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51. 기다림이란 삶으로 아멘 하는 것
설교자 김기석
본문 히 10:5-10
설교일시 2018/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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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이란 삶으로 '아멘' 하는 것
히 10:5-10
(2018/12/23, 대림절 제4주)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실 때에,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입히실 몸을 마련하셨습니다. 주님은 번제와 속죄제를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하였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 나를 두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나는 주님의 뜻을 행하러 왔습니다.’” 위에서 그리스도께서 “주님은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를 원하지도 기뻐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것들은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들입니다. 그 다음에 말씀하시기를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뜻을 행하러 왔습니다”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두 번째 것을 세우시려고 첫 번째 것을 폐하셨습니다.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써 우리는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진실한가?
동지가 지나면서 이제 서서히 어둠이 물러가고 빛의 절기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허무와 절망의 심연에 갇힌 이들을 품에 안으시고, 그들 속에 빛이 움터 나오도록 하시는 주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 우리는 대림절 네 번째 초에 불을 밝혔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어둡지만,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우리 속에 가물거리던 희망의 불꽃을 꺼버리기도 합니다만, 우리는 끈질기게 어둠에 맞서 불을 밝혀야 합니다.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주님이 오실 길을 잘 닦고 계신지요? 함석헌 선생님은 영광의 왕이 어떻게 우리 가운데 오시는지를 이렇게 밝힙니다.

“영광의 왕 저는 그의 길이 없이는 오지 않는다. 아름다운 애인은 담을 넘어 침입하지 않는다. 그 사랑하는 자가 깨어 문을 열어 맞을 때까지 담 밖에 귀를 대고 기다린다. 주는 강도처럼 문을 넘어 양심 안에 돌입하지 않는다. 어린 나귀를 타는 이 순결하고 온유하고 평화로운 왕은 진실한 양심이 종려가지를 펴서 길을 열어놓은 후에야 그전에 오르신다. 그 길을 닦지 않고 저를 오시라 하는 것은 저를 억지하는 일이요 모욕하는 일이고 괴롭게 하는 일이다.“
“우리 맘에 있는 모든 교만의 뫼뿌리는 낮아지지 않으면 안 되고 모든 우울의 골짜기는 메워지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사회적 불평들의 요철, 모든 이기적 죄악의 음험한 것을 다 없애지 않으면 안 된다.”(김영호 엮음, <사랑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 가려 뽑은 함석헌 선생님 말씀>, 한길사, 2009년 3월 13, p.97)

아름다운 애인은 담을 넘어 침입하지 않는 법입니다. 사랑하는 자가 깨어 문을 열어 맞이할 때까지 담 밖에 귀를 대고 기다립니다. 교만의 뫼뿌리를 낮추고, 우울의 골짜기를 메우고, 이기적인 생각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주님은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 좌정하십니다. 다시 한번 묻고 싶습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진실합니까? 정말 주님이 우리 삶에 들어오시기를 갈구합니까?

∙피흘림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소개합니다. 아론의 계통을 따르는 제사장이 아니라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히5:5) 하고 말씀하신 분의 섭리 안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십니다”(히4:15). 참 인간이셨기에 모든 인간의 슬픔과 고통을 다 자신의 것으로 수용할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의 인간적 면모를 유난히 강조합니다. ‘예수께서 육신으로 세상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께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다‘,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당함으로써 순종을 배우셨다’(히5:7-8)는 구절은 지금 고난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 이들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구원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예수의 흘린 피 날 구원하시니 귀하고 귀하다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예수의 피‘를 신비화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예수의 피‘는 그의 생명 혹은 삶을 가리키는 은유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바친 그 행위 자체가 예수의 피라는 말입니다. 옛사람들은 피 속에 사람의 생명이 있다고 생각했고, 피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 여겼습니다. 따라서 사람의 피를 흐르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갈취하는 행위로 받아들였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무슨 일을 저질렀느냐? 너의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는다”(창4:10). 지금 이 땅에서도 무고한 아벨의 피가 땅에서 부르짖고 있습니다. 일터에서 위험 가운데로 내몰리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24살 젊은 노동자 김용균 씨의 죽음은 지금 우리 사회가 얼마나 난폭하고 위험한 곳인지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것입니다. “너희가 사는 땅을 더럽히지 말아라. 피가 땅에 떨어지면, 땅이 더러워진다”(민35:33a). 피로 더럽혀진 땅에는 평화가 깃들 수 없습니다.

창세기 기자는 대홍수 이후에 하나님께서 육식을 허용하셨다고 말합니다. 그 전까지는 땅에서 나는 식물만 허용되었습니다. 육식 허용에는 한 가지 제한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기를 먹을 때에, 피가 있는 채로 먹지는 말아라. 피에는 생명이 있다“(창9:4). 성경이 이렇게 피를 흘리거나 피를 먹는 일을 엄격히 금지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인간의 폭력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경건한 시편 시인도 이런 기도를 바쳤겠습니까? “하나님,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내가 살인죄를 짓지 않게 지켜 주십시오”(시51:14a).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민영진 목사님은 이 시편 구절을 묵상하면서 “그 시인의 경건/흉내 낼 처지도 못 되지만/행여, 나에게 원수 갚을 힘/생기면 어쩌나 싶어/그런 힘 생기지 않게 해 달라고/싫어도 싫어도/빌고 또 빌어야 할 것 같다”(민영진, [유다의 키스] 중에서 ‘살의殺意 부분, 창조문예사)고 노래합니다. 그런 힘이 없는 것이 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죄 속함 받기 위해서 제물을 바쳐야 했습니다. 제물을 바치는 순서는 이러합니다. 제물을 가져온 사람은 먼저 자기가 바칠 제물의 머리 위에 손을 얹습니다. 자기의 죄를 짐승에게 전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회막 앞에서 그 제물을 잡아야 합니다. 제사장들은 그 피를 받아다가 회막 어귀에 있는 제단 둘레에 피를 뿌렸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린다는 뜻일 겁니다. 제물을 가져 온 사람이 번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저며 놓으면, 제사장들이 제단 위에 불을 피우고 제물을 그 위에 벌여놓고 불살라야 했습니다. 번제와 화목제와 속죄제가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비슷한 과정을 거칩니다. 그 과정은 매우 번거롭습니다. 게다가 살아 있는 짐승을 잡고 각을 뜨는 일은 참 꺼림칙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짐승 제물을 바치는 행위는 일종의 제의적(祭儀的) 폭력입니다. 옛 사람들은 이런 까다로운 절차를 통해 진행되는 제의를 통해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폭력성을 이런 행위를 통해 정화하려 했던 것입니다.

박노해 시인은 ‘거룩한 사랑’이라는 시에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방학 때마다/서울서 고학하던 형님이 허약해져 내려오면/어머님은 애지중지 길러온 암탉을 잡으셨다/성호를 그은 뒤 손수 닭 모가지를 비틀고/칼로 피를 묻혀가며 맛난 닭죽을 끓이셨다/나는 칼질하는 어머니 치맛자락을 붙잡고/떨면서 침을 꼴깍이면서 그 살생을 지켜보았다”. 어머니라고 해서 닭 모가지를 비틀고 칼에 피를 묻히는 것이 흔쾌한 일이었겠습니까만, 자식을 위해서 어머니는 기꺼이 그 꺼림칙한 일을 감당하셨던 것이지요. 시인은 계속해서 서울 달동네 단칸방에 살 때의 일상적 풍경을 그리듯 보여줍니다. 김치를 담가 먹을 여유가 없었기에 막일을 다녀오신 어머니는 지친 몸을 이끌고 시장에 나가 상인들의 야채를 다듬어 주고, 시래깃감을 얻어와 김치를 담고 국을 끓였다고 합니다. 시인은 어머니의 그런 삶에서 눈물로 배운 것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사랑은/자기 손으로 피를 묻혀 보살펴야 한다는 걸//사랑은/가진 것이 없다고 무능해서는 안 된다는 걸//사랑은/자신의 피와 능과 눈물만큼 거룩한 거라는 걸”. 시인은 자식들을 돌보기 위해 무능할 수 없었던 어머니의 마음이야말로 거룩함이라고 말합니다.

∙ 나사렛 예수라는 옷을 입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러합니다. 주님은 병든 사람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쫓고, 배고픈 이들을 먹이시고, 소외된 이들의 벗이 되어 주셨습니다. 가진 것은 없었지만 주님은 무기력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과 만난 이들은 자기들이 환대받고 있다는 사실을 절감했을 겁니다. 주님은 자기 앞에 있는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이끌어주신 사람으로 대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사람은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또 내게로 오는 사람은 내가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요6:37). 이 마음이었을 겁니다. 주님은 은전 서른 개에 당신을 파는 유다를 저주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을 세 번씩이나 부인한 베드로를 못났다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조롱하는 무리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연약함과 슬픔을 다 짊어지고, 폭력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신 주님의 가없는 사랑에 접속한 이들은 십자가 아래에 있었던 백부장처럼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마27:54b).

주님은 율법과 제사를 통해 할 수 없는 일을 하셨습니다. 사람들 속에 있는 아름다운 삶의 가능성을 이끌어내셨습니다. 죄에 짓눌려 있던 양심을 깨어나게 하셨고, 곤고한 삶으로 인해 막혀 있던 사랑의 샘에 다시금 물이 흐르도록 하셨습니다. 율법은 사람들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가르쳐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 사랑의 마음을 우리 속에 불어넣지는 못합니다. 제사는 잠시 동안 죄책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해줍니다. 그러나 황소와 염소의 피가 죄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또한 사람들을 새로운 존재로 빚어내지도 못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번제와 속죄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주님에게 입히실 몸을 마련하셨습니다. 2천 년 전 주님은 나사렛 예수라는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뜻은 명백합니다. “나는 주님의 뜻을 행하러 왔습니다”(히10:7b). 주님의 뜻은 사람들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거룩함이란 삶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며 사는 것인 동시에, 하나님의 일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것입니다. 성탄 무렵이 되면 저는 언제나 이현주 목사님의 시를 되뇌곤 합니다.

“나를 둘러 당신의 옷으로 삼으십시오 
알몸으로 오시는 임이여
지난날
나자렛 예수라는
옷을 입고 
가난한 호숫가를 거니셨듯이
오늘은 나를 당신의 옷으로 두르시고
동강난 이 강산에 오십시오
가난한 자는 아직 많습니다
이 마을 언덕 골짜구니, 서울 가는 길목에
남루한 이 몸은 그대로 당신의 옷이 되어
바람 부는 언덕에 펄럭이겠습니다“
(‘나를 둘러 당신의 옷으로 삼으소서’ 부분)

∙다른 삶을 가리키는 사람들
대림절 마지막 주일인 오늘 이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옛날 주님은 이 세상에 오시기 위해 마리아의 몸을 빌려야 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성령이 그대에게 임하시고, 더없이 높으신 분의 능력이 그대를 감싸줄 것”(눅1:35)이라면서 마리아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예고합니다. 그의 존재의 터전을 뒤흔드는 두려운 말이었습니다. 그 전갈을 수용하는 순간 마리아의 평온한 일상은 무너지고, 행복에 대한 꿈도 스러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 두려운 현실을 받아들입니다.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눅1:38). 우리가 진정 주님을 기다린다면 우리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시려는 주님의 뜻에 ‘아멘’ 해야 합니다. 기다림은 삶으로 ‘아멘‘ 하는 것입니다.

로마제국의 학정 가운데 살면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사람들을 주님은 당신의 온 몸으로 감싸 안으셨습니다. 그 따뜻한 사랑과 온기는 사람들의 가슴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하나님의 성품이 발아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모든 가치가 돈이라는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시대입니다. 주님을 믿는 이들은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몸으로 입증해야 합니다. 나누고, 돌보고, 섬기고, 절제하며 살아도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몸을 빌려 이 세상에 오고 계십니다. 이 겨울, 따뜻한 손길이 필요한 이들을 도우시려는 주님의 손이 되어드리면 좋겠습니다. 무고한 피가 더 이상 우리 사는 땅을 더럽히지 않는 세상을 열어가기 위해 주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8년 12월 23일 11시 28분 04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