지르고 있다. 또 청년들을 타락시키는 죄를 저지르고 있다. 이리하여 사형을 구형한다.“ 소크라테스는 젊을 때부터 어떤 일을 하려 할 때 그 일을 금하는 내면의 소리가 들려왔다고 말했습니다. 다이몬의 음성입니다. 멜레토스는 그것을 국가가 인정하지 않는 다른 신을 섬긴다고 고발한 것입니다. 청년들을 타락시켰다는 말은 소크라테스가 소위 권위자들과 대화를 통해서 그들의 무지와 허위의식을 드러내는 것을 본 청년들이 그 대화법을 흉내내면서 권위자들을 조롱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소크라테스의 죄는 기득권자들이 누리던 권력의 토대를 흔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바른 소리’, ‘참 소리’는 경청되지 않습니다. 평화가 없는 데도 평화를 가르치는 거짓 예언자들은 환대받았지만, 사람들의 죄를 꾸짖고 여호와께 돌아오라는 참 예언자들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박해도 똑같은 과정을 거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오?” 하고 묻자 “당신이 그렇게 말하고 있소”라고 응대합니다. 빌라도가 궁금했던 것은 예수가 로마 통치에 대해 정치적으로 저항하는 사람들의 우두머리인지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빌라도는 거의 본능적으로 그가 정치적인 선동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고발자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는 아무 죄도 없소”(4). 하지만 그들은 예수가 갈릴리에서 시작해서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온 유대를 누비면서 가르치며 백성들을 선동했다면서 거듭 유죄 선고를 내리라고 빌라도를 압박합니다. 그들은 이방인 집권자를 통해 자기들의 특권을 해체하려 한 예수를 제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 예수의 몸으로 산다는 것
오늘 우리는 어떤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왕이라 고백하면서도 한사코 우리 삶의 주도권을 그분께 넘겨드릴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닌지요? 요즘 젊은이들이 자주 사용하는 말이 있습니다. ‘블라 블라 블라 blah blah blah’라는 말 들어보셨나요? 미국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말이라고 하는데 뜻은 ‘어쩌고 저쩌고‘ 정도로 새길 수 있습니다. 누군가 허튼소리를 계속할 때 그것을 조롱하는 의미로 주로 쓰인다고 합니다. 청소년 환경운동가인 툰베리가 세계 정상들이 말만 할 뿐 기후 위기에 대한 대책을 내놓지 않는다면서 쓴 말이기도 합니다. 말장난이긴 하지만 ‘불라불라’를 뒤집으면 경솔하게 입을 놀린다고 할 때 쓰는 ‘나불나불’이 됩니다. 삶은 뒤따르지 않으면서 나불거리기만 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며칠 전 ‘Voice of America‘라는 방송사에게 제작한 한 영상을 보았습니다. 미국 필라델피아의 노스센트럴(North-Central) 지역에서 빈민들과 함께 사는 이태후 목사의 사역을 소개하는 짧은 영상이었습니다. 그는 여러 해 전 우리 교회에 와서 자신의 경험을 나눠주기도 한 저의 길벗입니다. 그가 살고 있는 우버 스트리트(Uber street) 지역은 총기사고가 빈발하고 범죄율도 아주 높은 위험한 곳입니다. 금년에도 몇 차례 총기 살해 사건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주민의 90%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고 절대 빈곤 이하의 상황에 처한 이들이 아주 많이 살고 있습니다. 정부는 그 동네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동양인은 한 사람도 없고 그 동네에 교회도 여럿 있지만 목사님들 가운데 그 지역에 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합니다. 그는 신학교 시절 히스패닉을 위해 일하는 마누엘 오티즈 목사를 보고 빈민들 가운데서 살기로 작정했습니다. 2003년부터 그곳에 살면서 그는 주민들의 좋은 이웃이 되기 위해 애썼습니다. 이른 아침마다 골목길을 청소하고, 홀로 사는 노인들 집 앞의 눈도 치워주었습니다. 몇 해가 지나 사람들이 의심의 시선을 거두고 신뢰를 보이기 시작할 무렵 방치되어 있는 아이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곳 아이들은 보고 듣는 것이 없었기에 아무런 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2006년부터 아이들을 위한 여름 캠프를 시작했습니다. 몇 주 동안 지속되는 캠프에 참여하는 아이들은 따뜻한 돌봄을 경험하며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의 변화가 주민들에게도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일주일에 이틀씩 가난한 이들에게 식료품을 나눠주고 있습니다.(유튜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필라델피아 빈민가의 기적 이태우 목사’)

이태후 목사는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신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삶으로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는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지만 먹이고 섬기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자 주님은 사람들을 보내주셔서 그 일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하셨다고 고백합니다. 과연 그리스도는 우리의 왕이십니까? 고백만이 아니라 이제는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일이라도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주님께서 이 귀한 일에 우리와 우리 교회를 선하게 사용하여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1년 11월 21일 12시 06분 45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