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22. 만물을 충만케 하심
설교자 김기석
본문 엡 4:7-10
설교일시 2019/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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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을 충만케 하심
엡4:7-10
(2019/06/02, 승천주일, 부활 제7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선물의 분량을 따라서,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이르시기를 "그분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셔서, 포로를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셨다" 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올라가셨다고 하는 것은 먼저 그분이 땅의 낮은 곳으로 내려오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내려오셨던 그분은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려고, 하늘의 가장 높은 데로 올라가신 바로 그분이십니다.]

∙관계 속에 있는 인간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청해부대 ‘최영함’ 입항 행사에서 일어난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이와 그 가족들, 부다페스트의 다뉴브강 사고로 숨진 이들과 그 가족들에게도 주님의 위로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늦봄의 햇살은 아름다운데 세상에는 여전히 아픔과 슬픔이 많습니다. 나가사키의 소토메라는 소읍에는 엔도 슈사쿠의 문학비가 서 있는데, 거기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고 합니다. “인간은 이리도 슬픈데, 주여, 바다는 너무나 푸릅니다”. 왠지 가슴이 저릿해집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전쟁과 신부>에 나오는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전쟁이 벌어져 정든 고향땅을 떠나 떠돌던 야나로스 신부는 개울가에서 깊은 생각에 잠겨 몸을 구부리고 흐르는 물을 지켜보는 한 노인을 발견합니다. 개울에는 그의 시선을 끌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노인에게 말을 건넵니다. "무엇을 보고 계신가요, 영감님?" 노인은 머리를 들고 구슬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흘러가고 사라지는 내 인생을, 내 삶이 흘러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있다오." 야나로스 신부는 신부답게 그를 위로합니다. "걱정 마세요, 영감님, 당신의 인생은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알고 있으니. 바다를 향해서, 모든 사람의 삶은 바다를 향해서 흘러가고 있답니다." 노인이 한숨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그래요, 젊은이, 그렇기 때문에 바닷물이 짜다오. 수많은 사람의 눈물이 모였기 때문에."

살아 있다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고통과 슬픔이 중첩되어 다가올 때마다 삶에 대한 권태와 회의는 깊어집니다. 전도서 기자의 마음도 그러했던 것 같습니다. “만물이 다 지쳐 있음을 사람이 말로 다 나타낼 수 없다.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않으며 귀는 들어도 차지 않는다“(전1:8). 그래서 그는 “이 세상에 새 것이란 없다”고 단언합니다. 삶의 무상성 앞에서 그는 전율합니다. 그러면 막 살아도 될까요?

아닙니다. 주어진 삶의 조건 아래서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것이 인간의 의무입니다. 인생이 우리에게 제기하는 질문에 답하면서 우리 삶을 구성해가는 것, 그게 삶의 과정일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 안에 깊이 잠겨 사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하시려는 그 일을 수행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 삶이야말로 거룩한 삶입니다. 종교적인 어떤 행위, 기도와 찬양과 묵상과 헌신만이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거룩함은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교회는 그런 삶을 경험하는 현장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과도한 욕망으로 인해 찢기고 나뉜 세상에 사느라 지친 이들이 하나님 안에서 일치와 연대를 경험하고, 생각과 성격이 다른 이들이 서로 아끼고 존중하고 배려하고 따뜻하게 감싸 안는 것을 배울 때 건강해집니다. ‘서로’ 혹은 ‘서로 함께(kai allelon)’는 바울 사도가 자주 사용한 말입니다. 인간은 홀로 살 수 없습니다. 늘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거룩한 삶을 갈망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자기 좋을 대로 살지 않습니다. 늘 다른 이들을 배려하고, 자기 속도를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맺는 관계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뜻이 놓여야 합니다. 지식이나 경험, 이데올로기, 특정한 사람이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은사를 주신 까닭
교회는 ‘서로 함께’ 살아가는 삶을 통해 든든히 세워집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들에게 나름의 은사를 주셨다고 말합니다. 은사는 재능과는 다릅니다. 은사란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돌보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은사하면 사람들은 남보다 뭔가 뛰어난 사람을 떠올리지만, 주님이 주시는 은사는 아주 평범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은사를 주시는 것은 주님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따라, 우리는 저마다 다른 신령한 선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령, 그것이 예언이면 믿음의 정도에 맞게 예언할 것이요,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또 가르치는 사람이면 가르치는 일에, 권면하는 사람이면 권면하는 일에 힘쓸 것이요, 나누어 주는 사람은 순수한 마음으로, 지도하는 사람은 열성으로,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롬12:6-8)

은사에는 경중이 없습니다. 모든 은사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교회를 하나로 결합시키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 활용되어야 합니다. 제가 전도사로 일하던 1981년 여름 성경학교 때의 일이 기억납니다. 비좁은 예배당에서 교사들이 구슬땀을 흘리며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때 교사로 수고했던 분들이 지금도 우리 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들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당 뒤쪽에 있는 아궁이 위에는 큰 가마솥이 걸려 있었고 몇 분의 권사님들이 폭염 속에서 학생들의 밥을 짓느라 애쓰고 계셨습니다. 조병무 장로님의 어머님이신 이회순 권사님께서 구슬땀을 훔치고 계신 것을 보고 죄송한 마음이 들어 ‘너무 수고가 많으시다’고 말씀드리자, 권사님은 “우리는 가르치는 재주가 없으니 밥이라도 지어야지요”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저는 그 따뜻하고 겸손한 섬김이 얼마나 소중한 은사인가를 그 때 느꼈습니다. ‘밥이라도’에서 ‘~라도’라는 서술격 조사는 자칫 잘못하면 밥 짓는 일이 가르치는 일보다 못한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은사에는 경중이 없습니다.

은사는 또한 분수에 맞게 활용되어야 합니다. 은사가 사랑 가운데서 선용되지 않고, 싸움의 도구로 변할 때 교회는 갈등에 빠지거나 추하게 변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의 경중을 가리는 일 때문에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모든 은사는 사랑으로 조율되어야 합니다. 사랑장으로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람들이 자랑하는 갖가지 은사를 하나하나 열거하면서 ‘사랑이 없으면’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고전13:4-5)

허물을 덮어 주고, 바라고, 믿고, 견디는 사랑이 우리 속에 스며들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의 몸을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올라가심과 내려오심의 통일
이제 우리 앞에는 주님의 올라가심과 내려오심이라는 매우 중요한 주제가 놓여 있습니다. 바울은 주님께서 하늘에 올라가셨다는 말을 설명하기 위해 시편 말씀을 인용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로잡은 포로를 거느리시고 높은 곳으로 오르셔서, 백성에게 예물을 받으셨으며, 주님을 거역한 자들도 주 하나님이 계신 곳에 예물을 가져 왔습니다.”(시68:18) 이 구절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높은 곳에 올라 영광을 받는 임금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높은 곳에 올랐다는 말은 통치의 확립을 뜻하는 말입니다.

사도행전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들려 올라가셨고, 결국에는 구름에 싸여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말합니다(행1:9). 구름 모티프는 제1성경 도처에서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을 인도하던 구름 기둥, 시내산을 에워쌌던 구름, 그리고 회막에 임한 구름을 기억하실 겁니다. 조통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뜻하지만 예수님께서 구름에 싸였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깊은 일치 속에 계심을 암시합니다. 승천하심으로 주님은 시공간을 뛰어넘게 되었습니다. 육신을 가진 존재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서 살아가지만 부활하고 승천하신 주님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높이 올리셨기에 주님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과 ‘언제‘ ‘어디서아’ 만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강조점은 올라가심에 있지 않고 내려오심에 있습니다. 주님이 올라가셨다는 말은 내려오심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면서 그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빌2:6-7). 이것이 소위 말하는 ‘케노시스 기독론‘입니다. ‘케노시스’란 자기 비움 또는 겸허를 뜻하는 헬라어입니다.

낮은 자리, 아픔의 자리, 피와 땀과 눈물의 골짜기로 화육하시고, 세상의 모든 아픔과 슬픔을 당신의 몸에 채우신 그리스도의 그 마음이야말로 새 하늘과 새 땅의 단초입니다. 힘의 논리를 바탕으로 하는 로마 제국의 신학은 다른 이들을 아프게 하고, 착취하고, 침묵시키고, 멸시하지만, 예수님은 정반대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빌2:9)

바울은 내려오셨던 주님이 다시 올라가신 것을 조금 다른 말로 설명합니다. 주님은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려고” 올라가셨습니다. 충만(pleroma)은 바울 사도가 즐겨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충만充滿’의 사전적 의미는 ‘가득하게 참‘이지만 성경에서 충만함은 초월을 가능하게 하는 구체적인 에너지를 뜻합니다. 충만함은 생기, 생명력, 명랑함, 용기, 절제를 낳습니다.

∙주님을 소망으로 삼는 사람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세상 만물이 다 지쳐 있습니다. 이사야의 말은 우리 삶의 실상을 잘 드러내 보여줍니다.

“신들을 찾아 나선 여행길이 고되어서 지쳤으면서도, 너는 '헛수고'라고 말하지 않는구나. 오히려 너는 우상들이 너에게 새 힘을 주어서 지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구나“(사57:10)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구합니다. 행복이라는 목표에 이르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합니다. 그러나 행복은 늘 저만치에 있을 뿐, 우리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다가갔다 싶은 순간 그만큼 멀어집니다. 안타까움과 조바심, 원망의 마음이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삶이 고되다고 말하면서도 참된 안식이신 하나님 앞에 마음을 내려놓지 못합니다. 루저가 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지치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우리 속은 물기 없는 샘처럼 점점 메말라갑니다. 고단함과 억울함이 우리를 확고히 사로잡습니다. 채우려고 하면 할수록 속은 텅 비어갑니다. 천진한 미소는 사라지고, 걸핏하면 화를 내고, 누군가에 대한 섭섭한 감정에 휘둘립니다. 분주하게 살지만 권태롭고, 치열하게 뭔가를 추구하지만 마음은 공허합니다.

삶이 참 좋다고 느끼신 때가 언제입니까? 주변에 있는 이들이 사람들이 사랑스러워 보입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충만한 삶을 누리기를 바라십니다. 주님은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 여백을 창조하십니다. 온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게 하십니다. 주님의 생기를 호흡하고, 하나님의 리듬에 우리 삶의 리듬을 맞출 때 삶은 가지런해지고, 헛된 욕망의 지배는 끝납니다. 자기 그릇을 채우기 위해 다른 이들을 밀쳐내는 이들은 충만함을 맛볼 수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충만함은 더 필요한 이들을 위해 자기를 비워낼 때 주어지는 하늘의 선물입니다. 바울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행20:35)는 주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산 사람입니다. 만물을 충만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꿈인 동시에 우리의 꿈이기도 합니다. 이사야는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고개를 들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피곤을 느끼지 않으시며, 지칠 줄 모르시며, 그 지혜가 무궁하신 분이시다. 피곤한 사람에게 힘을 주시며, 기운을 잃은 사람에게 기력을 주시는 분이시다. 비록 젊은이들이 피곤하여 지치고, 장정들이 맥없이 비틀거려도, 오직 주님을 소망으로 삼는 사람은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듯 올라갈 것이요, 뛰어도 지치지 않으며, 걸어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사40:28b-30)

이제 삶이 고달프다고 투덜거리지 마십시오. 주님을 소망으로 삼는 사람이 되십시오.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사랑의 일을 시작하십시오. 은혜로 충만한 사람은 곁에 있는 이들에게도 생기를 전하는 법입니다. 하늘로 올리우신 주님은 우리를 통해 이 땅에 지금도 오고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시는 통로입니다. 날로 푸르름을 더하는 나무들처럼 주님의 생기를 받아 충만한 삶을 누리십시오. 아멘.

등 록 날 짜 2019년 06월 02일 12시 21분 28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