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46. 거룩 앞에 서다
설교자 김기석
본문 출 33:7-11
설교일시 2018-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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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 앞에 서다
출33:7-11
(2018/11/18, 창조절 제12주)

[이스라엘 백성이 진을 칠 때마다, 모세는 장막을 거두어 가지고 진 바깥으로 나가, 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그것을 치곤 하였다. 모세는 그 장막을, 주님과 만나는 곳이라고 하여, 회막이라고 하였다. 주님을 찾을 일이 생기면, 누구든지 진 밖에 있는 이 회막으로 갔다. 모세가 그리고 나아갈 때면, 백성은 모두 일어나서 저마다 자기 장막 어귀에 서서, 모세가 장막으로 들어갈 때까지 그 뒤를 지켜보았다. 모세가 장막에 들어서면, 구름기둥이 내려와서 장막 어귀에 서고, 주님께서 모세와 말씀하신다. 백성은 장막 어귀에 서 있는 구름기둥을 보면, 모두 일어섰다. 그리고는 저마다 자기 장막 어귀에서 엎드려 주님을 경배하였다. 주님께서는,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말하듯이,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고 말씀하셨다. 모세가 진으로 돌아가도, 눈의 아들이며 모세의 젊은 부관인 여호수아는 장막을 떠나지 않았다.]

∙불안, 인간의 운명
외롭고 쓸쓸한 이들의 동행이 되어주시는 주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오갈든 붉은 단풍이 늦가을의 쓸쓸함을 자아냅니다. 어떤 분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풍은 떡갈나무 잎이라고 하더군요. 색이 고운 것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바라보아도 질리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미학적 관점은 저마다 다르니 뭐라 반박할 말은 없습니다. 거리에 융단처럼 깔려있던 노란 은행잎도 바람에 날려갔습니다. 그 빈자리가 쓸쓸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합니다. 비어야 새로운 것이 들어올 수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의 일상을 돌아봅니다. 분주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일상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을 수행하는 것만도 힘에 겨운 데, 뜻밖에 끼어드는 일들이 우리 정신을 쏙 빼갑니다. 지금도 우리 앞에는 처리해야 할 많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숨을 돌릴 여유가 없습니다.

창조 이야기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목은 하나님께서 창조를 마치신 후 안식하셨다는 대목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단하기 때문에 쉬셨다는 말은 분명 아닙니다.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진 세상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즐기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상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안식이야말로 창조의 완성입니다. 안식일을 가리켜 ‘시간 속의 성소’라고 말한 이가 있습니다. 안식일은 안식교인이나 유대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우리는 물론 주일을 지키지만 그렇다고 하여 안식일의 의미가 퇴색되어서는 안 됩니다. 안식일은 인간이 스스로 창조의 주체가 되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창조의 리듬 속에 자신을 맡기는 날입니다. 우리가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겸허하게 재확인하는 날이라는 말입니다. 수영을 해본 분은 경험해보셨겠지만 몸에 힘을 빼고 물에 온몸을 맡길 때 느끼는 안온한 느낌, 바로 그것이 안식일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성취해야 할 어떤 목표 때문에 안달하는 이들은 안식을 누리지 못합니다. 안식일의 정신은 비움입니다. 욕망으로 오염된 시간, 나로 가득 찬 시간을 비울 때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가 우리 몸과 마음에 배어듭니다. 에밀 시오랑이라는 사람은 ‘지옥이란 한 순간도 자기를 잊을 수 없는 곳‘이라고 말했습니다. 자기에게 몰두할 때 우리 마음에서 이웃들은 소거됩니다. 하나님조차 그의 삶에 영향을 끼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자기 속으로 구부러졌던 우리 마음을 들어올려 주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비움입니다.

그러나 불안은 어쩌면 인간의 운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아담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생령은 욕망을 가진 존재입니다. 헐떡거리며 뭔가를 추구하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늘 흔들립니다. 그것이 바로 불안입니다. 불안을 떨치기 위해 사람들은 뭔가 가시적인 것들에 집착합니다. 불안의 대용물을 찾는다는 말입니다. 땅, 집문서, 성공, 인기, 권력 등을 손에 넣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손에 넣었다고 해서 삶의 불안이 그치지는 않습니다.

∙단절의 경험
출애굽 공동체는 많은 기사와 이적을 경험했습니다. 애굽에 닥친 열 가지 재앙도 경험했고, 홍해에서의 구원도 경험했습니다.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주린 배를 채우기도 했고, 반석에서 터져 나오는 물도 갈증을 해소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이끌던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자, 그들 속에 잠들어 있던 불안이 깨어났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아론을 겁박하여 금송아지를 만들고는 그 앞에서 먹고 마셨습니다. 춤을 추기도 했습니다. 금송아지는 그들의 불안이 외적으로 드러난 징표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그들의 행태를 ‘타락’이라 단언하십니다(출32:7). 또한 그들을 가리켜 ‘고집이 센 백성‘이라고 말합니다. 고집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자기 의견을 바꾸거나 고치지 않고 굳게 지켜서 우김’입니다만, 여기서의 고집은 하나님의 미래 앞에 자기를 개방하지 못하는 삶의 관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모세는 진노하신 하나님의 팔을 붙드는 마음으로 한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청합니다. 조상들과 맺었던 언약을 기억해달라고도 말합니다. 모세는 산 아래로 내려와 금송아지를 불에 태우고, 그것을 가루가 될 때가지 빻아, 물에 타서 백성들에게 마시게 했습니다. 그리고 레위 지파 사람들을 시켜서 많은 이들을 징계했습니다.

모세는 다시 하나님께 올라가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간청합니다.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 그들을 이끌도록 하겠다면서도 당신은 그 백성과 동행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동행하시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옮기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장신구를 떼어내라고 요구하십니다. 장신구는 금송아지를 만들 때도 등장합니다. 장신구를 달지 않는 것은 옛 삶과의 철저한 결별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장신구들을 떼어냄으로 자기들의 결의를 드러내 보였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 급박한 이야기의 중간에 끼어든 일종의 휴지부와 같습니다. 어쩌면 모세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한 장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출애굽 공동체는 호렙산을 떠나 천천히 가나안을 향해 진군했습니다. 백성들이 휴식을 위해 진을 칠 때마다 모세는 진 바깥에 회막을 세웠습니다. 회막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라기보다는 하나님이 그 백성들과 만나기로 약속하신 장소라 할 수 있습니다. 회막은 그런 의미에서 인간 세상에 가까이 내려온 시내산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애굽인들이 만든 오벨리스크가 피라미드의 대용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만남의 장소를 진 중앙이 아닌 바깥에 친 것은 하나님은 인간이 임의로 접근하거나, 함부로 대해도 좋은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암시하기 위한 것 같습니다. 종교 체험의 본질은 ‘두려움과 떨림’입니다. 우리보다 무한히 크신 분 앞에서 경외감을 느낄 때 비로소 자기 정화가 시작됩니다.

∙무한하신 분과의 친밀한 교제
하나님에 대해서 마치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위험한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에 대해 다 알 수 없습니다. 욥의 친구인 소발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깊은 뜻을 다 알아낼 수 있느냐? 전능하신 분의 무한하심을 다 측량할 수 있느냐? 하늘보다 높으니 네가 어찌 미칠 수 있으며, 스올보다 깊으니 네가 어찌 알 수 있겠느냐? 그 길이는 땅 끝까지의 길이보다 길고, 그 넓이는 바다보다 넓다.”(욥11:7-9)

이 말이 욥을 비난하기 위해 한 말이긴 하지만 그른 말은 아닙니다. 사람들을 광장으로 동원하고,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막말을 내뱉으며, 그것을 종교적 권위로 치장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미혹 당한 이들은 그들의 말을 하나님 말씀으로 수용합니다.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불교의 화두 가운데 하나인 ‘오직 모를 뿐‘이라는 말이 참 적실합니다.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경외심을 품고 하나님이 우리 눈을 열어주시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경외하는 사람만이 사소한 것들 속에 깃든 영원을 봅니다. 빠르게 변전하는 세상 속에서 변치 않는 고요함을 봅니다.

모세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회막에 가곤 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장막 어귀에 서서 모세가 장막으로 들어갈 때까지 그를 지켜봤습니다. 모세가 장막에 들어서면, 구름기둥이 내려와서 장막 어귀에 섰습니다. 구름기둥은 물론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백성들은 구름기둥을 보면 모두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저마다 엎드려 주님을 경배했습니다. 금송아지 앞에 엎드리던 그들이 하나님의 위엄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한하신 하나님은 또한 가장 친밀하게 사람들과 소통하는 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말하듯이,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고 말씀하셨다”는 구절이 참 소중합니다. 무한하신(infinite) 하나님이 가장 친밀하신(intimate) 분이기도 하다는 것이 바로 은총의 신비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신비가 오롯이 드러난 말이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십니다. 얼굴을 마주하고 말씀하십니다. 일방적으로 당신의 뜻을 부과하지 않으시고 대화를 통해 문제를 풀어가십니다. 대화란 상대방의 말을 통해 나의 입장이나 생각을 바꿀 용의가 있을 때 시작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지만 그것이 독백에 불과할 때가 많습니다. 서로 자기 말만 하고 헤어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이 인간과 대화를 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스스로 뜻을 돌이킬 각오가 되어 있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모세는 하나님께 불충한 백성에게 품으셨던 노여움을 풀어달라면서,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주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셨음을 기억해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말에 이렇게 응답하십니다. “내가 친히 너와 함께 가겠다. 그리하여 네가 안전하게 하겠다.” 모세는 하나님의 노여움이 봄눈 녹듯 녹지 않았음을 즉각 알아차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우리와 함께 가지 않으시려면, 우리를 이곳에서 떠나 올려 보내지 마십시오.”(출33:14, 15-16). ‘너와 함께 가겠다’라는 선언을 ‘우리와 함께 가 달라’로 요구로 전환시킨 것입니다. 중보자로서의 지도자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베 피에르 신부가 한 말을 기억합니다. 그는 사람을 신자와 비신자로 나누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가 제시하는 기준은 간단합니다. 홀로 만족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공감하는 사람인지, 다른 사람의 고통 앞에서 등을 돌리는 사람인지 고통을 나누려는 사람인지를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홀로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모세의 그런 간절함이 하나님의 마음을 돌려놓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잘 알고, 또 너에게 은총을 베풀어서, 네가 요청한 이 모든 것을 다 들어 주마.”(출33:17)

∙해답 없는 삶이라 해도
살다보면 출애굽기 32장과 같은 상황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우리 시선이 자꾸 눈앞의 것만을 향할 때가 있습니다. 뭔가 확실한 것을 붙들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단에 이끌리는 것은 모호한 생을 견딜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삶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정답이 있다고 말하는 이들일수록 위험한 사람들입니다.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다고 말해야 정직한 것입니다.

미국의 저명한 윤리신학자인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정신질환을 앓던 아내 앤으로 인해 참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아내의 요청에 의해 이혼을 했고 앤은 50대 후반에 울혈성 심부전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앤의 외로운 죽음은 하우어워스의 마음을 찢어놓았습니다. 신학자이지만 그는 앤의 비통한 삶과 죽음에 대해 한 마디로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일에는 누구도 섣부른 대답을 시도해서는 안 됩니다. 그 쓰라린 경험 끝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답 없이 사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이렇게 사는 법을 배울 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너무나 멋진 일이 된다. 신앙은 답을 모른 채 계속 나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스탠리 하우어워스, [한나의 아이], 홍종락 옮김, Ivp, 2016년 7월 12일, p.375)

우상 없이 살기를 배우는 것, 해답 없는 삶을 살면서 영원한 중심이신 하나님의 마음에 당도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과제입니다. 답 없이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부력浮力을 깊이 신뢰해야 합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고,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야 합니다. 전도서 기자는 모색의 시간을 통해 자기가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 다만 내가 깨달은 것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사람을 평범하고 단순하게 만드셨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복잡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전7:29) 단순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현존 앞에 자꾸 서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깊이 신뢰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 살되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태연해야 합니다. 다시 전도서 기자의 말입니다. “이제 나는 깨닫는다.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것,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랴!”(전3:12) 우리보다 무한히 크신 하나님은 동시에 우리에게 친밀하게 다가오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단순하게 신뢰하고 경외하면서,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속에서 살아갈 때 우리는 생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거룩함 앞에 섰던 모세처럼 우리도 조심조심 그러나 명랑하고 씩씩하게 우리 생의 경주를 계속할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8년 11월 18일 12시 27분 48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