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34. 너 지렁이 같은 야곱아
설교자 김기석
본문 사 41:8-14
설교일시 2021-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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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지렁이 같은 야곱아
사 41:8-14
(2021/08/22, 성령강림 후 제13주)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선택한 야곱아, 나의 친구 아브라함의 자손아!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데리고 왔으며, 세상의 가장 먼 곳으로부터 너를 불러냈다. 그리고 내가 너에게 말하였다. 너는 나의 종이니, 내가 너를 선택하였고, 버리지 않았다고 하였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의 하나님이니, 떨지 말아라. 내가 너를 강하게 하겠다. 내가 너를 도와주고, 내 승리의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 주겠다. 너에게 화를 낸 모든 자들이 수치를 당하며 당황할 것이다. 너와 다투는 자들이 아무것도 아닌 자들처럼 되어서 멸망할 것이다. 네가 아무리 찾아보아도 너에게 대적하는 자들은 만나지 못할 것이며, 너와 싸우는 자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허무한 것 같이 될 것이다. 나는 주 너의 하나님이다. 내가 너의 오른손을 붙잡고 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돕겠다." 너 지렁이 같은 야곱아, 벌레 같은 이스라엘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돕겠다. 나 이스라엘의 거룩한 하나님이 너를 속량한다'고 하셨다.]

• 역사의 격동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내일이 처서입니다만, 한 주 내내 비가 오락가락할 거라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나뭇잎들은 그 치열했던 생장의 시기를 멈추고 조금씩 물들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매미 울음소리도 한결 잔약해졌습니다. 돌아갈 때가 되었음을 알기 때문일 겁니다. 돌아가는 것이 생명의 본성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옛 사람들은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이라 했습니다. 돌아가는 것이 도의 움직임이라는 뜻입니다. ‘물극필반物極必反’이라는 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태가 정점에 이르면 반드시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자연의 이치도 그러하지만 역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할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예언자들이 목청껏 외친 말도 ‘여호와께로 돌아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온 우리의 참상을 인정하고 슬퍼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요엘은 그래서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욜 2:13)고 말합니다. 호세아는 ‘사랑과 정의를 지키며, 하나님께만 희망을 두고’(호 12:6) 사는 것이 여호와께로 돌아감이라고 말합니다. 지금은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참담한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 20년 동안 주둔했던 미군이 철수하면서 탈레반이 돌아왔습니다. 그 아픔과 시련의 땅에 또 다시 커다란 혼돈이 빚어지고 있습니다. 여성들의 인권이 유린되고 폭력이 일상이 되고 있습니다.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중동의 정세가 사뭇 달라질 것 같습니다. 평온한 일상을 누리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꿈이 악몽처럼 변할까 두렵습니다. 중남미의 섬나라 아이티에 또 다시 강력한 지진이 찾아와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삶의 터전이 무너져 망연자실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대규모 자연 재해를 겪을 때마다 인간이 얼마나 미소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폐허 속에서 일어서는 사람들을 보면 인간의 위대함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통 받는 이들을 곁부축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위험 속에 뛰어들어 위기에 처한 이들을 구하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과학적 무신론자들이 말하는 ‘이기적 유전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생명의 신비입니다. 삶은 여전히 힘겹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 속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고,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라는 근원적 사실입니다.

이사야 40장부터 55장까지의 배경은 주전 6세기입니다. 남왕국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고 많은 이들이 포로가 되어 유배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강성해 보였던 바벨론은 동방의 고레스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고레스는 페르시아 제국을 세웠습니다. 하나의 제국이 무너지고 또 다른 제국이 등장하는 역사의 격동 속에서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바로 그때 주전 8세기의 예언자인 이사야의 이름에 의지하여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위로를 전하는 이가 등장했습니다. 신학자들은 그를 제2이사야라고 부릅니다. 그의 핵심 메시지는 이스라엘의 회복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가운데 일부입니다.

• 임재와 동행의 약속
여호와 하나님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백성들을 친근하고 다정하게 부르십니다. ‘나의 종’, ‘내가 선택한 야곱’, ‘나의 친구 아브라함의 자손’이 그것입니다. 야곱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는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조상입니다. 하나님은 분단되었다가 결국 망해버린 이스라엘의 총체적인 회복을 내다보고 계십니다. ‘나의 친구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할 때 ‘나의 친구’(아해브, ‘ahab)는 ‘나를 사랑하는 자’ 혹은 ‘내가 사랑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종주국과 봉신국 사이에 계약을 맺을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호명함으로써 아브라함과 맺었던 언약, 즉 “내가 이 땅을, 이집트 강에서 큰 강 유프라테스에 이르기까지를 너의 자손에게 준다”(창15:18)는 약속을 상기키시고 계십니다. 예언을 듣고 있던 이들은 비록 지금은 유배지에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살 땅을 마련해주시려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방에 흩어졌던 당신의 백성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때가 되면 그들을 불러내 새로운 나라를 이루게 하십니다. 10절은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의 약속이 점층법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의 하나님이니, 떨지 말아라. 내가 너를 강하게 하겠다. 내가 너를 도와주고, 내 승리의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 주겠다.”(41:10)

‘내가 너와 함께 있다’는 말은 얼마나 든든합니까?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어떠한 시련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의 마지막 문장을 기억하시는지요?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마 28:20b). 돌아가신 박정오 목사님은 이 말씀이 당신의 일생을 지켜주었다고 고백하시곤 했습니다. 며칠 전 저는 <기도할 수 없는 밤을 위한 기도>(미간행)라는 책의 추천사를 쓰기 위해 원고를 읽다가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저자인 티시 해리슨 워런은 책의 도입부에 유산 과정을 겪었던 자기 경험을 들려주었습니다. 심각한 통증과 엄청난 양의 하혈이 쏟아져 그는 긴급치료센터로 실려갔습니다. 간호사들이 수혈을 위해 주삿바늘을 꽂았을 때 그는 그 어수선한 상황에서 문득 성공회 예식서에 나오는 밤기도를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공회 사제였던 그 부부는 인터넷 어플에서 기도예문을 찾아 밤기도를 함께 드렸습니다. 그 중의 몇 대목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평화로운 밤과 완벽한 끝을 허락하신다.”
“주님 날개 그늘 아래 우리를 숨기소서.”
“주님, 이 밤의 모든 어둠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소서.”
“전능하고 자비로우신 주님, 성부 성자 성령이여,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우리를 지키소서. 아멘.”

천천히 이런 기도문을 읊조리는 동안 평안이 찾아왔고, 혼돈과 고통 속에서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능력을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분이라기보다는, 우리들의 고통 속에 들어와 함께 겪어내시며 우리가 그 고통을 이길 힘을 불어넣어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떨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역사의 흐름을 결정하시는 분(사41:4)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흐름에 몸을 맡기면 됩니다. ‘내가 너를 강하게 하겠다’, ‘너를 도와주겠다’, ‘너를 붙들어 주겠다’.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헨리 나우웬은 곡예사 가족과 친교를 나누며 공중그네를 배웠던 이야기를 들려준 바 있습니다. 여러 차례 훈련을 받으면서 그는 공중그네타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손을 잡아줄 사람에 대한 신뢰임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그는 그 경험을 한 후 우리를 든든하게 붙들어주시는 하나님을 ‘위대한 캣쳐 Great Catcher’라고 불렀습니다.

• 무도한 자들에 대한 심판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짓눌린 이들의 살 권리를 회복시켜주시는 분이신 동시에 무도한 힘을 휘두르는 이들을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구원은 심판과 함께 나타납니다.

“너에게 화를 낸 모든 자들이 수치를 당하며 당황할 것이다. 너와 다투는 자들이 아무것도 아닌 자들처럼 되어서 멸망할 것이다.”(41:11)

놀라운 예고입니다. 강한 자들이 아무 것도 아닌 자들처럼 되어서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붕 위의 풀같이’(시 129:6) 시들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개인의 존엄을 무시하고, 인간을 소모품처럼 여기는 권력은 여지없이 무너졌습니다. 역사상의 모든 제국의 동일한 운명입니다. 과도한 권력을 누리는 이들은 자신을 신적 존재로 여깁니다. 스스로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노자 도덕경 76장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사람이 살아 있으면 부드럽고 약하다가 죽으면 단단하고 강해지며 만물 초목이 살아 있으면 부드럽고 연하다가 죽으면 바싹 말라 단단해진다. 그러므로 단단하고 강한 것은 죽음의 무리요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의 무리다”(人之生也柔弱, 其死也堅强, 萬物草木之生也柔脆, 其死也枯槁. 故堅强者死之徒, 柔弱者生之徒). 굳어짐은 죽음의 징조입니다.

남들과의 경쟁에서 늘 이겨왔던 사람일수록 다른 이들을 존중하고, 공존하는 법을 잊기 쉽습니다. 자기들이 누리는 것은 경쟁에서 승리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당연한 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보상이 과도하다는 생각은 결코 하지 않습니다.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보면 그들의 내면이나 성품이 어떠한지는 묻지도 않고 무시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이들을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히브리의 지혜자는 “가난한 사람을 조롱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잠17:5)라고 말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이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허무한 것 같이 될 것’(41:12b)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친히 방패가 되어 두려움에 사로잡힌 이들, 자기를 지킬 힘이 없는 사람들을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도구로 삼아 약자들의 인권이 보장받는 세상을 열고 싶어하십니다.

• 포월의 지혜
하나님은 늘 보잘 것 없는 이들과 함께, 또 그들을 통해 구원 역사를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고전1:27). 이것이 바울 사도가 이해한 구원의 신비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천대 받으며 살아온 사람들의 가슴에 생긴 멍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땅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를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라는 기도로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땅에서 울부짖는 무고한 자들의 피울음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시는 분이십니다.

“너 지렁이 같은 야곱아, 벌레 같은 이스라엘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돕겠다. 나 이스라엘의 거룩한 하나님이 너를 속량한다’고 하셨다.”(41:14)

왜 하필이면 지렁이와 벌레일까요? 그들은 나라를 잃고 떠돌던 사람, 언제라도 폭력에 노출될 수 있는 취약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매 맞고 유린당한 기억에 몸과 마음이 얼어붙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이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면서 당신이 친히 그들의 도움(아재르, ’azar)이 되고 속량자(가앨, ga’al)가 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려움에 처한 친족을 위해 빚을 갚아주기도 하고 보호자가 되기도 하는 것이 바로 가앨 혹은 고엘의 의무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세상의 불공정을 바로잡으려 하십니다.

가장 연약한 자들을 일으켜 세워 새로운 세상을 시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고통과 아픔, 실패의 쓰라림을 겪어본 사람이라야 그런 처지에 있는 이들의 형편을 이해하는 법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아픈 사람들의 처지를 알 수 없고, 특권을 누리며 살아온 이들은 밑바닥에서 치열하게 살아온 이들의 아픔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조상으로 삼으신 것은 그가 역사의 질곡 속을 마치 지렁이처럼 온몸으로 겪어냈기 때문이 아닐까요? 돌베개로 상징되는 그의 삶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했습니다. 그런 가운데도 그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경험했습니다.

철학자 김진석 선생이 만든 개념 중에 ‘포월匍越’이라는 게 있습니다. ‘기어서 넘는다’는 뜻입니다. 바짝 엎드려 기면서도 기어코 새로운 차원에 눈을 뜨는 것이 인간의 소명입니다. 십자가야말로 포월의 적절한 예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에게 가해지는 잔인한 폭력이지만 주님은 그 십자가를 통해 인간의 숭고함을 여실히 드러내셨습니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은 혁명이란 사랑으로 보듬어 안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다 포월의 진실을 나타내는 말로 받아들입니다. 속도를 숭상하는 시대에 기어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처럼 보이지만, 생명은 그렇게 자라는 법입니다. 보이지 않는 보폭으로 담장을 넘는 담쟁이처럼 우리는 조금씩이라도 생명과 평화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길 위에서 지치지 마십시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강하게 하고 또 붙들어 주십니다. 두려움 없이 진리의 길, 사랑의 길을 걸어가십시오. 아멘.

등 록 날 짜 2021년 08월 22일 11시 48분 08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