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 9:21~29
예수께서 그 아비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가로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예수께서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귀신이 소리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서로의 곁이 되어
• 왕국절과 창조절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소망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위에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또한 캐나다에서 말씀을 전하시는 목사님과 집회 중인 교회 위에, 그리고 큰 산불로 고통당하는 캐나다 위에도 주님께서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왕국절입니다. 왕국절은 감리교회가 정한 절기입니다. 감리교회는 거의 6개월 동안 지속되는 긴 성령강림절기를 반으로 나누었습니다. 전반부 3개월을 성령강림절기로, 후반부 3개월을 왕국절기로 지키고 있습니다. 왕국절기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정의와 평화와 창조질서 보존을 위해 애쓰는 절기입니다. 요즘 같은 기후위기 시대에 우리가 더욱 힘써 지켜야 하는 절기이지요. 초교파적으로는 여러 교단이 감리교의 왕국절과 비슷한 시기에 창조절을 지킵니다. 창조절기는 창조세계에 대한 기독교인의 책임을 강조합니다. 창조절기는 9월 첫째 주일부터 시작됩니다. 시작하는 주가 8월 마지막 주일과 9월 첫째 주일로 한 주 차이가 나지만 이 둘은 결이 같은 절기입니다.
• 통제 불능 관리 불능
안타깝게도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하나님이 지으시고 보시기 좋았던 세상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멀리 떨어져 나와 있습니다. 얼마 전 하와이 섬에서 큰 불이나 숲이 불타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캐나다에서도 큰 불이 났습니다. 사실 캐나다 산불은 몇 달 전에 발생한 산불인데 계속 불이 커져 현재 천 여 곳에서 동시다발로 타고 있습니다. 이미 대한민국 면적의 숲이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한 나라 전체가 화재로 없어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셀 수 없이 많은 나무들이 타 죽었고, 그 숲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수많은 동물들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수 만 명이 집을 버리고 대피했고 소방관이 죽었습니다. 그렇게 자연과 사람이 죽어가는 현장을 보고 캐나다 총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 상황은 ‘통제 불능’의 상황입니다.”
일본은 방사능 오염수를 바다에 방류하기 시작했습니다. 오염물질을 처리를 했기 때문에 안전하다, 아니다 안전하지 않다, 논쟁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상에 저장해놓았던 오염수를 방류하기 이전부터, 그러니까 2011년 원전사고 이후부터 지금까지 후쿠시마 원전에서는 아무런 처리가 되지 않은 오염수가 바다로 유출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쓰나미로 후쿠시마 원전의 원자로는 고열로 녹아내렸고 그때 생긴 균열로 냉각수가 계속 지하로 유실되고 있습니다. 지하로 스며든 핵오염수는 그대로 바다로 들어가고 있고 바다의 생명들은 그 오염수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것입니다. 기준 농도의 180배가 넘는 세슘 우럭이 잡힌 이유는 바로 그것입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제1 피해자는 인간이 아니라 자연입니다. 원자로의 균열부분을 막아야 하지만 막대한 양의 방사능이 나오고 있어 전혀 손을 쓰지 못하는 말 그대로 속수무책의 상황입니다. 일본의 한 원전 전문가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지금 후쿠시마 원전은 관리 불능 상태입니다.”
인간은 편리와 개발을 명목으로 자연을 마구 훼손했습니다. 뭇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지구온난화라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로인해 세계 곳곳에서 숲이 불타고 있습니다. 그 안타까운 현실을 보며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통제 불능’이라는 말뿐입니다. 화력발전에 비해 친환경적인 방법이라며 이곳저곳에 세운 핵발전소는 지속적으로 방사능 유출사고를 일으키고 있는데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관리 불능’이라는 말뿐입니다. 우리 인간 정말 너무 무책임합니다. 자연을 아끼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생명들을 귀히 여기지 않고, 그저 무책임하게 살다보니 우리는 같은 인간도 그렇게 대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아끼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자신의 생명처럼 귀히 여기지 않습니다. 서로에 대해서도 책임지려 하지 않습니다. 요즘처럼 사람이 무섭고 두려운 세상이 없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칼로 찌르는 일이 예사가 되었습니다. 그런 흉악한 일이 도심 한복판에서 일어나도 통제와 관리가 되지 않습니다. 이 역시 통제 불능, 관리 불능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떠오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같은 전능의 존재가 되기 위해 하나님이 정하신 순리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이 그런 욕심을 통해 이르는 곳은 자신의 존재를 부끄러워하고, 서로 책임을 전가하고, 자기의 옷조차 스스로 지어 입지 못하는 불능과 무능의 세상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 그 이름은 오늘 우리 모두의 이름입니다. 창세기는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쫓겨나 에덴의 동쪽에 가서 살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에덴이 따로 있고 에덴의 동쪽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둘은 같은 곳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순리를 따라 살아갈 때 경험하는 세계가 에덴이고, 하나님의 순리에서 벗어나 살아갈 때 경험하는 세계가 에덴의 동쪽입니다. 인류는 지금 스스로 에덴을 에덴의 동쪽으로 바꾸어가며 살고 있습니다.
• 산 위와 산 아래
마가복음 9장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1절에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와 있는 것을 볼 사람들도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가 이루어진 곳 혹은 때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 말씀 바로 뒤에 나오는 본문은 소위 ‘산상변화’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말씀 중이셨는데 예수님이 환하게 빛을 발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어디선가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 예수님과 함께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그 광경은 황홀했습니다. 너무 신비롭고 좋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승 님, 지금 여기가 너무 좋습니다. 초막 셋을 짓고 여기에 살지요. 하나는 스승님을 위해서, 다른 둘은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 짓겠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빛을 보았고, 예언과 율법이 하나의 인격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진 모습을 보고 너무 기뻤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았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산 위에서 살기를 소망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산 아래로 내려오셨습니다. 바른 신앙이란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늘에서만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땅에서도 이루어져야 하는 나라입니다. 깨달음이 좋다고 깨달음과 진리를 듣는 자리에만 계속 머무르면 안 됩니다. 고통과 아픔과 괴로움이 있는 일상의 자리로 내려와 그 자리에서 깨달음과 진리가 생명과 치유와 기쁨으로 작동되게 해야 합니다. 에덴을 가지고 이야기하자면, 에덴의 동쪽을 버리고 에덴으로 돌아가서 살기를 바라는 게 바른 신앙이 아니라, 에덴에 대한 꿈을 품고 에덴의 동쪽을 에덴으로 바꾸어 나가는 게 바른 신앙이며 올바른 하나님 나라 운동입니다.
• 제자들에게 없던 것
산 아래로 내려오니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여러 사람에 둘러싸여 논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곧 예수님께로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이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무슨 논쟁을 하고 있었느냐?” 그때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와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제 아들을 고쳐 달라고 데려왔습니다. 제 아들은 말을 못하는 귀신이 들려 있습니다. 어디서나 귀신이 아이를 사로잡으면, 아이는 거꾸러집니다. 그러면 아이는 거품을 흘리고 이를 갈며 몸이 뻣뻣해집니다. 선생님이 계시지 않아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부탁했으나, 제자들은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자초지종을 파악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화를 내셨습니다. “아,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겠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야 하겠느냐?”
예수님은 아이를 데려오게 하셨습니다. 귀신은 예수님을 보자, 아이에게 심한 경련을 일으켰습니다. 아이는 땅에 넘어져 거품을 흘리며 뒹굴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아이의 아버지에게 ‘아이가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나’ 물으셨습니다. 아버지가 대답했습니다. “어릴 때부터입니다.” ‘어릴 때부터’라면 1,2년 된 것이 아니라, 못해도 4,5년 이상 되었다는 말입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아이의 상태에 대해 좀더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귀신이 아이를 죽이려고 여러 번 불 속에도 던지고 물 속에도 던졌습니다.” 그 아들은 그냥 말 못하고 듣지 못하는 장애만 있는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간질로 의심되는 질병도 앓고 있었습니다. 또 그뿐 아니라 정신 이상 때문인지 자살 충돌 때문인지 스스로 여러 번 죽으려 했던 아들이었습니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4,5년 이상 곁에서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아버지는 어떤 마음으로 그 세월을 견디었을까요?
아버지는 예수님께 간청했습니다. “하실 수 있으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할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 말씀하셨습니다. 아주 유명한 말씀이지요. 믿음을 강조하는 대표적은 성경본문입니다. 이 본문을 읽다보면 예수님께서 그 아버지의 믿음을 보시고 아들의 병을 고쳐 주셨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저는 조금 생각을 달리합니다. 이미 그 아버지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믿음이 있었기에 예수님을 찾아 나왔고, 찾아왔으나 예수님이 보이시지 않자 제자들에게 대신 부탁도 해보았고, 제자들이 못하자 떠나지 않고 예수님께서 오실 때까지 기다렸던 것이지요. 저는 그 아버지의 한 마디의 말이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버지는 “제 아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십시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아버지에게 아들과 자신은 하나였습니다. 아들이 죽으면 아버지도 죽는 것이고 아들이 살면 아버지도 사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그 마음, 고통당하는 이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여기는 마음, 그와 내가 하나라는 마음,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지키겠다는 마음, 어떻게 해서든 그를 살리려 노력할 때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리라 믿는 마음. 그 마음은 사실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마음을 가지고 사셨습니다. 그 마음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을 만나셨고, 그 마음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고, 그 마음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들 속에 있던 귀신을 꾸짖어 쫓아내셨습니다. “귀신아, 그 아이에게서 나가라. 그리고 다시는 그에게 들어가지 말아라.” 아이는 회복되어 아버지와 함께 돌아갔습니다.
이후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왜 우리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예수님은 답하셨습니다.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답변이 좀 이상합니다. 제자들이 정말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 기도를 안 했을까요? 제자들은 기도를 하지 않았다기보다는 바른 기도를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기도형태의 말은 있었지만, 그 말 속에 예수님의 마음은 없었던 것입니다. 아들과 아버지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여기는 마음, 그들과 내가 하나라는 마음, 어떻게 해서든 치유해 주려 노력할 때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리라 믿는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 마음이 없었기에 귀신을 쫓아낼 수 없었고 사람들과 논쟁만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 서로의 곁이 되어
후쿠시마에는 ‘나미에’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후쿠시마 원전에서 14킬로미터 떨어진 곳입니다. 2011년 쓰나미로 후쿠시마 원전에서 방사능 누출 사고가 일어나자 거주가 제한되었던 지역입니다. 원전에서 가까운 지역이라 고농도 방사능 물질이 날아왔습니다. 사람들은 떠났고, 축사에 있던 소와 돼지들은 버려지거나 도살되었습니다. 요시자와 마사미 씨는 원전 사고 이전에도 그곳에서 살았고 2023년 현재도 그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는 나미에의 한 목장에서 소를 키우던 사람이었습니다. 원전 사고 이후 국가명령에 의해 잠시 목장을 떠났지만,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목장으로 돌아왔습니다. 소와 함께 40년을 살아왔는데 소들을 그냥 굶겨 죽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도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소들을 살려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목장으로 돌아왔습니다.
목장에는 300여 마리의 소가 있었습니다. 한 때 다른 목장에서 온 소들까지 500여 마리를 돌보기도 했지만 이제는 200여 마리를 돌보고 있습니다. 매일 아침 8시 소들에게 여물을 줍니다. 물론 이 소들은 이미 정부로부터 도살 명령을 받은 소들입니다. 피폭되고 방사능에 오염된 풀을 먹고 사는 소이기 때문에 이동도 판매도 금지되어 있습니다. 팔지도 못하는 소를 12년째 돌보고 있습니다. 소들 중에 일부는 온 몸에 하얀 부스러기 반점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마사미 씨에게 묻습니다. 도대체 왜 그렇게 하셨냐고, 왜 다른 사람들처럼 도망가지 않았냐고, 왜 다른 농장주들처럼 소를 버리거나 죽이지 않았냐고. 마사미씨는 대답했습니다. “생명이니까요.” 마사미씨는 소들이 자연사할 때까지 소들을 돌보겠다고 말했습니다. 세상에 둘도 없이 어리석은 마사미씨가 운영하는 목장의 이름은 <희망목장>입니다. 후쿠시마는 절망과 죽음의 땅입니다. 그러나 마사미 씨는 절망과 죽음의 땅을 어떻게 희망과 생명의 땅으로 바꿀 수 있는 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숲이 계속해서 불타고 바다가 계속 오염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순리를 따라 살지 않기 때문이고, 우리가 올바르게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의 말씀처럼 지금 피조세계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등장하기를 간절히 기다리면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나무는 불 타고, 바다는 오염되면서도 끙끙거릴 뿐 말을 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 자연세계 앞에서 무능하고 불능하게 아무 것도 못하고 그저 이렇다 저렇다 논쟁만 하고 있습니다. 마치 마가복음 9장에 나온 제자들처럼 말이죠. 그런 우리를 향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만 같습니다. “아,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겠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야 하겠느냐?”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바르게 기도해야 합니다. 죽어가는 피조세계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받아들이며, 자연을 효용가치와 이용가치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나와 같은 생명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곁을 끝까지 지키려는 결심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 생명이라도 살리겠다는 마음을 먹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그렇게 노력할 때 하나님께서 그 생명들을 다시 살려주시리라 믿어야 합니다. 그런 기도 없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이 불능과 무능의 기운을 떨쳐낼 방법이 없습니다.
저는 요즘 자주 부르는 찬양이 있습니다. 지난여름 청년부 농활 때 주제곡으로 불렀던 찬양입니다. 제목은 <서로의 곁이 되어>입니다.
하나님 보시기 좋았던 아름다운 세상/ 푸르른 하늘과 나무와 바다
생명의 숨결 함께 내쉬며 / 서로의 곁이 되어 살아가리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의 곁이 되어 주기를 결단하고, 또 사람뿐 아니라 뭇생명의 곁이 되어 주기를 결단하고, 사람과 하늘과 나무와 바다가 함께 호흡하며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상상만해도 좋습니다. 그런 세상이 하나님 보시기 아름다운 세상이겠지요. 이 찬양의 제목은 <서로의 곁이 되어>이지만, 소제목은 ‘기후 결단송’입니다. ‘기후 환경송’이 아니라 ‘기후 결단송’입니다. 이제 우리는 기후와 환경에 대해 이야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결단을 해야 합니다. 생명을 이용가치로만 생각하지 않기를 결단하고, 그 생명을 나와 같은 생명으로 고백하기를 결단하고, 그 생명을 살리기 위해 무엇이라도 하려고 결단하는 것이 기도이며 믿음입니다. 이 시대의 기독교인이 앞장서 그렇게 결단하면 좋겠습니다. 평화세상을 여는 녹색교회인 청파교회가 그렇게 결단하면 좋겠습니다. 모든 믿음의 백성이 그렇게 결단하고 그렇게 기도하고 그렇게 믿으면 좋겠습니다. 부디 생명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스러져가는 창조세계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실 수 있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