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4. 다시 시작할 용기
설교자 김기석
본문 암 9:11-15
설교일시 2019/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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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할 용기
암9:11-15
(2019/01/27, 주현 후 제3주)

["그 날이 오면, 내가 무너진 다윗의 초막을 일으키고, 그 터진 울타리를 고치면서 그 허물어진 것들을 일으켜 세워서, 그 집을 옛날과 같이 다시 지어 놓겠다. 그래서 에돔 족속 가운데서 남은 자들과, 나에게 속해 있던 모든 족속을, 이스라엘 백성이 차지하게 하겠다." 이것은 이 일을 이루실 주님의 말씀이다.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다. "그 때가 되면, 농부는 곡식을 거두고서, 곧바로 땅을 갈아야 하고, 씨를 뿌리고서, 곧바로 포도를 밟아야 할 것이다. 산마다 단 포도주가 흘러 나와서 모든 언덕에 흘러 넘칠 것이다. 내가, 사로잡힌 내 백성 이스라엘을 데려오겠다. 그들이 허물어진 성읍들을 다시 세워, 그 안에서 살면서 포도원을 가꾸어서 그들이 짠 포도주를 마시며, 과수원을 만들어서 그들이 가꾼 과일을 먹을 것이다. 내가 이 백성을 그들이 살아갈 땅에 심어서, 내가 그들에게 준 이 땅에서 다시는 뿌리가 뽑히지 않게 하겠다." 주 너의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시간은 가능성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도 우리는 주님의 돌보심과 보호하심 가운데 살았습니다. 슬픈 일, 기쁜 일, 고단한 일, 답답한 일도 많았지만 그 모든 시간을 아름다운 삶의 무늬로 바꿔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일은 언제나 힘겹습니다. 가끔은 시간 밖으로 나가고 싶을 때도 있고, 시간을 정지시키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동화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아시지요? 열 다섯 살 공주는 물레 바늘에 찔리자 잠에 빠져듭니다. 공주의 잠은 온 성 안에 퍼져 왕과 왕비가 잠들고 파수병은 창을 쥔 채, 말 탄 병사는 말을 탄 채, 고양이는 쥐를 잡다 만 채 잠이 들어 버립니다. 아궁이의 불까지도 타고 있던 상태로 멈춥니다. 성 안의 시간은 왕자의 키스로 공주가 눈을 뜰 때까지 멈춰 있었습니다(송상일, <時代와 삶>, 도서출판 문장, 1979년 4월 20일, p.21-22).

멈춘 시간은 변화가 불가능한 상태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시간은 ‘가능성‘을 ‘현실’로 바꿀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멈춘 시간을 깨울 수 있는 힘은 사랑 밖에는 없습니다. 사랑은 뭔가를 갈망하게 합니다. 현재는 사랑을 위한 기회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은 뭔가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늙음은 살아온 세월의 많음이 아니라,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은 마음, 새롭게 시작할 생각이 없는 마음의 상태 곧 열정의 소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잘 산다는 것은 물론 자기 때를 분별하며 그 때에 맞는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젊은이는 젊은이다워야 하고, 나이 드신 분들은 또 그 나이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이가 많든 적든 우리에게는 한 가지 공통의 꿈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입니다. 죽어서 가는 천국을 말하는 게 아니라, 지금 여기서 시작하는 하나님 나라 말입니다. 염세적인 생각에 빠져서 피안의 세계만 바라보는 이들이 더러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피안이 아니라 차안 곧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장벽을 허물어 만날 생각이 없었던 이들이 만나게 하고, 삶의 무게에 짓눌려 오로지 자기에게만 몰두하고 있던 사람들이 함께 생을 경축하고 향유할 수 있게 하고, 모든 생명이 자기에게 품부된 소명에 따라 기쁘게 살아가도록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움터오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몸으로 입증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가끔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역하는 세상과 맞서야 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기 어려운 이들의 벗이 되어야 합니다.

∙빛과 그림자
예언자들은 바로 그런 소명에 충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모스는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던 시대(주전 786-746)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바야흐로 이스라엘의 새로운 전성기라 할 수 있는 시대였습니다. 북쪽의 시리아는 무너져가고 있었고, 앗시리아는 아직 쇠약했습니다. 북방의 강자들이 오랜 분쟁 끝에 몸을 도사릴 수밖에 없었던 시기를 틈 타 이스라엘은 국력을 신장시켰습니다. 부와 재물이 쌓였고, 국경은 확장되었습니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입니다. 축적된 부는 모든 국민에게 골고루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왕을 비롯한 지배집단이 그 부를 독차지했던 것입니다. 부자들은 비싼 상아 침대 위에서 음탕한 향연을 벌였고, 겨울 별장 여름 별장을 따로 두고 값비싼 향유를 몸에 바르며 사치스러운 삶을 사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이들은 신 한 켤레 값에 종으로 팔렸고, 힘 없는 사람들은 흙먼지 속에 처박혔습니다. 재판관들은 뇌물을 받고 엉터리 판결을 내렸습니다. 부에 취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거추장스러운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잔인한 세월이었습니다. 돈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자 사람들은 더 이상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전락했습니다. 신전에서 종교 행위는 지속되었으나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화를 돋우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잃어버린 제사 행위는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언자를 통해 그들이 벌이는 절기 행사들, 성회, 번제물, 곡식제물, 화목제, 노랫소리가 역겹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그런 종교적 실천이 아닙니다. 아모스 하면 떠오르는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암5:24)

전직 대법원장이 구속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영장 심사를 맡은 판사는 사법 거래가 실제로 있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법은 엄정하게 집행되어야 합니다. 사람에 따라 혹은 정치적 성향에 따라 다른 기준이 적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법은 객관적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회적 신뢰의 토대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사법적인 정의만 강조하지 않습니다. 주변화된 사람들,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기 어려운 이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게 바로 회복적 정의입니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은 그런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법이 엄정하게 집행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약자들을 품어 안으려는 마음이 사회에 물결처럼 번져갈 때 세상은 살만한 곳으로 변할 겁니다.

이사야가 꿈꾸었던 세상, 곧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눕는 세상은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때’ 비로소 도래합니다. 허황된 꿈처럼 보입니다. 사실 그런 세상은 저절로 오지 않습니다.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이들은 절대로 자기들의 특권을 내려놓을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자기 시대를 꿰뚫어보는 사람, 하나님의 눈으로 역사를 주석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눈에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의 끝이 환하게 보입니다. 나라가 병들어가든 말든, 이웃이 죽어가든 말든 제 배를 불리는 일에만 골몰하는 사람들이 넘치는 세상은 멸망을 앞둔 세상입니다. 아모스는 그런 세태를 보며 엄중하게 경고합니다. “마음껏 흥청대던 잔치는 끝장나고 말 것이다”(암6:7b).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공멸을 면하기 위해서는 이웃의 신음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억울함과 분노가 사회에 축적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예언자는 회개하라고, 여호와께 돌아오라고 목이 터져라 외칩니다. 하지만 이미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사는 이들은 그 말을 들을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아모스는 결국 ‘성전이 붕괴되는 날‘, ‘민족이 전멸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 엄중하게 경고합니다. 불쾌하고 두려운 말입니다. 그래서 베델의 제사장인 아마샤는 아모스가 반란을 선동한다고 왕에게 고발합니다. 그리고 아모스를 찾아와서 말합니다. “선견자는, 여기를 떠나시오! 유다 땅으로 피해서, 거기에서나 예언을 하면서, 밥벌이를 하시오”(암7:12). ‘밥벌이’라는 말이 참 비릿합니다. 타락한 종교의 실상이 이 말에서 드러납니다. 아모스는 아마샤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환상, 곧 이스라엘이 철저하게 멸망할 것임을 보여주는 환상을 담대히 전합니다. 그렇지만 그게 끝은 아닙니다. 심판은 구원과 연결되는 법입니다. 아모스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희망을 사람들에게 전해줍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하게 하시는 하나님
인간의 희망이 끝나는 곳에서 하나님의 희망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고전1:25). 아모스는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크심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 만군의 하나님이 땅에 손을 대시면, 땅이 녹아 내리고 그 땅의 모든 주민이 통곡하며, 온 땅이 강물처럼 솟아오르다가 이집트의 강물처럼 가라앉는다. 하늘에 높은 궁전을 지으시고, 땅 위에 푸른 하늘을 펼치시며, 바닷물을 불러 올려서 땅 위에 쏟으신다. 그분의 이름은 ‘주님’이시다!”(암9:5-6)

땅이 녹아 내리고, 땅이 강물처럼 솟아오르다가 강물처럼 가라앉는다는 표현은 눈앞의 현실에만 몰두한 채 살아가는 이들에게 허황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경험한 이들은 외경심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손이 많으십니다. 서울 시립과학관 관장인 이정모 박사는 이 거대한 우주 속에서 오물거리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재미있게 설명합니다. 태양계 전체를 100억 분의 1로 축소하면 축구장 300개 면적이 됩니다. 그런데 태양은 그 가운데 먹는 ‘배‘ 하나 정도의 크기입니다. 목성과 토성은 유리구슬 두 개 정도 크기이고, 천왕성과 해왕성은 콩알 두 개에 해당하고, 지구는 볼펜 심 끝에 있는 쇠구슬 정도 크기라고 합니다. 그 속에 있는 우리는 얼마나 작습니까? 태양계가 그 정도인데, 우주 전체로 상상을 넓혀보면 말문이 막힐 따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놀라운 존재입니다. 이 광막한 우주를 탐구하고 사유의 대상으로 삼고 있으니 말입니다. 미국의 우주 탐사선 뉴호라이즌스호는 9년 6개월 동안 56억 7천만 킬로미터를 비행하여 명왕성 근처까지 갔다고 합니다. 빛의 속도로 5시간 걸리는 거리입니다. 그게 어느 정도인지 잘 가늠이 안 되시지요? 빛이 태양에서 지구까지 오는데 걸리는 시간이 대략 8분 20초이고, 달빛이 지구에 도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1.2초라고 합니다. 느낌이 오시나요? “주님 앞에서는 천년도 지나간 어제와 같고, 밤의 한 순간과도 같습니다”(시90:4)라는 시인의 고백이 그저 시적 수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에 깊이 개입하시는 것은 사랑 아니고는 설명이 안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앞에서 결코 오만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민족의 운명을 손에 쥐고 계십니다. 이스라엘도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반하면 징계를 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그들의 특권의식을 먼저 제거하실 것입니다. 선택은 특권이 아니라 소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주님의 일을 함께 하자는 초대입니다. 생명을 풍부하게 하고, 평화가 가득한 세상의 꿈은 우리의 꿈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꿈입니다. 그 꿈을 배신하는 이들을 징계하시지만 그들을 아주 버리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찌르기도 하시지만 싸매어 주기도 하시며, 상하게도 하시지만 손수 낫게도 해주신다“(욥5:18)지 않습니까?

∙일상의 회복
오늘 읽은 본문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다룹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정화한 후에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십니다. 무도하던 이스라엘의 주변국들도 주님의 통치 아래 굴복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회복하시는 세상은 특별하지 않습니다. 그곳은 일상적 삶이 가능한 세상입니다. 노동이 저주가 아니라 복인 세상입니다. 정직한 땀을 흘린 후에, 그 땀의 보람을 착실히 누리는 세상입니다.

“그 때가 되면, 농부는 곡식을 거두고서, 곧바로 땅을 갈아야 하고, 씨를 뿌리고서, 곧바로 포도를 밟아야 할 것이다. 산마다 단 포도주가 흘러 나와서 모든 언덕에 흘러 넘칠 것이다.”(암9:13)

이렇게 일상이 회복되면 백성들도 돌아올 것입니다. 사로잡힌 백성들, 이곳저곳에 흩어져 살던 이들이 돌아와 허물어진 성읍을 다시 세우고, 자기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살게 될 것입니다. 한때 어느 대선 후보가 제시한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이미지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적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언제 뿌리 뽑힐 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우리 삶을 갉아먹고 있습니다. 취직 걱정, 집 장만, 자녀 교육 문제, 노후 생활에 대한 불안 등이 거미줄처럼 확고하게 우리를 얽어매고 있습니다. 삶을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권태로울 수도 있는 일상의 모든 순간은 하나님의 은총이 유입되는 통로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의 흐름에 맹목적으로 몸을 맡기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때로는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기도 하고, 담벼락 같은 세상에 틈을 만들어 시원한 바람이 불게 만들어야 합니다. 유쾌하게 다른 세상을 상상하는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의 꿈을 꾸는 이들입니다. 행복을 구성하는 다른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입증하는 것이야말로 성도들의 소명입니다. 저 앞에 있는 목표에 몰두하느라 이미 선물처럼 주어진 것들을 누리지 못함이 어리석음입니다. 경쟁이 일상이 된 세상에 살고 있지만 유쾌한 협동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증언해야 합니다. 경쟁력이 좀 부족한 사람이라 해도 존엄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열기 위해 분투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샬롬의 세상이 다가왔음을 알게 될 겁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통해 이 땅을 치유하기를 원하십니다. 세상만 바라보고 투덜거리는 사람으로 살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용기를 발휘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바로 세상의 빛, 세상의 희망이라 말씀하십니다. 이 벅찬 소망을 가슴에 품고 생명과 평화를 파종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9년 01월 27일 10시 39분 37초