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44. 내가 선 자리가 든든합니다
설교자 김기석
본문 시 26:1-12
설교일시 2018/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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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선 자리가 든든합니다
시26:1-12
(2019/11/04, 추수감사주일)

[주님, 나를 변호해 주십시오. 나는 올바르게 살아왔습니다. 주님만을 의지하고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주님, 나를 샅샅이 살펴보시고, 시험하여 보십시오. 나의 속 깊은 곳과 마음을 달구어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늘 바라보면서 주님의 진리를 따라서 살았습니다. 나는 헛된 것을 좋아하는 자들과 한자리에 앉지 않고, 음흉한 자들과도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나는 악인들의 모임에서 그들과 어울리기를 싫어하고, 한자리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주님, 내가 손을 씻어 내 무죄함을 드러내며 주님의 제단을 두루 돌면서, 감사의 노래를 소리 높여 부르며, 주님께서 나에게 해주신 놀라운 일들을 모두 다 전하겠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계시는 집을 내가 사랑합니다. 주님의 영광이 머무르는 그 곳을 내가 사랑합니다. 나의 이 목숨을 죄인의 목숨과 함께 거두지 말아 주십시오. 나의 이 생명을 살인자들의 생명과 함께 거두지 말아 주십시오. 그들의 왼손은 음란한 우상을 들고 있고, 그들의 오른손은 뇌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깨끗하게 살려고 하오니, 이 몸을 구하여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 내가 선 자리가 든든하오니, 예배하는 모임에서 주님을 찬양하렵니다.]

∙내 삶의 주인은 누구인가?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우리 교회가 추수감사주일로 지키는 오늘, 모든 교우들의 마음에 주님의 환한 빛이 비쳐들면 좋겠습니다. 한 주간 내내 제 마음에서 떠나지 않은 것은 “감사하는 마음, 그것은 곧 아는 마음이다./내가 누구인가를 그리고/그 주인이 누구인가를 아는 마음이다”라는 김현승 시인의 시구였습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알고, 그 주인이 누구인가를 알아야 진짜 감사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 새삼 놀라웠습니다.

주님은 일찍이 “나는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다“(요8:14)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삶의 뿌리와 목표를 안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까요? 주님은 당신이 해야 할 일을 아셨기에 현실의 난관 앞에서 좌절하지 않았고, 가야 할 곳을 아셨기에 집착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이는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아 두고 싶어 하는 마음이 타락의 시작이라고 말합니다. 시간을 공간화 하는 것 말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가시적인 것을 통해 자기 삶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며 삽니다. 현금, 예금 통장, 보험, 땅이나 집문서가 우리 삶의 불안을 없애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생의 근본적인 불안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자서전을 읽다가 눈이 번뜩 뜨이는 대목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어느 해 여름, 어린 카잔차키스는 아버지와 함께 포도밭에 있는 오두막에 가서 지냈습니다. 갑자기 시커먼 구름이 몰려오고, 한바탕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집에 두고 온 건조 중인 포도를 지키기 위해 아버지는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하수도가 넘쳐서 길바닥에 물이 강처럼 흘렀습니다. 집집마다 1년 내내 고생해 거두어 반쯤 말린 포도가 물에 휩쓸려갔습니다. 마을 곳곳에서 여자들의 통곡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는 집으로 달려가면서 아버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 했습니다. 아버지도 흐느껴 우실까? 욕설을 퍼붓고 고함을 지를까? 집에 도착해 건조장을 보니 과연 포도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문간에 서서 수염을 깨물고 있었고, 어머니는 그 뒤에서 훌쩍훌쩍 울고 있었습니다. 그가 “아버지, 포도가 다 없어졌어요.”라고 말하자 아버지가 큰소리로 대꾸했습니다. “시끄럽다. 우리들은 없어지지 않았어.”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 순간을 절대로 잊지 못한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 순간이 내가 인간으로서의 위기를 맞을 때마다 위대한 교훈 노릇을 했다고 믿는다. 나는 욕이나 애원도 하지 않고 울지도 않으면서, 문간에 꼼짝 않고 침착하게 서 있던 아버지의 모습을 항상 기억했다. 꼼짝 않고 서서 재난을 지켜보며, 모든 사람들 가운데 아버지 혼자만이 인간의 위엄을 그대로 지켰다.”(니코스 카잔차키스, [영혼의 자서전1], 안정효 옮김, 열린책들, 2008년 3월 30일, p.108)

시련과 고통은 우리를 낙심하게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삶의 근본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쉽게 사라져 버릴 것들에 우리 삶을 비끌어 매는 것이 어리석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기도 합니다. 인간의 위엄은 고통의 순간에 드러나는 법입니다.

∙콩팥과 심장을 보시는 주님
감사절은 우리에게 삶의 근본을 돌아볼 것을 요구합니다. 김현승 시인은 앞서 소개한 시에서 “받았기에/누렸기에/배불렀기에/감사하지 않는다/추방에서/맹수와의 싸움에서/낯선 광야에서도/용감한 조상들은 제단을 쌓고/첫 열매를 드리었다”고 노래합니다. 삶의 악조건 속에서도 그들은 자기들의 처지를 원망하거나 불퉁거리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첫 열매를 바쳤습니다. 그럴 수 있는 것은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감사는 이러저러한 바람이 이루어졌을 때 뿐만 아니라, 나를 이 세상에 있게 하시고 고통 속에서도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하시는 분에 대한 깊은 인식에서 발생합니다.

시편 26편을 몇 번씩 반복하여 읽으면서 이 시인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만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는 자기가 하나님 안에서 바르게 살았다고 자부합니다. 그는 주님을 자기의 변호인으로 호명합니다. “주님, 나를 변호해 주십시오. 나는 올바르게 살아왔습니다. 주님만을 의지하고 흔들리지 않았습니다.“(1) 여기서 말하는 ‘올바름’은 도덕적 완전함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삶의 지향이 흔들리지 않았다는 뜻으로 새기는 게 좋겠습니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부나 명예 혹은 권세와 같은 무상한 것들 위에 자기 생의 집을 지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님만을 의지했기에 어떤 시련이 다가와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 앞에 개방합니다.

“주님, 나를 샅샅이 살펴보시고, 시험하여 보십시오. 나의 속 깊은 곳과 마음을 달구어 보십시오.”(2)

‘나의 속 깊은 곳과 마음’으로 번역된 구절은 사실 ‘콩팥과 심장‘을 의미합니다. 옛 사람들은 마음이 장기 속에 머물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장이 생각과 결단의 자리라면 콩팥은 감정이나 양심의 자리입니다. 시편 16편 7절에서 시인은 “주님께서 날마다 좋은 생각을 주시며, 밤마다 나의 마음에 교훈을 주시니” 주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밤마다 나의 마음에 교훈을 주셨다’는 구절은 ‘밤마다 신장이 나를 징계해 주었다‘는 문장의 부드러운 해석입니다. 예레미야는 악인들에 대해 말하면서 “뿌리를 내리고 자라며, 열매도 맺으나, 말로만 주님과 가까울 뿐, 속으로는 주님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렘12:2)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속으로는 주님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문장의 원래 표현은 “주님께서 그들의 신장에서는 멀리 계시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양심이나 결단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한스 발터 볼프, [舊約聖書의 人間學], 문희석 옮김, 분도출판사, 1976년 10월 20일, p.128ff 참조). 본문의 시인은 자기의 생각, 지향, 감정, 양심을 다 주님 앞에 내놓고 주님의 판단을 기다립니다.

시인은 자신이 ‘헛된 것을 좋아하는 자들‘, ‘음흉한 자들‘, 악인들의 모임‘에 어울리지도 않았고 그들과 한자리에 있지도 않았다고 말합니다. 내면의 힘은 고독을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고독과 외로움을 구별하여 말합니다. 외로움은 홀로 있음으로 말미암아 빚어지는 괴로움입니다. 그러나 고독은 홀로 있음의 영광입니다. 홀로 있어도 비참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으려면 지향이 분명해야 합니다. 다른 이들의 평판에 전전긍긍하거나, 다른 이들과의 어울림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에 집착하는 사람은 고독의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사느라 자기를 돌아볼 시간이 없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그들의 영혼은 뭔가에 붙들려 있습니다. 가련한 영혼입니다. 시인은 결별해야 할 것들과 단호히 결별했습니다. 패거리에 가담함으로 얻는 이익보다 영혼의 떳떳함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양심은 자유 얻었네
시인은 고독 속에서도 기쁨을 누립니다. 그가 궁핍했는지 부유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양심의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젊은 시절 찬송가 336장을 부를 때마다 가슴이 무한히 확장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이 신앙 생각 할 때에 기쁨이 충만하도다/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옥중에 매인 성도나 양심은 자유 얻었네/우리도 고난 받으며 죽어도 영광 되도다/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이런 자유를 얻을 수 있다면 어떤 대가라도 치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 첫 마음을 회복해야겠습니다. 시인이 기뻐하는 것은 원하는 바를 다 누릴 수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는 일마다 잘 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 등 돌리며 살지 않았다는 내적인 자부심 때문입니다.

“주님, 내가 손을 씻어 내 무죄함을 드러내며 주님의 제단을 두루 돌면서, 감사의 노래를 소리 높여 부르며, 주님께서 나에게 해주신 놀라운 일들을 모두 다 전하겠습니다.“(6-7)

죄와 타협하지 않은 자의 기쁨, 악인들의 자리에서 벗어난 자가 누리는 기쁨, 주님이 주시는 참된 자유를 누리는 자의 감사가 넘칩니다. 주님께서 해주신 놀라운 일들이 어떤 것일까요? 그를 괴롭히던 문제가 일순간에 해결되었다는 말일까요? 바라고 꿈꾸던 일이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말일까요?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세상에서 가장 큰 기적은 일상적인 것들 속에서 영원을 보는 눈이 열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눈이 열리면 바울처럼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빌3:7) 시인은 이런 자유를 다른 이들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우들 중에 세상의 주류사회에서 떠밀리고 있는 이들의 이웃이 되어주기 위해 애쓰는 이들이 있습니다. 돈벌이가 되는 것도 아니고, 사회적 명사가 되는 일도 아닙니다. 몸은 부서질 것처럼 힘들고, 마음이 무너질 때도 있지만 그들은 그 일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삶에 멀미를 하며 자기를 함부로 대하는 이들의 품이 되어주고, 그들이 존중받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에 헌신하는 이들은 일상이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을 향해 꽁꽁 마음을 닫고 살던 사람이 지속적인 사랑을 경험하면서 마음을 여는 것도 기적이고, 삶의 지향을 잃고 방황하던 사람이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아 그 일에 매진하는 것도 기적입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다른 이들을 품에 안으려는 이들은 날마다 기적을 체험합니다. 그들이야말로 탕자의 귀환을 기뻐하며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의 마음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우상 앞에 절하지 않습니다. 뇌물도 그들의 양심을 뒤흔들 수 없습니다.

∙거대한 뿌리
그러나 사람이기에 가끔은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더욱 간절히 기도를 바치며 삽니다. 적당히 사는 이들은 절박하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설 수 없음을 아는 이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의 시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나는 깨끗하게 살려고 하오니, 이 몸을 구하여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 내가 선 자리가 든든하오니, 예배하는 모임에서 주님을 찬양하렵니다.”(11—12)

우리의 의지와 결심은 약합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부평초와 같은 것이 우리 마음입니다. 생 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나오는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사막을 가로지르던 어린왕자는 우연히 만난 꽃잎이 셋 달린 꽃에게 사람들이 어디에 있냐고 묻습니다. 꽃은 몇 해 전에 몇 사람을 본 적은 있지만 그들을 어딜 가야 만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람 따라 돌아다니니까. 사람들은 뿌리가 없어. 그래서 많은 불편을 느끼는 거야.”(생 텍쥐페리, [인간의 대지/야간비행/어린왕자/남방우편기], 안응렬 옮김, 동서문화사, 2017년 1월 20일, p.260)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삶이 고단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뿌리가 있습니다.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모든 고통당하는 자들의 구원자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뿌리이십니다. 1968년에 세상을 떠난 시인 김수영은 ‘거대한 뿌리’라는 시에서 남루하고 너절한 우리 삶을 돌아보면서도 그 현실로부터 달아나기는커녕, 그 남루한 현실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겠다면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제3인도교의 물 속에 박은 철근기둥도/내가 내 땅에/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이라고 노래합니다. 현실의 언저리를 깨작거리며 사는 이들은 할 수 없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 마음으로 산다면,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마음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살려고 작정한다면 우리도 이 시인처럼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선 자리가 든든하오니, 예배하는 모임에서 주님을 찬양하렵니다.” 예배하는 모임은 주님께 우리의 사정을 아뢰는 탄원의 자리이기도 하지만,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총과 놀라운 이적을 피차 고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생각해보면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이들은 우리의 비빌 언덕이고, 설 땅입니다. 우리의 기쁨을 조금의 유보도 없이 함께 기뻐해주고, 우리가 울 때 함께 울어주고, 비틀거릴 때 손을 잡아줄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한지요? 가장 외로운 순간에도 우리가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때 우리는 다시금 살아갈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도전은 교회 울타리 밖에 있는 이들, 벼랑 끝으로 내몰린 이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설 땅이 되어주는 일입니다. 그때 우리의 감사는 깊어질 것이고, 그런 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에 드러날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에 깊이 뿌리 내리고 사는 이들은 시인처럼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내가 선 자리가 든든합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8년 11월 04일 11시 41분 54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