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6. 책망에 귀 기울이라
설교자 김기석
본문 잠15:28-33
설교일시 2018/04/22
오디오파일 s20180422.mp3 [13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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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망에 귀 기울이라
잠15:28-33
(2018/04/22, 부활절 제4주)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지만, 악인의 입은 악한 말을 쏟아낸다. 주님은 악인을 멀리하시지만, 의인의 기도는 들어주신다. 밝은 얼굴은 사람을 기쁘게 하고, 좋은 소식은 사람을 낫게 한다. 목숨을 살리는 책망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들 사이에 자리를 잡는다. 훈계를 싫어하는 사람은 자기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이지만, 책망을 잘 듣는 사람은 지식을 얻는 사람이다. 주님을 경외하라는 것은 지혜가 주는 훈계이다. 겸손하면 영광이 따른다.]

∙ 떠도는 말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부활절 네 번째 주일을 맞이한 오늘 우리는 곡우 절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봄의 마지막 절기인 이맘때가 되면 단비가 내려 농사가 시작되곤 했습니다. 어제 단비 대신 미세먼지가 뒤덮여 유감스러웠지만 그래도 오후에는 청명한 대기를 맛볼 수 있었습니다. 먼지가 걷힌 깨끗한 하늘을 보는 것이 기쁨이듯이, 우리 역사 위에 드리웠던 분단체제라는 먼지가 걷혀 우리 모두 기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큰 기대를 품고 금주를 맞이합니다. 금요일에는 열리는 남북 정상회담 통해 휴전 협정을 종전 협정으로 바꿀 수도 있다는 기대감이 높아가고 있습니다. 분단체제가 그렇게 조금씩 극복되면 우리 민족은 세계에 복을 전하는 나라가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주님의 은총을 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치권은 여전히 혼돈 그 자체입니다. 오래 전에 '리더스 다이제스트' 지에서 보았던 유머가 떠오릅니다. 절친한 벗들 몇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떤 직업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 되었는지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외과의사는 하나님께서 하와를 만드실 때 아담의 갈비뼈를 적출하시지 않았느냐면서 바로 그게 의사라는 직업의 시작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정원사는 하나님께서 하와를 만들기도 전에 아담에게 정원 일을 맡기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토목기술자가 말했습니다. 세상을 지을 때 하나님이 사용하신 기술이 토목 기술이라고 말하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정치인이 그런 논쟁을 지켜보며 가만히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친구들이 너는 할 말이 없냐고 묻자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너희는 창조가 시작되기 전의 혼돈을 누가 만들었다고 생각해?" 친구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우스갯소리가 나오는 것을 보면 어느 나라나 정치인들은 조롱의 대상인 모양입니다.

물론 정치인들(statesman)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들입니다. 그렇기에 그분들을 존중해야 합니다. 하지만 정치꾼들(politician)은 문제가 많습니다. 입으로는 공익을 내세우면서 사익을 추구하는 이들, 지나친 권력욕으로 인해 세상을 혼돈으로 몰아넣는 이들 말입니다. 저는 이 시대에 정치인들이 하는 일 나쁜 일 가운데 제일 큰 문제는 언어를 타락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어는 소통의 도구입니다. 하지만 언어가 타락할 때 언어는 불통의 도구가 됩니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말, 차가운 세상을 녹이는 따뜻한 말은 점점 줄어들고, 비난하고 조롱하고 속이고 모독하고 이간질하는 말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누구의 말도 곧이곧대로 믿지 않습니다.

일찍이 소설가 이청준 선생은 그런 말들을 일러 '떠도는 말들'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말을 함부로 하면서 말이 본래의 의미를 잃고 세상을 떠돌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이 혼탁해지면 세상은 불신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다양한 음모론이나 거짓 뉴스가 횡행하는 것도 공적으로 유포되는 말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말이 회복되지 않으면 세상이 새로워질 수 없습니다.

∙ 대화의 본질
야고보는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 몸을 다스릴 수 있는 온전한 사람"(약3:2)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혀를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면서 "혀는 겉잡을 수 없는 악이며,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으로 가득 차"(약3:8) 있다고 말합니다.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야고보가 말 때문에 겪었을 고통과 아픔이 저릿하게 느껴지곤 합니다. 공동체를 허무는 그릇된 말 때문에 얼마나 시달렸으면 이렇게까지 말했겠습니까? 하나님은 말로 세상을 창조하셨지만, 우리는 말로 혼돈을 창조합니다. 타락한 세상입니다. 잠언에도 말에 대한 교훈이 참 많이 등장합니다. 몇 구절만 들어볼까요?

"부드러운 대답은 분노를 가라앉히지만, 거친 말은 화를 돋운다."(잠15:1)
"따뜻한 말은 생명나무와 같지만, 가시돋힌 말은 마음을 상하게 한다."(잠15:4)
"험담하며 돌아다니는 사람은 남의 비밀을 새게 하는 사람이니, 입을 벌리고 다니는 사람과는 어울리지 말아라."(잠20:19)
"입과 혀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역경 속에서도 자기의 목숨을 지킬 수 있다."(잠21:23)
"바른 말을 해주는 것이, 참된 우정이다."(잠24:26)

오늘 본문도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지만, 악인의 입은 악한 말을 쏟아낸다."(15:28) 말은 깊은 생각과 침묵에서 길어 올릴 때 비로소 살리는 말이 됩니다. 물론 말이 많다고 다 악인이라고 할 수도 없고, 과묵하다고 하여 의인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악인은 되는 대로, 떠오르는 대로 말합니다. 자기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자기의 유능함 혹은 똑똑함을 과시하기 위해 말을 독점하려 합니다. 그런데 정말 흥미로운 것은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의 말은 오히려 경청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침묵을 배경으로 하지 않은 말은 소음에 불과(막스 피카르트)하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아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만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한다"(마6:7)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을 독점하는 이들의 특색은 들을 생각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대화를 하다보면 내가 하는 말에 공감을 표하면서 내 생각을 충분히 전개하도록 마당을 깔아주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 이야기에서 촉발된 자기 생각이나 경험을 마구 늘어놓아 상대방의 말문을 막아버리는 이들도 있습니다. 영어로 대화를 뜻하는 'dialogue'는 '사이로' 혹은 '꿰뚫다'는 뜻의 '디아/다이아'와 '말'을 가리키는 '로고스'가 결합된 말입니다. 대화란 다른 이들의 말이 나의 혼을 뒤흔들고 나를 변화시킬 수 있도록 허용하는 행위입니다.

∙ 질정叱正
대화의 기본은 경청입니다. 그것이 비난이든 책망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목숨을 살리는 책망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들 사이에 자리를 잡는다"(잠15:31). 책망, 혹은 훈계 듣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요즘은 나이든 사람들이 처신하기 참 어려운 시대입니다. 어떤 일이나 사태에 대해 우려 섞인 말이라도 할라치면 꼰대 소리 듣기 십상입니다.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꼰대 혹은 꼰데는 본래 아버지나 교사 등 나이 많은 남자를 가리켜 학생이나 청소년들이 쓰던 은어였으나, 근래에는 자기의 구태의연한 사고 방식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이른바 꼰대질을 하는 직장 상사나 나이 많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의미가 변형된 속어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그들 앞에 있으면 숨이 턱턱 막힙니다. 그런 이들 앞에 서서 억지 웃음을 띠고 있는 이들을 보면 을들의 비애가 떠올라 씁쓸해집니다. 하지만 나이든 이들의 말이나 행태를 모두 꼰대질이라는 프레임에 걸면 안 됩니다. 사람을 살리는 책망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경험이나 지식은 유한합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붙잡고 있는 진리 혹은 진실은 겨우 거울을 통해 보는 것처럼 희미할 뿐입니다.

가끔 우리의 한계를 깨뜨리는 말씀과 만나야 합니다. 스승이란 바로 우리 인식이나 경험의 한계 밖으로 우리를 불러내는 존재입니다. 그 방법이 꾸짖음일 때가 많습니다. 선불교의 선사들은 사람들을 깨우치기 위해 '할喝'(꾸짖을 '갈' 자이지만 불교에서는 원래의 발음대로 '할'로 읽는다)과 '방棒'을 사용했습니다. 할은 소리를 질러 꾸짖는 것이고, 방은 신체적 타격을 가하는 것입니다. 말로 안 되면 충격을 주어서라도 깨우치려는 것입니다. 인생의 보람은 깨달음에 있습니다. 깨달음이란 '깨다'와 '도달하다'가 합쳐진 말이라 합니다. 낡은 생각과 습관을 깨뜨리고 새로운 생각이나 습관을 들이는 것을 동양에서는 깨달음이라 하고, 성경에서는 거듭남이라 합니다. 거듭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자꾸만 말씀과 만나야 합니다. 책망을 싫어할 때 우리는 자기 한계에 갇히게 되니 말입니다.

"훈계를 싫어하는 사람은 자기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이지만, 책망을 잘 듣는 사람은 지식을 얻는 사람이다"(15:32). 놀라운 통찰입니다. 책망 혹은 훈계를 싫어하는 사람은 자기 생명을 가볍게 여긴다는 말이 참으로 통렬합니다. 내 생명을 정말 귀히 여긴다면 훈계와 책망에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가끔 책을 읽다가 저자 서문에서 독자들의 많은 질정叱正을 바란다는 구절과 만납니다. 질정이란 꾸짖어 바로잡음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이야말로 우리를 바로잡아주는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유능하게 하고, 그에게 온갖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딤후3:16-17)

이 구절에 따르면 성경의 역할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허위의식을 벗겨내고, 낡은 생각을 무너뜨리는 것이고, 둘째는 선한 일을 하도록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그 말씀 앞에 겸손히 엎드릴 때 우리는 거듭난 존재,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될 것입니다.

∙ 주님을 경외하라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라는 것은 지혜가 주는 훈계이다. 겸손하면 영광이 따른다"(15:33). 결국 성경이 주는 훈계의 핵심은 주님을 경외하라는 것입니다. 경외하는 이들은 교만할 수 없습니다. 서방교회 수도생활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누르시아의 베네딕도(Benedictus de Nursia, 480-543)가 쓴 책 <수도규칙>에는 겸손한 삶의 12단계가 자세히 서술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몇 가지는 우리도 명심할 만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눈앞에 두어 잊지 말라.'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거나 자기 욕망을 채우는 것을 좋아하지 말라.'
'비위에 거슬리는 일조차 묵묵히 인내로써 받아들이라.'
'자기 마음에 들어온 악한 생각까지 윗사람에게 아뢰어라.'
'질문을 받기 전에는 말하지 말라.'

이렇게 조심조심 살아가도 실족하는 게 우리인데, 하물며 제멋대로 말하고 처신할 때 우리 영혼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들은 자기의 한계와 허물을 알기에 함부로 말하거나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의 낯빛은 밝고 따뜻하고, 눈빛은 맑습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제가 언급하지 않은 것이 30절인데 이제 읽어보겠습니다. "밝은 얼굴은 사람을 기쁘게 하고, 좋은 소식은 사람을 낫게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자아를 여읜 사람의 얼굴은 밝습니다. 그리고 그의 존재 자체가 사람들의 기쁨이 됩니다. 꽃 앞에 설 때 사람들의 표정이 환해지는 것과 유사합니다. 우리는 이런 삶으로 초대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렇듯 조심스럽게 살아가야 하지만, 망가진 세상을 고치는 일에 무관심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신 것은 바로 그런 일을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홀로 만족하는 사람, 세상에 만연한 고통과 불의를 외면하는 사람은 아직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규범을 가르치면서 "악한 것을 미워하고, 선한 것을 굳게 잡으십시오"(롬12:9)라고 말했습니다.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 하면 온전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악한 것을 보고도 침묵하는 것은 악에게 용기를 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악한 세상에서 우리 인간성이 무너지지 않으려면 선한 것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 '선한 것'은 다른 것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 혹은 하나님 나라라는 영원한 중심에 닻을 내릴 때까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한 걸음씩 꾸준히 걸어갈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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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날 짜 2018년 09월 18일 09시 47분 2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