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51. 마라나 타
설교자 김기석
본문 고전16:21-24
설교일시 2017/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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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나 타
고전16:21-24
(2017/12/24, 대림절 제4주)

[나 바울은 친필로 인사의 말을 씁니다. 누구든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저주를 받으라! 마라나 타, 우리 주님, 오십시오. 주 예수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있기를 빕니다. 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 모두를 사랑합니다. 아멘.]

• 라헬의 울음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4주간의 대림절 마지막 주일을 맞았습니다. 주님 모실 자리는 잘 마련하고 계신지요? 설렘과 기쁨으로 주님을 모시고 싶은 우리의 염원은 연이어 들려온 비극적인 소식으로 인해 찢기고 말았습니다. 한 대학병원 인큐베이터에 있던 신생아들이 모종의 감염으로 인해 죽었습니다. 아기들의 시신을 담은 조그마한 박스, 그리고 그 위에 무심히 내리는 눈발이 그렇게 슬플 수 없었습니다. 제천에서 일어난 스포츠센터 화재사고로 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생명을 노래해야 하는 계절에 눈물과 절규, 안타까움의 탄식이 넘칩니다. 주님의 위로가 모든 이들에게 임하시기를 빌 뿐입니다.

우리는 마태가 전하는 첫 번째 크리스마스 이야기에 등장하는 어둡고 무서운 현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베들레헴 인근에서 태어난 두 살 미만의 아기들이 헤롯이 보낸 군인들에 의해 학살당했다고 말합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등장하지 않는 그 이야기가 실제 발생한 사건인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마태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그는 예수를 '새로운 모세', 곧 백성을 구원할 분으로 소개하려 합니다. 헤롯에 의해 자행된 영아 학살 이야기는 애굽에서 벌어졌던 히브리 아기들의 학살 이야기와 연결되고 있습니다. 그 두 이야기는 새로운 세상은 대가를 치루지 않으면 올 수 없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기존체제를 뒤흔들 수 있는 존재의 등장을 힘 있는 이들이 용납할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는 천사들의 노랫소리, 성탄의 별, 동방박사, 목자들, 구유 등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요소들도 있지만, 짙은 그림자 또한 드리워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잠시 후 브라스밴드가 연주할 코벤트리 캐롤(Coventry Carol)은 16세기 영국의 코벤트리 지역의 성탄절 연극에서 처음 등장한 노래인데, 베들레헴에서 죽임당한 아기들이 주님 품에서 편히 쉬기를 바라는 엄마의 자장가라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낯설지만 서양에서는 자주 연주되는 곡이라고 합니다. 그 장중한 선율은 에덴 이후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현실을 냉철하게 돌아볼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제나 그제나 어머니의 눈물이 마르지 않는 세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에 더 이상 억울한 죽음이 없는 세상, 모든 이들이 저마다의 생명을 한껏 누리는 세상의 꿈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분을 모시고, 그분과 함께 이 척박한 세상에 평화의 씨를 심어야 합니다.

• 아나테마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바울의 첫 번째 편지의 종결부입니다. 신앙적 이견으로 말미암아 혼란에 빠진 고린도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해 바울은 참 긴 편지를 썼습니다. 음식 규정, 음행 문제, 교인들 간의 송사문제, 이방인과의 접촉 문제, 성만찬, 예배의 질서, 은사에 대한 이해, 가장 큰 은사인 사랑과 부활에 이르기까지 바울은 참 다양한 주제를 다뤘습니다. 16장은 편지의 마무리입니다. 어려운 이들을 돕기 위한 연보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린도에 가서 머물고 싶은 개인적 바람, 디모데를 잘 영접해 달라는 부탁과 아울러 아볼로의 근황도 전합니다. 고린도교회가 바울에게 파견했던 스데바나, 브드나도, 아가이고가 얼마나 귀한 역할을 감당했는지를 전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나의 마음과 여러분의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사람들을 알아주어야 합니다."(16:18)

훈훈합니다. 따뜻한 문안 인사를 건넨 후에 덧붙인 말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바울은 이 서신을 누군가에게 대필시켰던 것 같습니다. 편지 말미에 그는 마치 서명을 하듯 친필로 몇 구절을 적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조가 사뭇 단호합니다. 편지를 읽는 모든 이들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합니다. "누구든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저주를 받으라!" 바울은 다정다감하고 온유한 사람이라기보다는 때로는 칼날처럼 단호하게 군더더기를 잘라내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진리를 거스르는 자들에 대해서는 거친 말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도 '다른 복음'을 전하는 할례주의자들을 경계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할례를 가지고 여러분을 선동하는 사람들은, 차라리 자기의 그 지체를 잘라 버리는 것이 좋겠습니다."(갈5:12) 진리 앞에서는 어떤 타협의 여지도 남겨두지 않는 단호함이 느껴집니다.

"누구든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저주를 받으라!"는 이 말은 엉거주춤한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을 혼곤한 잠에서 깨우는 일종의 죽비입니다. 이것을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는 근거로 활용하면 안 됩니다. '저주'를 뜻하는 아나테마anathema는 다양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저주라는 단어는 타락 이후에 하나님께서 유혹자인 뱀에게 벌을 내리시는 이야기 가운데 처음 등장합니다. "네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모든 집짐승과 들짐승 가운데서 네가 저주를 받아, 사는 동안 평생토록 배로 기어다니고, 흙을 먹어야 할 것이다."(창3:14). 그 후에 땅에도, 동생을 죽인 가인에게도 저주가 내립니다. 하나님이 내리시는 저주는 본래적 삶의 가능성에서 멀어짐을 초래합니다. 땅은 불모의 장소로 바뀌고, 인간은 소속감을 잃은 채 세상을 떠돌게 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결속 감정이 해체되면서 세상은 점점 적대적 공간으로 변해갑니다. 그런 세상에 살다가 가슴에 퍼런 멍이 든 사람들도 누군가를 저주합니다. 남을 인정할 줄 모르고, 깎아내리려 합니다. 그런 행위 자체가 이미 화입니다.

저주를 받는다는 것은 공동체로부터의 소외를 뜻하기도 합니다. 제1성서에서 부정한 행위를 한 사람은 진 안에 머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진 밖에서 정화의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누구든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저주를 받으라!"고 강하게 말하고 있지만 주님을 사랑하지 않음 그 자체가 이미 저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자기 좋을 대로 살 수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기준 음으로 삼아 자기 삶을 조율합니다. 그렇게 사는 삶 자체가 복입니다. 반대로 제 욕심껏 사는 삶은 그 자체로 저주입니다. 이것은 제 말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은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는 것(요3:18-19)이 그 판단 근거입니다.

• 은총이 오고, 세상은 물러가라
이어진 대목도 강렬합니다. "마라나 타, 우리 주님, 오십시오."(22) '마라나타'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이 단어는 아람어로 '주님'이란 뜻의 '마르mar'와 '오다'라는 뜻의 '아타ata'가 결합된 것입니다. '마란 아타maran atha'라고 하면 '우리 주님이 오신다 혹은 오실 것이다'라는 뜻이 되지만, '마라나 타marana tha'라고 하면 청유형으로 '우리 주님, 오소서'라는 뜻이 됩니다(The Anchor Bible Dictionary, vol.4, p.514 참조). 새번역성경은 청유형으로 번역해 놓았습니다.

이 단어는 기독교 초기 문헌에서 단 두 군데만 등장한다고 합니다. 하나는 오늘의 본문이고 다른 하나는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 혹은 '디다케Didache'라고 알려진 문헌입니다. 디다케는 대략 주후 100년경에 시리아에서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데, 사도 이후 시대 곧 초기 교회생활의 면모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문헌입니다. 많은 교부들이 이 책을 인용했는데, 원본은 오랫동안 발견되지 않다가 19세기 말에 발견된 아주 소중한 문헌입니다. 디다케 10장 6절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은총이 오고, 이 세상은 물러가라!/다윗의 하나님 호산나!/어느 누가 거룩하면 오고,/거룩하지 못하면 회개하라./마라나타. 아멘."

초기 교회 신자들은 주님이 오실 날을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온갖 시련과 박해 속에서도 그들이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종말론적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과 더불어 시작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하늘만 바라보며 막연히 기다린 것이 아니라, 그런 세상을 선취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사도행전의 첫 머리에는 주님이 승천하시던 장면이 등장합니다. 제자들이 구름에 싸여 하늘로 올라가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있을 때 천사들이 나타나서 말합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하늘을 쳐다보면서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서 하늘로 올라가신 이 예수는,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을 너희가 본 그대로 오실 것이다"(행1:11)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지금도 이 세상에 들어오시는 주님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마라나 타!'라고 말하는 이들은 자기의 몸과 마음, 시간과 물질을 그 분께 바쳐야 합니다. 주님께 바친 것만이 영원성을 부여받습니다. 믿는 이들은 주님을 잉태하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불임의 신앙에 머물면 안 됩니다. 바울의 삶이 우리의 모델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아무 일에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온전히 담대해져서, 살든지 죽든지, 전과 같이 지금도,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함을 받으시리라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빌1:20-21)

살든지 죽든지 우리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함을 받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까? 이 마음을 얻지 못해 우리는 여전히 세상에 매여 삽니다. 가련한 인생입니다.

• 삶의 회복
주님의 은혜를 기원한 바울은 마지막으로 이런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 모두를 사랑합니다. 아멘."(16:24) 의례적인 인사가 아닐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자면 고린도 교인들에게 서운한 마음이 왜 없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린도 교인들 모두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사랑은 좋아함과는 다릅니다. 진정한 사랑은 저절로 발생하는 감정이 아니라 의지적인 노력을 수반하는 도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머물 때, 곧 그 사랑의 자장 안에 있을 때에라야 가능한 일입니다.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바로 그 마음과 접속하기를 열망한다는 말일 것입니다.

제가 마음으로 늘 그리워하고 있는 브루더호프 공동체의 장로인 하인리쉬 아놀드는 지난 12월 19일에 내놓은 대림절 메시지에서 우리 시대를 이렇게 진단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희망 없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빈곤, 폭력, 전쟁, 자연 재난, 성 추문, 인종차별, 차별대우, 중독...셀 수 없을 정도로 우울한 현실입니다." 이런 현실 가운데서 교회가 제시해야 할 희망이 무엇일까요? 그는 누가복음 15장에 주목하자고 말합니다. 거기서 주님은 말씀을 듣기 위해 당신께 나아온 세리들과 죄인과 더불어 음식을 먹기도 하고, 말씀도 나누셨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주님의 그런 처신이 맘에 들지 않아 불퉁댔습니다. 그때 주님은 세 가지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하나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비유입니다. 목자는 양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길 잃은 양을 찾아 다녔고, 마침내 찾았을 때 기뻐하며 돌아와 "벗과 이웃 사람을 불러 모으고,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할 것"(눅15:6)이라 하셨습니다. 드라크마 열 닢 가운데 하나를 잃어버린 여인도 온 집안을 쓸며 샅샅이 뒤지다가 "찾으면, 벗과 이웃 사람을 불러 모으고 말하기를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드라크마를 찾았습니다' 할 것"(눅15:9)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음에 나오는 것이 그 유명한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입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받아 먼 타지에 가서 다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을 맞아준 아버지는, 화가 나 집에 들어오기를 거절하는 큰 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의 이 아우는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즐기며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눅15:32)

세 비유 모두 잃어버렸던 것을 되찾은 후에 누리는 기쁨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성탄은 어쩌면 우리 시대에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 잊혀진 사람들, 절망의 나락에 떨어진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의 고향이 되어주라는 요청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군가의 설 땅이 되어주고, 마음 시린 이들이 안심하고 머물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고, 외로움에 지친 이들의 품이 되려는 이들은 자기들 속에 하늘의 기쁨이 유입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기쁜 소식이 되어야 합니다. 이 마음을 품을 때, 주님도 우리 속에 들어와 좌정하실 것입니다. 오시는 주님과 더불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기쁨을 한껏 누릴 수 있기를 빕니다. 마라나 타!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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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날 짜 2018년 09월 18일 09시 46분 5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