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4. 담대한 믿음
설교자 김기석
본문 행4:23-31
설교일시 2018/04/08
오디오파일 s20180408.mp3 [8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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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대한 믿음
행4:23-31
(2018/04/08, 부활절 제2주)

[베드로와 요한은 풀려나는 길로 동료들에게로 가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한 말을 낱낱이 일렀다. 동료들은 이 말을 듣고서, 다같이 하나님께 부르짖어 아뢰었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신 주님, 주님께서는 주님의 종인 우리의 조상 다윗의 입을 빌어서, 성령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방 민족이 날뛰며, 뭇 백성이 헛된 일을 꾀하였는가? 세상 임금들이 들고일어나고, 통치자들이 함께 모여서, 주님과 그의 메시아에게 대적하였다.' 사실,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가 이방 사람들과 이스라엘 백성과 한패가 되어, 이 성에 모여서, 주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대적하여, 주님의 권능과 뜻으로 미리 정하여 두신 일들을 모두 행하였습니다. 주님, 이제 그들의 위협을 내려다보시고, 주님의 종들이 참으로 담대하게 주님의 말씀을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주님께서 능력의 손을 뻗치시어 병을 낫게 해주시고, 주님의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표징과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해주십시오." 그들이 기도를 마치니,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이 흔들리고,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말하게 되었다.]

돌파 breakthrough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부활절 이후 오순절에 이르는 50일 동안은 부활의 기쁨과 감격을 삶 속에서 드러내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재판 결과가 나왔고, 팔레스타인 땅에서는 유혈사태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70주년을 맞은 제주도 4.3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가 시작되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이었는데도 무려 3만 여 명의 제주도민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아픈 기억을 가슴 깊은 곳에 숨기고 살아온 이들의 눈물을 보면서 참 안타까웠습니다. 억울한 이들의 눈물이 신원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리교회 중부연회는 신사 참배 80년을 아프게 돌아보며 우상숭배를 회개하는 선언문을 채택했습니다. 선언문은 신사참배를 "거룩하고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의 섭리를 배반하고 교회와 민족을 암흑의 시기로 이끌고 간 사건"이라고 정리하면서, "신사참배 80년을 맞이하여 지금이라도 신사참배는 우상숭배였음을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만천하에 천명하는 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참회가 일회적 행사로 끝나지 말고, 지금 우리를 온통 사로잡고 있는 물질주의의 우상에 대한 거부로 이어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일련의 정황 때문일까요? 요즘 들어 두렵고 떨림으로 상기하게 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덮어 둔 것이라고 해도 벗겨지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라 해도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마10:26). 하나님의 시간은 더딘 것처럼 보여도 정확하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은 무기력하지 않습니다. 때가 이르면 악한 이들은 심판을 받고, 거짓과 위선은 폭로되게 마련입니다. 이 엄중한 사실이 극적으로 드러난 것이 바로 주님의 부활 사건입니다. 부활과 뒤이은 성령 강림절 사건 이후에 제자들은 두려움의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 광장으로 나왔습니다. 베드로는 대중 앞에 서서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여러분은 그를 무법자들의 손을 빌어서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서 살리셨습니다. 그가 죽음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행2:23b-24)

한때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사람입니다. 여인들을 통해 주님의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요21:3)고 말하면서 옛 삶으로 복귀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베드로가 이처럼 당당하게 예수의 이름과 십자가를 자랑하고 부활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런 급격한 변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인간의 합리적 지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신앙체험을 설명하기 위해 사람들은 '돌파 breakthrough'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신앙은 딱딱하게 굳은 자아에 균열을 일으키고, 두려움의 장막을 찢어내고, 새로운 질서에 뛰어들게 하는 힘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과 성령 체험은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을 새로운 존재로 빚어냈습니다.

일어선 사람들
새로운 존재를 저는 일어선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많은 이들이 지금 예술의 전당에서 전시중인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 1901-1966)의 조각을 보고 감동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제일 유명한 작품 제목은 '걷는 사람'입니다. 형태는 단순합니다. 일체의 부피를 버리고 오직 뼈대로만 남은 한 사람이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의 눈빛은 형형합니다. 전시실 벽면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습니다. "마침내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한 발을 내디뎌 걷는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리고 그 끝이 어딘지 알 수 없지만, 그러나 나는 걷는다. 그렇다, 나는 걸어야만 한다." 일어섬은 넘어짐을 전제합니다. 넘어짐은 고통스럽습니다. 넘어짐이 반복되면 절망감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자코메티는 고난과 역경이 끊이지 않는 인생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와 시련을 벗삼아 두 눈 부릅뜬 채 세상을 응시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 어쩌면 그것이 인생이 아니겠느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이 바로 그러합니다. 넘어져보지 않으면 일어설 수도 없습니다. 자기에게 절망해보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희망을 품을 수도 없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주님을 부인하고 달아났던 쓰라린 기억 속에 머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은혜가 그들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 덕분에 그들은 일어나 십자가의 길을 뚜벅뚜벅 걸을 수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는 성전 아름다운 문 앞에 앉아 구걸로 연명하던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를 예수의 이름으로 고쳐주었습니다. 문득 그 일화가 제자들의 모습이 투영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면서부터 못 걷던 사람이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것과 제자들의 일어섬이 왠지 잘 연결이 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 기적을 보고 몰려든 사람들에게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제사장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은 사도들이 예수의 부활에 대해 가르치는 것을 보고 격분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일행을 붙잡아 공의회 앞에 세웠습니다. 베드로는 그 대단한 사람들, 요즘으로 치면 국회의원들 앞에서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당당하게 그들에 의해 기획되고 자행된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사건을 증언했습니다. 당혹감에 사로잡힌 것은 오히려 공의회 회원들이었습니다. 자기들의 권위 앞에 흔들리지 않는 바위와 같은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두 사람에게 공허한 명령을 내립니다. "절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그때 베드로와 요한이 한 말이 놀랍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인가를 판단해 보십시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행4:19-20)

당당합니다. 풀려난 베드로와 요한은 동료들에게 가서 그 동안 일어난 일과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한 말을 을 다 알렸습니다. 동료들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함께 기도를 올렸습니다.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신 주님'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강한 강조입니다. 현실을 지배하는 것이 저 유명짜한 사람들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시편 2편을 떠올립니다.

"어찌하여 이방 민족이 날뛰며, 뭇 백성이 헛된 일을 꾀하였는가? 세상 임금들이 들고일어나고 통치자들이 함께 모여서, 주님과 그의 메시아에게 대적하였다."(행4:25b-26)

헤롯과 빌라도,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들이 공모하여 예수를 죽음으로 내몬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의 부활을 통해 '헛된 일'이었음이 드러났습니다.

용기를 구함
사도들은 여전히 기세등등한 자들이 자기들을 해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는 현실을 그들은 모르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보호를 청합니다. 또한 "주님의 종들이 참으로 담대하게 주님의 말씀을 말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권세 잡은 자들이 듣기에 좋은 말만 할 생각이었다면 이런 기도는 필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위선과 불의를 폭로하고 잠든 영혼들을 깨우려면 하늘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진실한 말, 에너지로 가득 찬 말은 사건을 일으킵니다. 아브라함 헤셸은 예언자들의 말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들(예언자들)의 말은 맹렬한 공격이요 거짓 평안의 환상에 구멍을 뚫는 것이며, 책임 회피에 대한 도전이요 믿음을 회복하라는 촉구요 과연 분별력이 있으며 치우치지 않는가를 따지는 물음표다."(아브라함 J. 헤셸, <<예언자들>>, 삼인, 이현주 옮김, 2004, 24-5쪽)

이런 말이 살리는 말입니다. 듣는 이들과 척지지 않으려고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만 하면 그 말은 죽은 말일 뿐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아프게 합니다. 우리의 안일한 평안을 깨뜨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담스럽습니다. 하지만 그 말씀을 경청하고 그 말씀에 따라 우리 삶을 조율할 때 생명이 되살아납니다.

사도들의 기도는 이어집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능력의 손을 뻗치시어 병든 자들을 치유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놀라운 일들이 나타나, 많은 이들이 경외심을 품고 살게 되기를 빌었습니다. 나의 문제에만 집착하는 한 우리 믿음은 깊어지지 않습니다. 아픔을 겪는 이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설 땅이 되고, 비빌 언덕이 되어줄 때 생명의 기적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면 이런 이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사도들이 기도를 마치자 그들이 모여 있던 곳이 흔들리고, 그들은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말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은 우리 마음을 그리스도의 마음에 접속시켜 줍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리게 해줍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여럿 알고 있습니다.

이정표로선 사람들
지난 4월 4일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 서거 50주년이었습니다. 흑인 민권운동의 위대한 족적을 남겼던 그는 또한 복음이 얼마나 강력하고 아름다운지를 드러낸 증언자이기도 합니다. 인생의 종착역에 가까이 다가왔음을 절감했기 때문일까요? 그의 마지막 설교는 비장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주님의 날이 오면 자기가 어떠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는지를 특유의 간결하고 반복적인 문장으로 열거한 후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군악대장(軍樂隊長)으로 부르고 싶다면 정의를 알리는 군악대장, 평화를 알리는 군악대장, 평등을 위한 군악대장으로 불러주십시오. 나머지 사소한 것들은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나는 죽은 뒤에 한푼도 남기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죽은 뒤에 멋지고 화려한 재물들도 남기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죽은 뒤에 헌신적인 인생을 남기고 싶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내가 지나가는 길에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면, 노래나 말로 누군가의 용기를 북돋울 수 있다면, 누군가에게 옳지 않은 길을 가고 있다고 말해줄 수 있다면, 나의 삶은 헛되지 않은 것이 될 것입니다. 내가 기독교인의 의무를 다 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가르침을 전할 수 있다면, 나의 삶은 헛되지 않은 것이 될 것입니다."(마틴 루터 킹 자서전, 클레이본 카슨 엮음,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이순희 옮김, 바다출판사, 2000년 3월 27일 p.471)

'그렇습니다. 킹목사님, 당신의 삶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당신은 살아있는 사람으로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성령에 충만했기에 그는 그렇게 담대하게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전하는 자로 살았습니다. 내일(4월 9일)은 독일의 순교자인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의 순교일입니다. 본회퍼는 게슈타포 감옥에 갇혀서도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동료 수인이었던 파비안 폰 슐라브렌도르프는 감옥에서 본회퍼가 어떻게 지냈는지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는 항상 밝고 명랑했습니다. 한결같이 친절했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왔습니다. 그리하여 아주 짧은 시간 내에 적대적인 감옥 보초들까지도 정신적으로 항복하는 것으로 인해 내심 놀랐습니다. 우리 둘의 관계에서 제가 한동안 우울증에 시달린 반면, 그는 항상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졌다고 인정할 때에만 정말 패배한 것이라고, 지치지 말라'고 끊임없이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준 사람은 언제나 그였습니다."(디트리히 본회퍼와 약혼녀 마리아의 편지 <옥중연서>, 김순현 옮김, 복 있는 사람, 2013년 6월 17일, p.343)

1945년 4월 연합군의 폭격이 심해지자 나찌는 죄수들을 이송시키려 했습니다. 본회퍼도 부헨발트, 레겐스부르크를 거쳐 쇤베르크에 있는 학교로 이송되었습니다. 그곳에서도 그는 연약해진 형제들을 염려와 절망에서 건져내려고 애썼습니다. 4월 9일, 동료 수감자들과 아침 묵상 예배를 막 마쳤을 때 간수가 그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마지막임을 직감한 그는 존경하는 치체스터의 주교에게 마지막 인사말을 남겼습니다.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그러나 제게는 삶의 시작입니다. This is the end, for me the beginning of life."(앞의 책, p.351)

부활절기에 이 두 사람을 굳이 떠올리는 까닭은 믿음의 사람이 어떠한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명심하기 위해서입니다. 부활 신앙 안에서 사는 사람은 죽음보다 생명이 더 근본적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렇기에 죽음의 기운이 넘치는 세상에 생명과 사랑의 씨를 뿌리는 일에 주저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주님께 담대한 믿음을 청해야 합니다. 이 아름다운 봄날 우리 믿음의 키가 훌쩍 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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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날 짜 2018년 09월 18일 09시 47분 18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