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 그리스도의 사절
설교자 김기석
본문 고후 5:16-21
설교일시 2019/01/06
오디오파일 s20190106.mp3 [28678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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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사절
고후5:16-21
(2019/01/06, 주현절)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아무도 육신의 잣대로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육신의 잣대로 그리스도를 알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과를 따지지 않으시고, 화해의 말씀을 우리에게 맡겨 주심으로써,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와 화해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시켜서 여러분에게 권고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리하여 간청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분에게 우리 대신으로 죄를 씌우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
은총처럼 밝아온 새해 첫 주일입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주현절입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몸을 드러내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서방 교회는 이 날을 동방박사가 예수님을 찾아와 경배한 날로 기념하고, 동방 교회는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공생애를 시작하신 날로 기념합니다. 유럽 사람들은 주현절이면 거리를 행진하며 아이들에게 사탕을 던져주기도 한다고 합니다. 동방박사의 선물을 떠올리기 위함일 것입니다. 주님이 세상 앞에 모습을 드러내신 이 날, 우리도 세상에서 구별된 존재로 살 결심을 해야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하신 주님의 말씀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믿는 이들을 가리켜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진 존재라면서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지, 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아니합니다”(고후5:7)라고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 사람들의 시선을 끌만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즉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따라 자기를 조율하며 사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바울은 믿는 이들이 추구해야 할 인생의 목표를 간명하게 제시합니다. “우리가 몸 안에 머물러 있든지, 몸을 떠나서 있든지, 우리가 바라는 것은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고후5:9) 우리는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사람’입니까? 우리 삶이 하나님의 마음과 깊은 일치를 이루고 있다면,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기뻐하고, 하나님이 마음 아파하시는 일을 보고 차마 모른 척 할 수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맞습니다.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물 위로 올라오셨을 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막1:11b). 하나님은 예수님의 어떤 모습을 보고 ‘좋아한다’고 하셨을까요? 세상의 연약하고 가련한 이들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연민과 사랑, 어떻게든 그들을 돕고 싶어 하셨던 그 마음을 하나님은 좋아하셨던 것 아닐까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외적인 종교 행위에 열성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그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도인桃仁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자기들의 삶의 비밀을 한 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휘어잡습니다”(고후5:14). 신앙을 가리켜 ‘궁극적 관심에 사로잡힌 상태’(state of being grasped by the ultimate concern)라고 설명한 신학자가 있습니다. 뭔가에 사로잡힌다는 것은 나의 의지와는 별 관계가 없습니다. 그 순간은 운명처럼 다가옵니다. 사랑에 빠진 이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서로에게 ‘유일한’ 사람이 됩니다. 세상은 오직 ‘그’를 중심으로 재편됩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이상해 보여도 그게 사랑의 경험입니다. 어떤 소설가는 사랑을 가리켜 마치 교통사고와 같다고 말합니다. 예기치 않은 시간에 닥쳐오고 그 영향이 치명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것들에 매혹됩니다. 매혹, 그것은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이기도 합니다.

신앙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우리가 미쳤다고 하면 하나님께 미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다고 하면 여러분을 두고 온전한 것”(고후5:13)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 이외에는 바울에게 가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 뜻은 이웃들을 진리의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조롱을 당하고, 박해를 당하고, 죽음의 위협을 당하면서도 믿음의 사람들은 한사코 그 길을 걸어갑니다. 사로잡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대개의 경우 사로잡힘은 부자유를 동반합니다. 유한한 것에 사로잡힌 이들은 더 큰 세계를 보지 못하고 자기 세계를 맴도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궁극적 관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오히려 자유롭습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8장에서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장자의 말대로 하면 ‘하나님께 매인 해방‘(帝之縣解)입니다.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습니다.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육신의 잣대로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고후5:16). 함석헌 선생님은 우리 눈이 우리를 얼마나 속이는지를 일깨워주기 위해 복숭아를 예로 들어 설명하신 바 있습니다. 우리 눈길을 끄는 것은 노랗고 붉그스름한 복숭아의 껍질입니다. 생각만 해도 군침이 고입니다. 하지만 복숭아를 먹기 위해서는 그 껍질을 벗겨야 합니다. 껍질 속에 있는 과육의 맛이 참 중요합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복숭아의 씨입니다. 그것은 먹을 수는 없지만 복숭아의 생명을 이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일러 ‘도인桃仁’이라 합니다. 우리는 껍질에 사로잡힐 때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의 외모, 학벌, 가문, 피부, 국적, 출신 지역 등을 보고 사람들을 평가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의 능력과 성취를 중시합니다. 다른 이들과 협동할 수 있는 능력도 중요합니다. 그게 과육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인격의 핵심, 그러니까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영혼의 지향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그 씨앗을 튼튼히 키우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 씨앗이 건강한 사람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조덕삼 장로
김제 금산 교회는 ‘ㄱ’자 예배당으로 유명합니다. 지금까지 그 원형이 잘 보존되어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습지다. 남녀가 한 자리에 앉지 않았던 시절에 지어진 교회이기에 ‘ㄱ’자의 모서리에 있는 강대상을 중심으로 하여 남성 신도석과 여성 신도석이 나뉘어 있던 것입니다. 그 건물보다 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곳은 옛날부터 신흥종교가 많이 발생하던 지역입니다. 1904년 미국의 젊은 선교사인 테이트(L.B.Tate) 목사는 전주와 정읍을 오가며 전도를 했는데 가끔 그 중간지점인 금산에 머물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사교가 우글거리는 이 금산리에 꼭 교회를 세워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그 고장의 마방 주인인 조덕삼을 만났습니다. 조덕삼은 그 일대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었고, 유교를 믿던 아주 보수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우연인지 섭리인지 모르겠으나 조덕삼은 테이트 선교사와 교제를 시작하였고, 그를 통해 자연스럽게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집을 예배처소로 제공했습니다. 조덕삼의 집에서 금산교회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집에는 마부로 일하던 이자익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무학자였지만 독학을 통해 글을 깨친 총명한 사람이었고, 주인의 신임을 받고 있었습니다. 주인의 권고로 그도 또한 예배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그해 10월에 이 두 사람과 박희서라는 이가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금산교회의 교인이 많이 늘어나게 되자 장로 한 분을 선출하게 되었습니다. 조덕삼과 이자익 두 사람을 두고 투표가 진행되었습니다. 조덕삼은 김제 최고의 부자였고, 교회 지을 땅을 헌물했고, 교회 재정의 대부분을 담당하는 사람이었고, 이자익에 비해 나이도 15살이 많았습니다. 이자익은 외지인이었고, 가난했으며, 조덕삼을 모시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나 다 조덕삼이 장로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투표 결과는 의외였습니다. 이자익이 장로로 피택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술렁거리고 있을 때 조덕삼이 일어나 말했습니다.

“우리 금산교회는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여 이자익 장로를 잘 받들고 더욱 교회를 잘 섬기겠습니다."

조덕삼은 실제로 죽을 때까지 이자익 장로를 지지하고 후원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조덕삼도 장로가 되었습니다만 그는 나중에 이자익이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할 때도 학자금과 생활비 일체를 다 지원하였습니다. 참 놀라운 분입니다(기독교인문학연구소 매거진, 2015년 7월 30일, brunch.co.kr, ‘조덕삼 장로와 이자익 목사’ 참조). 사람을 육신의 잣대로 알지 않는다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새로운 피조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 즉 거듭난 사람은 누구나 다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창조를 대표하는 아담은 인류를 죄로 이끌었지만, 새로운 창조의 첫 열매이신 주님은 우리를 사랑과 구원으로 인도하십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자기 좋을 대로 생각하지도 말하지도 행동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이웃의 유익을 우선적으로 구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선재적 은총으로 우리를 당신과 화해시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분에게 우리 대신으로 죄를 씌우셨습니다”(고후5:21). 우리가 책임져야 마땅한 죄를 주님이 대신 담당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주님으로 하여금 우리 죄를 담당하게 하신 것은 그런 변화된 관계를 통해 우리 또한 화해의 사절이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한 순간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화해를 위해 세움을 입었다는 사실입니다. 화해란 다리를 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징검다리를 건널 때마다 차가운 물 속에 들어가 징검돌을 놓는 사람들의 노고를 생각하게 됩니다. 만날 수 없었던 이들을 만나게 하는 것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화해 사역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3:28).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시고, 여러 가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그분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고,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엡2:14-16)

오늘 이 땅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갈라진 세상을 치유하는 자로 산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을 갈라놓고 차별하고 혐오하는 세태에 맞서서, 낯선 이들이 서로 만나 공동체를 이루고, 서로가 선물이 되어 살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소명입니다. 폰티프(Pontiff)는 대제사장 혹은 교황을 이르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로마의 대신관을 가리키는 pontifex에서 유래된 말인데, 폰티펙스는 본래 ‘다리 놓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만날 수 없던 사람들이 만나,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기쁨과 슬픔을 나누며 살아가도록 하는 것, 바로 그것이 다리놓는 사람들인 기독교인들의 삶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사람이 됩니다.

이 세상에는 사람들을 갈라놓음으로 자기 이익을 확보하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갈등을 만들어내고, 다른 사람들을 적대시하거나 주변화하고, 혐오함으로써 자기 지분을 확보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들은 평화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 강화에만 몰두합니다. 정치인들이나 종교인들 가운데 그런 이들이 특히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속지 말아야 합니다. 갈등을 조장하고, 누군가를 미워하도록 부추기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팔아먹는 장사꾼에 불과합니다. 속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마5:1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세상 앞에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신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의 빛을 세상 앞에 드러내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걷는 발걸음마다 주님의 빛이 드러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9년 01월 06일 10시 56분 4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