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7. 폐허를 딛고 서서
설교자 김기석
본문 느 2:11-18
설교일시 2021-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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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를 딛고 서서
느 2:11-18
(2021/07/04, 성령강림 후 제 6주)

[나는 예루살렘에 이르러, 거기에서 사흘 동안 쉬고 나서, 밤에 수행원을 몇 명 데리고 순찰을 나섰다.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예루살렘에서 일하도록 하신 것을, 나는 그 때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아니하였다. 나에게 짐승이라고는, 내가 탄 것밖에 없었다. 밤에 나는 '골짜기 문'을 나섰다. '용 샘'을 지나 '거름 문'에 이르기까지 예루살렘 성벽을 살펴보니, 성벽은 다 허물어지고, 문들도 모두 불에 탄 채로 버려져 있었다. '샘 문'과 '왕의 연못'에 이르렀을 때에는, 내가 탄 짐승이 더 나아갈 길이 없었다. 그래서 그 날 밤에 나는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서, 성벽을 둘러보고, 다시 '골짜기 문'을 지나 되돌아왔다. 그 때에 내가 유다 사람들이나, 제사장들이나, 귀족들이나, 관리들이나, 그 밖에 직책을 가진 어느 누구에게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관리들은, 내가 어디를 다녀왔는지, 무엇을 하였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이렇게 돌아보고 난 다음에, 나는 비로소 관리들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우리는 지금 어려움에 빠져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고, 성문들은 불탔습니다. 이제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쌓읍시다. 남에게 이런 수모를 받는 일이 다시는 없어야 할 것입니다." 나는 또한 나의 하나님이 선하신 손길로 나를 잘 보살펴 주신 일과, 왕이 나에게 한 말을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랬더니 그들은 공사를 시작하겠다고 나에게 다짐하였고, 힘을 내어, 기꺼이 그 보람있는 일을 시작하였다.]

∙막중한 임무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에 임하시기를 빕니다. 한 해의 또 다른 절반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동안 하나님의 백성답게, 부활의 주님을 믿는 사람답게, 종말론적 비전을 품은 신자답게 살았는지 돌아볼 때 부끄럽기만 합니다. 매 순간 충실하게 지내려고 애쓰기는 했지만, 지난 반 년을 돌아볼 때 떠오르는 단어는 ‘엄벙덤벙‘, ‘는적는적‘입니다. 활기차게 살았다기보다는 시간에 등 떠밀리며 살았던 나날이었습니다. 7월이면 상황이 좋아질 거라는 우리의 낙관론을 비웃기라도 하듯 코로나 확진자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어둠이 스멀스멀 우리 가운데 스며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살얼음판 위를 걷듯 조심조심 살아야 하겠습니다.

느헤미야 시대이 이야기를 통해 이 어려운 때를 살아갈 지혜를 얻으면 좋겠습니다. 바빌로니아 제국이 페르시아에게 무너진 후 이스라엘은 페르시아의 속주로 전락했습니다. 근동 지역의 대부분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은 독립 국가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페르시아는 바빌로니아와는 달리 각 나라의 자치와 종교적 자유를 어느 정도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과도한 세금 때문이었습니다. 페르시아 왕은 반란을 진정시키고 통치권을 확고히 세우기 위해 골머리를 싸매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느헤미야서가 시작됩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제국의 관료로 등용되어 승승장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두터운 신임을 받아 왕에게 술을 따르는 직책을 맡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유다에서 온 하나니를 통해 예루살렘의 형편에 대해 듣습니다. 하나니 일행은 사로잡혀 오지 않고 그곳에 남겨진 이들의 고생이 아주 심할 뿐 아니라,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다 불에 탔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느헤미야는 깊은 슬픔에 잠겨 며칠 동안 금식하며 하나님께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도를 따르지 않고 거역하는 죄를 지은 것을 자복했습니다. 자기와 자기 가족 또한 그러한 죄와 무관하지 않다고 고백했습니다. 지금 그들이 이렇게 이방 나라에 흩어진 것은 주님의 뜻 안에서 벌어진 일임을 그는 시인했습니다. 느헤미야는 그렇게 참회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돌이키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겠다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자비를 간청합니다.

∙노련한 정치인답게
그리고 마침내 기회가 왔을 때 그는 왕에게 무너진 예루살렘 성읍을 다시 세우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왕과 왕후는 깊이 신임하는 신하가 자기들 곁을 떠난다는 사실을 달가와하지 않았지만, 결국 느헤미야의 청을 받아들입니다. 왕은 장교들과 기병대를 딸려 보내 느헤미야를 보호하게 했고, 유프라테스 서쪽 지방의 총독들에게 그의 안전을 보장하고 필요한 것을 제공하라는 친서까지 써주었습니다. 그때 페르시아의 임금은 아닥사스다 1세였고,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도착한 것은 주전 445년경이었습니다. 그는 이중의 과제를 짊어지고 있었습니다. 외부의 위협에 대처하는 한편, 무너진 이스라엘 공동체의 정체성을 세워야 했습니다. 한번 무너진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느헤미야는 궁중 정치에 익숙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읽는 일에도 일가견이 있었습니다. 역사에 대한 비전도 없고, 늘 자기 이해에 따라 처신하는 일에 익숙한 관료들에게 처음부터 자기 계획이나 목표를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총독으로서의 권한을 가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뜻이 좋으면 사람들이 다 동의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천박한 낙관론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일쑤 빠지는 함정입니다. 가장 시급한 것은 현실 파악이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속으로 얽히고 설킨 사람들 간의 역학 관계도 파악하고, 예루살렘과 유다의 사회 경제적 현실도 파악해야 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일에 착수하기도 전에 반대에 부딪힐 수도 있었습니다.

성경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이르러 사흘 동안 쉬었다고 말합니다. 그 시간은 그야말로 암중모색의 시간이었을 겁니다. 어느 날 그는 밤에 수행원 몇 명만 데리고 순찰을 나섰습니다. 예루살렘의 남서쪽에서 출발하여 남쪽으로, 거기서 다시 북쪽으로 다니며 성의 형편을 살폈습니다. ‘샘 문’과 ‘왕의 연못’에 이르렀을 때 더는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왕래가 끊긴 그 길은 이미 풀들의 차지였을 것이고, 마구 버려진 쓰레기더미와 무너진 건물의 전해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을 겁니다. 그는 계곡을 따라 올라가며 성벽을 둘러보고 다시 ‘골짜기 문‘을 지나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착잡했을 겁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암담했을 겁니다. 지도자는 그런 암담한 상황에서 비전을 제시해야 합니다.

상황이 암담할 때면 사람들은 문제의 크기에 압도되게 마련입니다. 살다보면 자기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큰 문제에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거대한 바위가 길을 막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은 그 바위를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지레 판단합니다. 그러나 그 큰 바위를 움직일 수는 없지만 그 바위를 잘게 쪼개며 제거할 수는 있습니다. 일단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인 터키의 오르한 파묵은 자기의 소설 쓰기를 가리켜 ‘바늘로 우물 파기’라 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열정과 인내가 있기에 그는 진실에 접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부작침磨斧作針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말입니다. 세상에 희망을 만드는 사람들은 이처럼 어처구니없어 보이는 일 속에 뛰어든 사람들입니다.

∙용기를 불어넣음
현실의 암담함을 토로하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습니다. 절망감을 다독이며 희망의 불씨를 살려내는 사람이 진짜 용기있는 사람입니다. 절망은 자기 충족적입니다. 누구에게 묻지 않아도, 누가 돕지 않더라도 절망에 빠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희망은 저절로 생기지 않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사람은 기쁨으로 거둔다”(시126:5) 했습니다. 전도자의 말도 떠오릅니다. “바람이 그치기를 기다리다가는, 씨를 뿌리지 못한다. 구름이 걷히기를 기다리다가는, 거두어들이지 못한다”(전11:4).

폴란드 시인인 아담 자가예프스키의 시 ‘신세계’에 나오는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현실을 면밀히 살핀 후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일이 일어날 수 있다/정상적인 것들은 가장 짧게 지속되고/비정상적인 것들을 이해하기는 너무 쉽고/순응하기는 더욱더 쉽다/그 쉬움이 너를 안심시키지 말기를”(아담 자가예프스키, <타인만이 우리를 구원한다>, 최성은·이지원 옮김, 문학의 숲, p.23)

사람들은 쉽게 현실에 순응합니다. 비정상을 정상으로 알고 삽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그러면 안 됩니다. 새로운 세상을 시작해야 합니다. 때가 이르렀다는 판단이 들자 느헤미야는 관리들을 불러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폐허가 된 성, 불타버린 성문, 무너진 성벽…누구나 다 아는 현실입니다. 누구나 다 알기에 차마 입 밖으로 내놓지 않던 자기들의 현실입니다. 느헤미야의 말은 자기들이 안주하고 있던 느른한 현실이 비정상임을 일깨웠을 겁니다. 느헤미야는 그들에게 다시는 수모를 당하지 않도록 하자면서 무너진 성벽을 일으켜 세우자고 말합니다. 성벽 재건이라는 가시적인 목표는 실은 무너진 신앙적 정체성을 세우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출애굽 공동체가 시내산 언약 이후에 했던 일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회막을 지었습니다. 회막 짓기는 출애굽 공동체가 최초로 함께 한 창조적인 일이었습니다. 함께 일을 하는 동안 그들은 언약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성벽을 쌓는 일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느헤미야는 주저하는 그들에게 용기를 불어넣기 위해 두 가지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선하신 손길로 지금까지 자기를 어떻게 보살펴 주셨는지를 증언했습니다. 신실한 믿음은 또 다른 믿음을 부르는 법입니다. 둘째, 페르시아 왕이 유프라테스 서쪽 지방의 총독들에게 친서를 보내 느헤미야가 하는 일에 협조할 것을 명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새로운 시작
마침내 사람들을 가리고 있던 절망과 무기력의 어둠이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공사를 시작하겠다고 말하고, 힘을 내어, 기꺼이 그 보람있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폐허와 잔해를 보며 절망 속으로 침잠했던 그들이 마침내 일어선 존재가 된 것입니다. 폐허를 딛고 일어서는 사람들을 보면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며칠 전 북촌갤러리에서 열린 “시리아愛봄” 사진전에 다녀왔습니다. 내전으로 모든 것이 파괴된 시리아의 상황을 알리기 위한 전시였습니다. ‘헬프 시리아‘ 사진 봉사를 하는 우리 교회 권산 작가와 사무국장인 압둘와합이 기획한 전시였습니다. 몇 점 안 되는 사진이었지만 그 사진들은 인간의 잔혹함과 파괴성과 더불어 희망을 만드는 사람들의 숭고한 모습도 담겨 있었습니다. 포연이 오르고 있는 마을, 건물의 잔해에서 구출된 아이를 품에 안고 달리는 사람들, 아비규환의 상황에 내몰려 안전한 곳으로 탈출하려는 사람들의 물결 등이 사태의 심각성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조용히 희망을 만드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흰색 헬멧을 쓰고 시리아군의 공격으로 파괴된 현장에 출동해서 긴급 구조 활동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그 일에 뛰어들었습니다. 흰색 헬멧은 그 땅에서 시작되는 희망의 상징이었습니다. 터키와의 국경 지대 인근에 세워진 난민 캠프도 볼 수 있었습니다. 직접 사진을 찍기도 하고 또 다른 이의 사진을 선정하기도 한 압둘와합은 참혹한 느낌을 자아내는 사진은 일부러 배제했다고 말했습니다. 난민들은 헬프시리아가 준비한 구호물품을 가지고 그곳을 찾은 압둘와합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도 필요하지만 자기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학교라며 학교를 세워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아이들을 교육하는 것은 미래를 위해 파종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청이었지만 꼭 해야만 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학교 세우기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습니다. 1년 안에 완공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난민촌에 살고 있는 인부들은 학교를 3개월만에 지었습니다. 자기 아이들을 위한 시설이기에 그들은 24시간 3교대로 일했던 것입니다. 난감한 상황에 몰려 있으면서도 해맑은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니 안쓰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비록 난민촌에 살고 있지만, 그곳에서 서로 돌보며 살았던 기억 그리고 그곳에서 배웠던 소중한 가르침을 통해 더 나은 삶을 꿈꾸게 될 것입니다.

폐허 더미를 치우며 희망의 밭을 가꾸는 사람들의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사람은 보람을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보람은 영적 존재인 인간의 일용할 양식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심각할 정도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선 자리가 다른 이들은 서로를 의구심을 가지고 바라봅니다. 신뢰의 위기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진영에 선 사람들은 자기와 입장이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적대적인 말, 냉소하는 말, 비아냥거리는 말들이 우리 귀를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말과 감정의 찌꺼기들이 켜켜이 쌓여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바로 그 자리야말로 우리가 새로운 세상을 시작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흰색 헬멧이 시리아 난민들의 희망이듯이,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새로운 세상의 단초가 되어야 합니다.

먼저 말이 달라져야 합니다. 부끄러운 말, 사람들을 가르는 말, 냉소하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마십시오. 그리고 대화의 용기를 내야 합니다. 암담해 보여도 한 걸음씩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평화의 도구가 되기를 희망했던 성 프란체스코의 기도처럼,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꿈은 바로 우리의 그런 노력을 통해 이 땅에서 영글어 갈 것입니다. 투덜거림을 멈추고, 우리 주변에 널린 폐허의 잔해를 치우는 일부터 시작하십시오. 난관이 있더라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살아계시니 결국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선물로 주어진 한 해의 또 다른 절반이 희망을 파종하는 기쁨에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1년 07월 04일 10시 42분 05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