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39. 담백하게 말하라
설교자 김기석
본문 마 5:33-37
설교일시 2020-09-27
오디오파일 s20200927-2.mp3 [47225 KBytes]
목록

담백하게 말하라
마5:33-37
(2020/09/27, 창조절 제4주)

["옛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너는 거짓 맹세를 하지 말아야 하고, 네가 맹세한 것은 그대로 주님께 지켜야 한다' 한 것을, 너희는 또한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말아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그것은 하나님의 보좌이기 때문이다.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그것은 하나님께서 발을 놓으시는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그것은 크신 임금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너는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게 하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는 '예' 할 때에는 '예'라는 말만 하고, '아니오' 할 때에는 '아니오'라는 말만 하여라. 이보다 지나치는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기득권이라는 덫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우울에 빠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나날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마음은 많이 착잡합니다. 북한은 비무장의 민간인, 표류 상태의 탈진자를 구하기는커녕 그에게 총격을 가해 사살했고, 그의 시신은 찾을 길 없습니다. 반인륜적 폭거입니다. 코로나 방역 때문이라고 변명하고 있지만 어떤 말로도 이 행태를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안일하게 대응한 정부도 비난을 면할 수 없습니다. 시편 시인의 탄식이 이명증처럼 들려옵니다. “내가 지금까지 너무나도 오랫동안, 평화를 싫어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왔구나.“(시120:6) 이 참혹한 사건이 불화와 갈등의 심연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평화를 향해 나아가는 디딤돌이 될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가을은 각 교단 총회의 계절입니다. 온라인으로 진행된 장로교회의 총회가 많은 이들에게 깊은 탄식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시대의 아픔과 상처를 돌아보며 교회가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를 깊이 논의해야 할 시간에 그들은 기득권을 지키는 일에만 몰두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사회에서 선출한 신학대 총장의 인준을 거부하고, 어느 대형교회의 세습 문제를 바로잡으라는 요구는 묵살했습니다. 여성 안수는 성경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허락할 수 없다는 기존의 입장을 고수한 교단도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주님의 교회를 지키는 일이라고 믿는지 모르겠지만, 역사는 그들의 판단이 그릇되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감리교회는 감독 선거를 앞두고 또 혼돈 속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제도로서의 교회는 변할 줄 모릅니다. 그 때문에 교회는 점점 사회에서 퇴행적 집단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내부자들만 느끼지 못합니다. 사실은 볼 생각도 볼 눈도 없다고 말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은 진리이지 교권주의자들의 기득권이 아닙니다.

∙경배가 아니라 따름
변통할 줄 모르면 무엇이든 쇠락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입니다. 비록 더디더라도 변화는 거스를 수 없습니다. 지난 9월 18일 미국의 연방대법관이었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그는 남성 중심적인 미국 사법부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습니다. 미국의 평화 운동 잡지인 ‘Sojourners’의 스탭인 파올라 푸엔테스 그렉혼(Paola Fuentes Gleghorn)은 긴즈버그가 여성에 대한 수많은 장벽을 철폐한 사람이라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긴즈버그의 노력으로부터 비롯되었다면서 몇 가지 예를 듭니다. 1970년 대 이전의 미국에서는 여성이 자기 이름으로 된 크레딧 카드를 발급받거나 은행계좌를 개설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남편의 서명 없이 모기지론을 통해 집을 사는 것도 땅을 상속받는 것도 불가능했답니다. 임신한 여성들에 대한 해고가 불법화된 것도 그 이후의 일입니다. 파올라는 긴즈버그가 그 모든 일에 관여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변화의 아주 소중한 동력이었다고 말합니다. 긴즈버그는 아무도 걸어보지 않은 길을 걸은 셈입니다. 이번 주간에 긴즈버그를 떠올리며 그의 책을 읽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에피소드가 당시의 분위기를 알려줍니다.

“(하버드대 로스쿨) 원장이 신입 여학생들을 환영한다며 집으로 저녁 초대를 했다. …… 원장이 우리를 거실로 데리고 가더니 여학생들에게 한 명씩 돌아가며 남학생 자리를 빼앗으면서까지 하버드대 로스쿨에 들어온 이유를 말하라고 했다.“(루스 베이더 긴즈버그·헬레나 헌트, <긴즈버그의 말>, 오현아 옮김, 마음산책, 2020, p.129)

긴즈버그의 별명 가운데 하나는 ‘유명짜한 RBG’(notorious RBG)입니다. ‘노우토리어스’는 나쁜 의미에서 유명하다는 뜻입니다. 늘 차별에 대해 항의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고 했기에 얻은 별명입니다. 그는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사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불편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언자들도 불편한 사람이었고, 세례자 요한도 불편한 사람이었고, 예수님도 불편한 사람이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에 나오는 ‘대심문관’을 통해 16세기의 세비야에 재림하신 예수님이 어떻게 박해 받았는지를 보여줍니다. 교권주의자들은 예수의 등장이 사회 질서를 뒤흔든다고 여겨 추방합니다. 교회가 예수님을 추방한다는 것, 이건 소설 속의 현실이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과 무관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왜 성전체제를 대변하는 이들에게 불편한 존재였을까요? 장벽을 허무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거룩함과 속됨, 죄인과 의인,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고 차별하던 것이 당시 유대교 주류의 태도였습니다. 주님은 그런 구획된 삶에 의해 소외되는 이들의 벗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서로 만나 소통하고 벗이 되고 함께 하나님 나라의 꿈을 꿀 수 있기를 바라셨습니다. 우리가 정녕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이 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 현실은 좀 다릅니다. 예수를 따르기보다는 예수를 경배의 대상으로 삼는 이들이 많습니다. 경배와 따름이 모순은 아니지만, 경배에만 집중함으로 따름의 부담을 덜어내려 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예수의 핵심을 붙들어야 합니다.

∙문자를 넘어
우리는 이미 예수님과 만났지만 아직 제대로 만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심정과 깊은 일치를 이루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예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예수의 손과 발이 되어 살아보지 않으면 평생 교회 다녀도 예수와 만나지 못합니다. 연약한 이들에 대한 사랑과 아낌 그리고 존중, 하나님의 꿈을 이루려는 열정이 우리 몸과 마음에 스며들어야 합니다. 이 마음을 얻지 못하면 성경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기독교의 역사에 대해 아무리 많이 알아도, 하루에 몇 시간씩 기도를 올려도 바르게 알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평생 찌꺼기만 붙들고 살면서 알짬을 얻었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장자>의 ‘천도편‘에 수레바퀴 깎는 노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나라의 환공이 당상에서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목수 윤편이 그 아래에서 수레바퀴를 깎고 있다가 몽치와 끌을 내려놓고는 환공을 올려다보며 물었습니다.

“감히 여쭙습니다. 상께서 읽고 계신 책은 어떤 말을 쓴 것입니까?”
“훌륭한 성인의 말씀이다.”
“훌륭한 성인이 살아 계십니까?”
“이미 돌아가셨다.”
“그렇다면 상께서 읽고 계신 것은 옛날 분의 찌꺼기일 뿐입니다.”
“과인이 책을 읽고 있는데 어찌 바퀴 만드는 자 따위가 시비를 건단 말이냐! 이치에 닿는 설명을 하면 용서하겠지만 그러지 못하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제가 하는 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바퀴를 깎을 때 너무 깎으면 헐렁해서 고정할 수 없고, 덜 깎으면 뻑뻑해서 들어가지 않습니다. 더 깎지도 덜 깎지도 않는 것은 손의 감각으로 터득하고 마음으로 느낄 뿐이지 입으로 말할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 비결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것을 제 자식 놈에게 깨우쳐줄 수가 없습니다. 제 자식놈도 저한테 배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 제 나이 칠십에 아직도 수레바퀴를 깎고 있습니다. 옛날 분도 전해줄 수 없는 것과 함께 돌아가셨으니 상께서 읽고 계신 책은 옛날 분의 찌꺼기일 뿐입니다.”(<장자>, 조현숙 옮김, 책세상, p.297)

책만 읽는다고 우리 존재가 새로워지지는 않는다는 말일 겁니다. 그 심정의 핵심을 붙잡는 것이 요체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경지를 일러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요17:21)으로 표현하셨고, 바울 사도는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갈2:20a)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문자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 속에 담긴 속뜻을 헤아리셨습니다. 언어는 우리의 생각을 담아내는 그릇이지만 안타깝게도 경험을 다 담아내지는 못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는 말의 한계를 절실히 느낍니다. 그래서 은유를 사용합니다. 은유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말입니다. 은유는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은유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시인들도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은유를 사용했습니다. 목자, 빛, 산성, 요새, 반석, 피난처, 도움, 방패, 구원의 뿔 등이 그것입니다.

∙말들의 제 집 찾기
주님은 당신이 세상에 온 것이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마5:17). 이 말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뭔가 부족하여 완성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말들 속에 깃든 알짬을 말로 혹은 삶으로 드러내는 것이 당신의 소명이라는 말입니다. 완성하다는 뜻의 ‘플레라오pleroo’는 ‘충만하게 하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주님은 옛 사람의 말을 반복하는 데 머물지 않고, 그것을 충만하게 만드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도 같은 뜻일 겁니다.

산상수훈에서 주님은 옛 사람의 말에 담긴 속뜻을 풀어 설명해주셨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이웃을 모욕하거나 함부로 대함으로 그들에게서 살맛을 빼앗지 말라는 말로, ‘간음하지 말라’는 명령은 어떤 사람도 자기 이익이나 쾌락을 위한 도구로 삼지 말라는 뜻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는 말씀은 평화를 위해 기꺼이 손해 보기를 감수하라는 말로 확장하여 설명해주셨습니다. 바록 그것이 언어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오늘 본문은 ‘거짓 맹세 하지 말라’는 말을 다룹니다. 율법은 맹세를 금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맹세한 것은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예수님은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맹세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자기 말이 진실임을 드러냄으로 의심하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서입니다. 맹세는 늘 자기보다 큰 것 혹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을 걸고 하는 법입니다. 목숨을 건다든지, 손에 장을 지진다는 말이 그런 것입니다. 거짓말이 넘치는 세상입니다. 옛날에는 꿀과 기름은 외할머니가 가져온 것도 믿지 말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시장에서 파는 참기름의 품질을 보장하기 위해 ‘순 진짜 100% 참기름’이라고 적어놓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꾸밈이 많을수록 가짜가 많습니다. 만병통치약 같은 것이 그렇습니다. 교언영색巧言令色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의 환심을 사려고 아첨하는 교묘한 말과 보기 좋게 꾸미는 얼굴빛‘이라는 뜻입니다. 신언불미信言不美 미언불신美言不信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믿음직한 말은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운 말은 미덥지 않다는 말입니다.

‘믿을 신信‘ 자는 ‘사람 인人‘ 변에 ‘말씀 언言‘가 더해진 것입니다. 말이야말로 모든 인간 사회 신뢰 관계의 밑절미라는 뜻으로 새겨도 될 겁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 그 말이 타락했습니다. 말들이 제값을 잃었다는 말입니다. 불의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이 ‘정의 사회’를 말하고, 부당한 이익을 탐하는 사람이 ‘공정’을 말하고, 밥 먹듯 거짓말을 뱉어내는 사람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합니다. 언어를 다루는 기자의 말도 믿지 못하고, 학자들의 말도 믿지 못하고, 종교인들의 말도 믿지 못하는 세상입니다. 말의 타락입니다. 거친 말, 조롱과 냉소, 과장, 독기를 품은 말, 자극적인 말, 편을 가르는 말, 전투적인 말들이 횡행합니다. 사람들을 이어주어야 하는 말이 흉기가 되어 세상을 떠돌고 있습니다.

말이 독해졌습니다. 평범하고 일상적이고 담백한 말이 몹시도 그리운 때입니다. 소설가 이청준 선생은 일찍이 제 집을 잃고 떠도는 말들이 어떻게 사람들을 갈라놓는지를 소설 쓰기를 통해 탐색했습니다. 말을 넘어선 말을 찾는 과정 중에 그는 판소리의 세계를 탐험했고, 나중에는 소리만 있고 언어는 없는 구음의 세계를 탐색했고, 급기야는 침묵의 세계에 천착했습니다. 독해진 말들은 또 다른 독한 말들을 낳습니다. 가끔 말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말로써 세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너희는 ‘예’ 할 때에는 ‘예’라는 말만 하고, ‘아니오’ 할 때에는 ‘아니오’라는 말만 하여라. 이보다 지나치는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5:37)

이 말씀은 가끔 오용되기도 합니다. 대립하는 사안을 놓고 너의 입장이 무엇이냐고 다짜고짜 묻는 이들이 있습니다. 일종의 함정질문입니다. 네 정체를 밝히라는 것이지요. 주님도 이런 함정 질문 앞에 서실 때가 많았습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칠까요, 말까요?’, ‘이 여자를 돌로 칠까요?’ 그런 질문은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한 질문입니다. 다양하고 복잡한 맥락을 제거한 채 ‘예’ 혹은 ‘아니오’로 답하라는 것은 폭력일 때가 많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단호하고 확고하게 입장을 표명하라는 말이라기보다는 자기 말의 신빙성을 더하기 위해 자꾸 뭘 덧붙이지 말라는 말로 새기는 게 좋겠습니다. 기독교인의 말이 달라져야 우리 사회가 정화될 수 있습니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하고, 아는 것도 꼭 필요할 때만 말해야 합니다. 누군가를 조종하기 위해 말을 지어내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말은 관계를 이어주는 말, 생명을 살리는 말이어야 합니다. 말이 인격입니다. 맹세가 우리의 빈약한 인격을 보완해주지는 않습니다. 무르익음의 계절 가을입니다. 무르익음은 안으로 거두어들임의 열매입니다. 이 혼돈의 세월 속에서 내면의 질서를 잃지 않기 위해 불필요한 말들을 삼갈 때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말을 담백하게 바꿔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한 주간 동안도 살리는 말을 통해 주위에 평화의 분위기를 만드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0년 09월 27일 11시 59분 19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